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한혜진] 잊지 말아주세요, 그 날을
2012-12-03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심미진 역의 한혜진

눈은 목표물에 고정하고, 가슴은 26년 전 그날의 울부짖음을 잊지 않는다. 목표물인 ‘그분’이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그의 검지는 그의 심장만큼이나 쿵쾅거렸을 것이다. 전두환(장광) 암살 계획의 완수에 방점을 찍는 <26년>의 고독한 저격수 ‘미진’(한혜진)의 심경이 딱 그랬을 것 같다.

심미진. 아름다울 미(美)자에, 나아갈 진(進)자. ‘아름다움이 씩씩하게 나아가리라’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준 예쁜 이름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름만큼 늘 아름답진 않았다. 태어난 해인 1980년 5월 광주, 어머니는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 또한 훗날 광주항쟁의 후유증으로 ‘그분’의 자택 앞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야 했다. 한혜진이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미진이 “잃을 게 없는 친구”라고 느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전작이 대체로 약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니 맡은 인물이 늘 가난했다. 사실, 솔직히 여배우가 이런 역할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냥 저격수가 아니라 아픔이 있는 저격수. 처참한 상황 속에서 부모님을 여의고, 너무나 고독하게 변한 이 캐릭터를 내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한혜진은 <26년>이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는지 잘 안다. 수많은 여배우가 이 프로젝트를 고사했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 역시 여배우인데, 영화에 대한 여러 외압설이 부담스럽진 않았을까. “전혀. 지금도 그렇지만 작품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다. 무슨 걱정이야? 내가 작품을 하는데. 영화의 배경은 불과 30여년 전의 일이고, 그때 일을 겪은 이들이 아직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 살아 계신다. 그 점에서 이 영화는 정치적인 의도에서 나온 영화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내가 출연했던 여느 사극드라마와 별다를 바 없었다.” 아름답게 살라고 태어난 세상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진은 언제나 총과 함께 지내왔다. 국가대표 사격선수라지만 가녀린 체구의 한혜진에게 총은 무겁고, 친숙한 도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놀랐다.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의외로 총이 몸에 쉽게 받아들여지더란다. “어쩌면 이 친구는 늘 혼자다 보니 세상을 향해 총으로 얘기하는 게 더 익숙한 게 아닐까 싶었다. 영화에서 미진이 가진 총의 의미를 굳이 부여한다면, 한발 한발 쏘는 총소리를 통해서 관객에게 ‘1980년대 5월 광주를 잊지 말아주세요’ 하고 일깨워주는 도구인 것 같다.” 총이 무거웠다면 한정에 5kg이 넘는다는 물리적인 무거움보다 역사를 세상에 알려야 하는 의무감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현장에서 늘 추리닝과 운동화 차림을 한 까닭에 몸은 다소 편했지만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 감정의 수위 조절이 유독 힘들었다고. 가볍지 않은 소재라 말 한마디 내뱉을 때도 편하지 않았으리라. “처음에는 드라이하게 대사를 했다. 원래 목소리가 저음이기도 하고. 그런데 감독님께서 ‘이야기 자체가 무거운데 미진까지 처져 있으면 전부 가라앉게 된다’며 대사 톤을 높이고, 말을 내뱉을 때도 툭, 툭, 툭, 툭 같은 식으로 리듬을 만들어달라고 하시더라. 무엇보다 속내를 너무 많이 보여줘서도, 그렇다고 너무 안 보여줘서도 안되는 인물이라 그 수위를 조절하는 게 힘들었다.”

<26년>의 홍보 활동이 이제 막 시작됐고, 지난 4개월을 함께 지낸 미진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됐다. 그러나 한혜진은 미진을 생각하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많이 아프다. ‘캐릭터에 푹 빠졌어요’ 같은 말이 아니라 그냥 미진만 생각하면 계속 아프다….” 모두가 기피하던 인물을 스스로 옳다고 선택했는데, 그게 어디 쉽게 잊혀지겠는가. 아름다움이 씩씩하게 나아가리라는 미진은 딱 한혜진을 두고 붙인 이름 같다.

스타일리스트 이애련·어시스트 권수정·의상협찬 제이에스티나, 아이쟉컬렉션, ck쥬얼리, 루까꾸뜨루, 알도, 페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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