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미래지향적이고 모험적인 감독들과의 작업은 대단한 행운”
2012-12-25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사진 : 백종헌
<클라우드 아틀라스> 짐 스터지스, 배두나 인터뷰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혼란스럽지 않았나.
=짐 스터지스_시나리오가 200페이지가 넘었으니까, 보통의 두배 분량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처음 읽었으니 헤맬 수밖에 없었다. 자려고 누웠는데도 계속 생각이 나 잠이 안 오더라. 결국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다시 집어들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굉장한 게 숨겨져 있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배두나_내 상황은 더 심각했다. 감독님들 이름만 봐도 엄청난 작품일 것 같은데, 페이지마다 인물이 바뀌니까 짧은 영어 실력으로 이해가 잘 안됐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본으로 원작을 먼저 읽었고, 읽으면서 손미라는 캐릭터에게 완전히 매료당했다. 부끄럽지만, ‘이거 내가 잘할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디션 때도 책 속의 손미를 생각하며 연기했다. 사실은 13년 동안 한번도 오디션을 해본 적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조차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연기해본 경험은 어땠나.
=배두나_처음에는 정말 낯설었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 일본영화도 2편 찍은 적이 있으니까 괜찮을 줄 알고 겁없이 혼자 떠났는데,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 감독님, 배우들, 스탭들에게 많이 의지했다.
짐 스터지스_베를린에서 의상 테스트를 했는데 혼자 왔더라. 새로운 경험에 마음을 완전히 여는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1인3역 이상을 하며 6개의 이야기를 넘나들었다. 촬영 때 헷갈린 적은 없었나.
=배두나_예상보다 몰아 찍은 편인데, 틸다를 연기할 때 좀 헷갈리기도 했다. 손미에 완전히 몰입돼 있을 때여서, 배우로서 창피한 얘기지만 짐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애덤이 안 보이고 장혜주가 보였다. 감독님한테 틸다의 방으로 들어갈 열쇠가 필요하다고 말하니까 애덤과 틸다 사이의 역사를 쭉 다시 훑어주셨고, 그걸 들으니 다시 마음이 확 열리더라.
짐 스터지스_애덤 어윙 분량부터 먼저 몰아 찍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된 애덤처럼 나 역시 현장이 낯설고 외로운 처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1850년대로 시간여행에 빠져들었다. 그뒤부터는 미리 스크립트를 분해해서 여섯개의 단편으로 정리해뒀기 때문에 갑자기 촬영할 신이 바뀌어도 당황하지 않았다. 메이크업 시간이 길어서 그동안 캐릭터에 몰입할 시간도 넉넉했다.

-맡은 캐릭터들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배두나_어쩔 수 없이 손미한테 제일 애착이 간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어떻게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느냐고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다. 손미로 넉달을 사는 동안 아주 행복했다. 계약 때문에 캐스팅 사실을 비밀로 해야 했던 기간 동안 손미 역할로 발탁된 것을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뒤에 멕시코 여자로도 잠깐 나오는데, 손미를 연기하며 억눌렀던 감정들을 빵 터뜨릴 수 있게 해줘서 그녀 역시 내게 고마운 캐릭터다.
짐 스터지스_내 경우에는 아무래도 애덤에 먼저 감정이입이 됐다. 왜 내게 시나리오가 들어왔는지 알겠더라. 반면 한국 남자 장혜주에 빠져드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둘의 삶이 연결돼 있음을 이해하면서 연기하는 재미가 더 컸다.

-손미가 장혜주와 고층 건물 사이에 사다리를 설치해 도망가는 액션 신을 보는데 <괴물>에서 한강 다리 사이로 숨어다녔던 남주가 생각나더라. 이 영화의 중요한 테마인 윤회설과 관련해 이번 영화와 과거 자신이 참여했던 다른 영화들이 연결 돼 있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나.
=배두나_그 장면에서는 정말 그랬다. 그동안 내가 했던 영화들이 다 그냥 한 게 아니었구나 싶더라. 예전에 찍었던 영화들에 대한 기억이 여기서도 생각나고 저기서도 생각나고 그랬다. 이번 영화를 통해 대단히 새로운 걸 깨닫거나 믿게 된 건 없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고, 우연보다는 필연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일본영화 <공기인형> 때 비슷한 캐릭터를 맡은 적이 있다. 노조미를 연기했던 경험에서 끌어오거나 연장한 부분이 있나.
=배두나_노조미를 거치지 않았다면 좀더 우왕좌왕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연기는 자신을 얼마나 비울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결코 쉽지 않은 작업 같다. 노조미 때 그런 연습을 많이 했던 것이 도움이 됐고, 노조미의 모습을 손미를 연기할 때 실제로 많이 차용하기도 했다. 새로운 걸 해냈다고 말하면 좋겠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다.

-복제인간 캐릭터를 준비하며 리서치에는 얼마나 비중을 뒀나.
=배두나_노조미 때도 그랬지만 리서치를 한 적은 한번도 없다. 내가 기술을 가지고 연기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를 따라하는 순간 망가질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일부러 더 안 찾아봤다. 만화도 애니메이션보다 만화책을 좋아하는데, 만화책은 내 머릿속을 거치면서 상상되는 게 있잖나. 연기도 그런 식으로 하는 편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앞서 <업사이드 다운>도 SF로맨스다. 이런 장르를 연달아 선택하게 된 계기라면.
=짐 스터지스_<업사이드 다운>을 골랐을 땐 <웨이백>의 영향이 있었다. 오랫동안 사하라 사막에서 고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반대로 컬러풀한 동화 같은 SF로맨스를 찍어보고 싶더라. 하지만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그전에 어떤 영화를 했는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선택했을 영화다. 이토록 미래지향적이며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원 데이>도 개봉한 상태다. 역시 로맨스영화인데, 좋은 로맨스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짐 스터지스_진실된 관계가 아닐까. 에이, 아니다. 생각해보니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러브스토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하나가 <업사이드 다운>처럼 동화적인 러브스토리, 첫눈에 반한 남녀가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해가는 모습이 강조되는 영화들이라면, 다른 하나는 실제 사랑의 복잡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종류의 영화들이다. <원 데이>에서는 두 남녀가 관계의 변화를 경험하면서 끝내 실패와 마주하는 것이 대단히 사실적으로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3개월 동안 같이 호흡을 맞추며 서로에 대해 배우로서 가장 매력적으로 느낀 순간을 꼽는다면.
=배두나_그동안 정말 훌륭한 인성을 지닌 배우들과 많이 작업해봤지만, 짐은 그중 최고였다. 특히 스탭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게 아니라 말그대로 친구‘로’ 지낸다. 그런 모습이 보일 때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어떤 배우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곁에 있는 느낌이랄까.
짐 스터지스_두나의 연기에는 트릭이 없다. 스크린에도 나타나지만, 진심으로 손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눈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두나는 캐릭터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이 매우 강한, 보기 드문 배우다. 그녀의 태도에 나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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