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정재영] 여전히 기막힌 사내
2012-11-05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생애 첫 형사 역할, 정재영

정재영이 걸어왔다. 뒤축을 접어 신은 “슬리퍼 같은 운동화”는 곧 끈 떨어진 운동화가 될 판이었다. 신발 속엔 아디다스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흰 양말, 거기에 또 밤새 범인이라도 쫓다 온 것처럼 붉게 충혈된 눈. “아, 해장해야 하는데.” 배우 정재영의 소박함과 털털함이 영화 속 캐릭터와 접선하는 순간이었다. 잠시 <내가 살인범이다>의 최형구 형사가 걸어 들어온 줄 착각했다.

최형구는 “연쇄살인범을 잡아야 하는데 잡지 못한 형사”다. 이렇게만 설명하고 보면 최형구는 <살인의 추억> 속 형사들과 비슷하다. 부연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최형구는 머리가 좋은 형사다. 경찰대학 출신에 엘리트 형사다. 그런데 연쇄살인사건에 자신의 연인이 연루되고 끝내 살인범을 잡지 못하면서 승진도 못하고 계속 그 사건에 매몰돼 있다.” 공소시효가 끝난 상황에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이두석(박시후)이 등장한다. 자신의 범행기록을 담은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이두석은 졸지에 유명인사가 된다. 그런데 최형구는 이두석의 도발에 쉽게 말려들지 않는다. 최형구의 입에선 쉴새없이 욕설이 튀어나오지만 그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냉철해 보인다. “최형구의 행동에 의문점을 갖게 만드는” 정재영의 연기는 사실 계산된 것이다. 영화의 반전을 위해 정재영은 표현은 하되 들통나지 않는 연기를 해야 했다.

최형구의 의중을 쉽게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극 초반엔 정재영의 연기에 눈길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연기를 선보인다.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최형구 캐릭터에 말랑말랑한 느낌을 보탠 것도 배우 정재영의 솜씨다. “초기 시나리오엔 최형구가 정적이고 치밀한 인물로 묘사됐다. 유머러스하지도 않았다. 정병길 감독과 얘기를 나누면서 좀더 내추럴한, 깡패 같은 형사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인물이 좀 가벼워져야 관객도 덜 지루해할 것 같았다. 게다가 영화 속 상황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캐릭터는 리얼리티를 살릴 필요가 있었다.” 생애 첫 형사 역할이지만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직접 형사들을 만나진 않았다. “직업이 형사인 거지 특별한 게 없다. 전형이 없는 게 리얼리티다.”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쉽게 전형을 따르는 대신 공들여 리얼리티를 쌓는 연기를 해왔다.

비슷한 맥락에서 정재영은 액션 신은 배우에게 별로 남는 게 없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찍을 땐 더럽게 힘든데 막상 영화에선 슥슥 지나간다. 또 액션은 연기가 아니잖나. 액션장면 보고 ‘어우, 연기 잘했다’ 이런 말은 안 하니까.” 그럼에도 <내가 살인범이다>를 찍으며 정재영은 “벅찬 액션”을 참 많이도 소화해야 했다. 대형 어항에 내던져지는 것부터 골목을 질주하고, 질주하는 차를 들이받는 액션까지 그 어떤 것도 만만한 게 없었다. “사실 벅찼다. 옛날엔 아픈 줄도 모르고 했는데 이젠 생각만큼 몸이 안 움직인다. 정신력으로 하는 거다. 우리 영화에 꼭 필요한 요소니까.”

정재영은 “연기 말고는 하는 게 없는” 배우다. 그래서 부지런히 연기한다. 아니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생각으로 더 부지런히 연기할 생각이다. 김현석 감독의 <AM 11:00>은 몇 장면만 남겨두고 거의 촬영이 끝났다. 12월 중에는 이정호 감독의 <방황하는 칼날> 촬영에 들어간다. <AM 11:00>에선 타임머신을 만든 물리학 박사를, <방황하는 칼날>에선 하루아침에 딸을 잃은 아버지를 연기한다. “편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 “매 작품 에너지 소모의 경중은 없다”고 말하는 정재영은 <내가 살인범이다>를 찍으며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진지하고 재미있게”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길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 배우의 연기를 항상 신뢰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가을이면 생각나는 영화 <아는 여자>처럼 로맨스영화를 다시 찍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생각하는 상대 여배우는 누구입니까. _ 내이름은동춘이(미투데이)
=찍고 싶죠. 상대여배우는 특별히 생각해본 적 없어요. 나를 좋아하고, 나를 원한다면 누구나 환영입니다. 사실 <아는 여자>의 동치성 캐릭터는 못난 놈이에요. 말주변도 없고 무뚝뚝하고 바보 같고 눈치도 별로 없고 아주 평범한 인물인데 영화의 정서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정재영님 같은 남자를 얻을 수 있나요. _ 보호(미투데이)
=(웃음) 길거리에 널린 게 저 같은 남자인데…. 음, 그런 남자 얻고 싶으면 백팔배 하세요.

스타일리스트 신래영·의상협찬 zzena, 권오수클래식, CLOSED, TIME Homme, 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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