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26년>을 읽은 건 언제였나.
=올해 초 연출을 맡으면서 처음 읽었다. 미술감독일 때의 버릇인데, 원작이나 참고할 만한 영화들은 일부러 보지 않는 편이다. 백지 상태로 시작하는 게 창의적인 작업물을 내놓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다.
-웹툰 <26년>을 읽은 소감은.
=연출을 맡고서 어려웠던 점이, 원작이 있는 데다가 이해영 감독이 쓴 초기 시나리오가 존재한다는 거였다. 그 두 가지와 다른 걸 만들어야 하니까. 제작비 문제도 있었고 준비할 시간도 길지 않아서 초기의 시나리오는 그대로 가져갈 수 없었다. 아무튼 원작에, 시나리오에 심취해서 장단점을 깊게 파악할 여유가 없었다. 원작, 초기 시나리오, 제작환경 이 세 가지를 고려하면서 서둘러 각각의 것을 해체해야 했다. 웹툰과 초기 시나리오에서 꼭 필요한 것들은 취하고 과감하게 버릴 것들은 버리는 과정이었는데, 굉장히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심정이었다.
-<26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없었다면 감독이 두번 바뀌는 동안 계속 미술감독으로 참여하고 또 연출까지 맡을 순 없었을 것 같다.
=처음엔 <26년>을 냉정하게 일로 대했다. 원작도 안 본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영화가 엎어졌을 땐 차갑게 돌아섰다. 스탭들은 여유있게 쉬면서 일을 할 수가 없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세월이 흘렀고, 올해 초 다시 <26년>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시간도 맞았고 2008년의 멤버들이 다시 모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2008년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배우나 스탭의 구성도 좋아서 다시 한번 그런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그런데 진행이 잘 안되더라. 그러면서 최용배 대표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됐다. 그런데 진짜 느닷없이 최 대표님이 연출 제의를 하셨다. 그럼 영화의 뿌리가 되는 원작을 봐야겠다, 원작을 보고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최용배 대표의 얘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사람들이 영화를) 많이 봐야 한다. 그러려면 재밌어야 한다.” 또 “이런 얘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문제인 거 아니냐, 그런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고 하시더라. 그 말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해야 한다 싶었다. 그리고 내가 정지영 감독님 정도 되면 이것저것 구애받지 않고 하고자 하는 얘기를 영화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 <26년>이 입소문이 나려면 ‘너무 슬프다’가 아니라 ‘진짜 재밌다’ 소리를 듣는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촉박한 제작일정 때문에 감독으로선 아쉬운 점도 많겠다.
=한편으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모든 스탭이 올인해야 하는 상황이 자연스레 만들어졌다. 하루에 찍어야 할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더 철저히 준비해야 했고, 준비하는 동안엔 계속해서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26년>이 이렇게 개봉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손길과 마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것 같다. 이건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닌데, 했던 순간이 참 많았다. 그 기운이 연말까지 쭉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