대니얼 크레이그가 본드로 출연하기 시작한 이후, 시리즈의 프로듀서들은 007 시리즈를 리부트하길 원했다. 007은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장기 제작되고 있는 프랜차이즈이지만 시리즈의 계승을 위해서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이미지의 본드가 절실했을 거다. 21세기 본드 제작진의 해답은 과거 007 시리즈의 전형적인 포맷을 따르기보다 이안 플레밍의 원작에 가깝게 본드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형화된 007 시리즈의 이미지에 익숙했던 팬들은 대니얼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를 두고 “007 영화가 아니라 단순한 액션 복수극처럼 느껴진다”며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10월12일 뉴욕 AMC 로스 극장에서 언론에 최초 공개된 <스카이폴>은 크레이그의 전작 <카지노 로얄>과 <퀀텀 오브 솔러스>를 뛰어넘어 007 시리즈의 진정한 리부트를 알리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본드, M, 악당 실바의 삼각관계
<스카이폴>은 줄거리를 이야기하기가 무척 힘든 작품이다. 그만큼 영화 도처에 지뢰밭 같은 스포일러가 숨어 있다. 영화를 홍보•배급하는 소니픽처스도 시사회에 참석한 기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스포일러 주의’를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소개할 수 있는 선에서 말하자면, <스카이폴>의 가장 큰 위기는 제임스 본드(대니얼 크레이그)와 그의 가장 큰 조력자 M(주디 덴치)에게 닥쳐온다.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터키에서 MI6 요원들의 신상 정보가 든 파일을 훔쳐 달아난다. 본드는 이를 되찾기 위해 MI6 요원 이브(나오미 해리스)와 함께 암살자의 뒤를 쫓던 도중 M의 명령으로 쏜 이브의 총에 잘못 맞아 깊은 강물 속으로 떨어진다. 본드의 사망 소식과 더불어 MI6 요원들의 신원이 인터넷에 공개되자, 미션의 책임자였던 M은 궁지에 몰린다. 그녀의 퇴진을 앞장서서 종용하는 사람은 영국 정보보안위원회의 신임 회장 개리스 맬러리(레이프 파인즈). 설상가상으로 MI6 본부 건물이 폭파되며 미스터리한 메시지가 M에게 전달된다. “당신의 죄를 생각하라.”
본드를 비롯한 MI6 요원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운명을 선사한 이는 <아메리칸 뷰티>와 <로드 투 퍼디션>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샘 멘데스 감독이다. 드라마가 강했던 그의 전작들을 떠올린다면 액션장면이 난무하는 007 시리즈에서 그의 이름을 목격한다는 것이 상당히 낯설 것이다. 하지만 <스카이폴>의 언론 인터뷰에 참석한 프로듀서 바버라 브로콜리(그녀는 007 시리즈를 제작해온 알버트 브로콜리의 딸이다.-편집자)에 따르면 멘데스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된 건 본드 시리즈에 대한 그의 열렬한 애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샘은 이번 작품을 샘 멘데스의 영화가 아니라, 샘 멘데스의 ‘본드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브로콜리는 더불어 “<로드 투 퍼디션>에서 샘과 함께 작업했던 인연으로 친분을 쌓은” 대니얼 크레이그가 그와의 술자리에서 시리즈의 열혈 팬임을 고백하는 맨데스에 감동받아 007 시리즈의 제작진에게 그를 <스카이폴>의 감독으로 추천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과연 <스카이폴>은 캐릭터 사이의 갈등과 드라마를 유려한 솜씨로 빚어내는 감독의 장기가 빛을 발하는 ‘샘 멘데스표’ 본드 영화다. 이 중심에는 본드와 M, 악당 실바(하비에르 바르뎀)가 있다. 이들의 ‘삼각관계’가 너무도 끈끈하게 이어져 있어 본드걸이 두명이나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존재감이 미미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번 작품을 통해 상징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본드는 여전히 뛰어난 첩보요원이지만 세월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암살자 추격전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본드가 행동요원으로 복귀하기 위해 신체 테스트를 받는 장면에서 크레이그가 보여주는 눈빛 연기는 <스카이폴>의 격렬한 액션장면보다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더 큰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본드를 보듬는 M은 냉혹한 상사이기 이전에 어머니처럼 기댈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주디 덴치의 내공은 그녀가 M으로 등장했던 어떤 영화에서보다 빛을 발하는데,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은 할리우드 액션영화가 아니라 셰익스피어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과거의 사건으로 M을 증오하게 된 악당 실바도 인상적이다. 머리색과 눈썹까지 금발로 염색하고 화려한 의상과 행동을 선보이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기괴한’ 실바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그가 연기한 안톤 쉬거를 떠올리게 한다. 실바의 아지트에 잡혀온 본드의 셔츠 단추 하나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관객을 긴장시키는 바르뎀의 연기 덕분에 실바는 007 시리즈의 인상적인 악당 중 한명으로 각인될 것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신세대 컴퓨터 천재로 ‘리부트’된 Q(벤 위쇼), M과 더불어 본드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알고 있는 친구 킨케이드(앨버트 피니) 등이 <스카이폴>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우려를 씻어낸 샘 멘데스 버전의 액션
샘 멘데스가 시리즈를 맡으며 약점으로 지적됐던 액션장면의 연출도 무리없어 보인다. <스카이폴>은 이미 예고편을 통해 소개된 시장에서의 자동차 추격전과 열차칸 위에서의 격투 외에도 다양한 액션 신을 장전하고 있다. 지붕 위에서 모터사이클을 타는 추격장면과 MI6 본부 폭파장면, 카지노 안에서의 결투장면, 지하철에서의 추격장면 등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액션 신의 비중은 <카지노 로얄> <퀀텀 오브 솔러스>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장면들의 공은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에게 돌아가야 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샘 멘데스와 호흡을 맞췄던 디킨스는 잘 알려졌듯 코언 형제의 전속 촬영감독이다. <스카이폴>은 그런 그의 첫 디지털영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해 프레임 안에서 재단하는 그의 특기는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디킨스는 중국과 터키, 영국 등 수많은 로케이션을 화면에 담아냈는데 그중에서도 본드와 M이 적을 피해 애스턴마틴 DB5를 타고 스코틀랜드 산간 지역을 질주하는 장면은 장관이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야심차게 등장한 두명의 본드걸, 나오미 해리스와 베레니스 말로에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퇴장한다는 점,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본드와 실바의 대결장면이 보다 긴장감있게 전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스카이폴>은 가장 ‘본드’답지 않은 감독과 촬영감독의 진두지휘하에 탄생한 진정한 새 시리즈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그들의 도전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건 007 시리즈의 50주년을 기념하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