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과 이수현. ‘개폼’도 예술이 된다는 걸 일러준 전설의 쌍웅. 한때나마 홍콩영화에 매혹됐던 사람이라면, <첩혈쌍웅>의 두 남자를 잊기 힘들 것이다. 아니 거의 잊혀졌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두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의 장동건 그리고 나카무라 도오루. 거대한 예산이 투입된, CG와 특수촬영이 중시되는 대작 액션영화에서 21세기판 쌍웅을 만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한·일의 근현대사가 뒤바뀐다 해도, 살기 위해 아니 조국을 위해 서로를 겨누면서도, 서로를 가슴으로 배신하지 않는 사카모토와 사이고. 장동건과 나카무라 도오루의 분신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저 사반세기전의 쌍웅들에게 경배를 바친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이들 두 배우는 연기에 대해, 영화에 대해, 인생에 대해 과연 얼마나 많은 생각을 공유했을까. 7개월의 긴 촬영 기간 동고동락한 두 주연배우에게 촬영장 안팎의 이야기를 청했다.
의 첫 번째 시사회가 있던 1월23일, 하루종일 인터뷰와 촬영 고문에 시달린 장동건과 나카무라 도오루가 늦은 밤 <씨네21>을 찾았다. 아침 일찍 일본에서 날아와 강행군한 탓에 촬영 짬짬이 토막잠을 자는 나카무라 도오루 앞에서, 장동건은 피곤한 내색도 못하고 분위기 띄우기에 바빴다. 과묵한(줄 알았던) 두 배우의 대담은 의외로 숨가쁘게 흘러갔다. 촬영장에서는 어색한 침묵을 즐겼다는 이들은, 늦게나마 서로에 대한 호감과 고마움을 표시하느라, 자정이 넘어선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나서 묻다
장동건 | 그나저나 <공공의 적>은 왜 이렇게 평이 잘 나온 거야? (나카무라 도오루에게 <씨네21>의 20자평 페이지를 열어 보여주며) 우리 라이벌 영화예요. (웃음)
나카무라 도오루(이하 나카무라) | 우리 영화 별점은 언제 실리죠? 영화평 나오면 그때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장동건 | 그러게요. 아무래도 인터뷰 타이밍이 그때가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웃음) 일본에도 이런 영화 전문지가 있나요?
나카무라 | 주간지는 없지만, 영화 전문지는 있어요.
장동건 | 거기서도 영화에 별점 매기나요?
나카무라 | 있긴 있는데, 영향력 있는 건 없어요.
장동건 | 이건 굉장히 영향력 있어요. (웃음)
나카무라 | 그럼 독자들이 여기 별이 적으면 영화를 안 보러 가고, 별이 많으면 영화를 보러 간다구요?
장동건 |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 그래요. 영화를 고르는 하나의 기준이 돼요. 지금은 한국영화가 성장했고 영화잡지도 많이 생겨났지만, <씨네21>은 한국영화의 위상이 지금 같지 않을 때부터 꿋꿋이 지켜봐 줬죠. 전 정기구독하고 있습니다. (웃음) 이렇게 해야 별이 많이 나와요. (웃음)
나카무라 | 일본에서도 정기구독할 수 있나요? 다음주에 우리 영화 별점 나오는 거 보고 별이 많으면 정기구독 해야겠어요. 나 같으면 우리 영화에 별넷 반 정도는 줄 것 같은데.
장동건 | 작품성을 따지기 전에 완성도면에서 보자면, 저도 별넷을 주고 싶어요. 홍콩 갔을 때 제작비 많이 든 영화가 뭔지를 물었더니, <동경공략>이라고 하더라구요. 우리 돈으로 70억원에서 80억원 정도? 그렇다면 와 비슷한 규모라, 비교하게 됐어요. 우리 영화가 절대 꿀릴 게 없다고 생각했죠. (웃음)
나카무라 | <동경공략>은 돈 많이 들인 건 맞는데…. (웃음)
장동건 | 영화를 비교하는 건 좀 그렇죠. 작품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마땅하지만, 완성도에 있어선 아무래도 비교가 돼요. 할리우드에선 100억, 200억원짜리 영화는 개봉도 못하고 비디오로 직행하는데, 그렇게 비교하자면, 우리 영화가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아쉬운 점도 많지만요. 일본영화 중에서는 제작비가 제일 많이 든 영화가 뭐죠? 저는 <화이트 아웃>이라고 알고 있는데.
나카무라 | (매니저에게 확인하려다가) 아, 매니저가 자고 있군요. (웃음) 일본에서는 투자 금액 자체를 제작비로 보진 않아요. 그래서 할리우드나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긴 힘들죠. 하지만 일본에선 같은 규모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힘들기 때문에 일본에서 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한 셈이지요. 그게 오늘 영화를 보고 만족감을 느꼈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영화 끝나고 동건씨를 보니까, 너무 냉정한 얼굴로 ‘어떻게 봤냐’고 묻는 거예요. 나도 그걸 묻고 싶었는데. 동건씨 얼굴 보니까 영화를 너무 냉정하게 비판적으로 본 것 같았어요. 정말 그랬어요?
장동건 | 표정 관리하느라고 그랬는데. (일동 폭소) 아쉬운 점들도 사실 많이 있었어요. 반면 기대보다 좋았던 부분도 많이 있었고. 나는 이 영화를 하면서 촬영 내내 같이 있었고, 촬영 끝나고도 늘 생각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 생각보다는 주변의 반응이 더 궁금했죠. 이 영화가 처음 제작될 당시에는 한-일간의 민족감정 같은 것들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는데, 시사 전후의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가 많이 거론됐기 때문에 도오루상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었던 것 같아요. 도오루상는 전혀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출연 결정을 했을 텐데 말이죠. 영화 끝나고 나서, 도오루상는 그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자분들이 민족감정 운운하지 않았더라면, 좀더 순수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조금 죄송스러웠어요. 조심스러웠죠.
나카무라 |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말로 ‘알겠습니다’) 나는 영화를 볼 때 내가 나온 부분에서 안 좋았던 연기를 찾아내면서 보는 편인데, 동건씨는 어떻게 영화를 보나요?
장동건 | 저도 그래요. 모든 배우가 마찬가지겠죠. 저도 처음 볼 때는 외모는 멋있게 나왔나, 연기는 어색하지 않은가, 그런 것들을 보죠. 하면서 꺼렸던 장면들, 맘에 들지 않았던 장면들 나올 때는 주의해서 보게 되고. 가편집 상태에서 봤을때, 부끄러웠던 장면에서 관객 반응이 어떤가 살피게 되고. 그런 장면, 아주 많았어요. (웃음)
촬영하면서 우리는 이랬다
장동건 | 저 같은 경우는 영화 제의를 받으면, 제작사의 여건이나 감독님, 상대 배우를 보게 되고, 신뢰감이 생기면 출연을 결정하죠. 도오루상는 낯선 나라에서 영화 출연 제의가 왔을 때, 그저 시나리오만을 보고 1년 가까이 투자할 영화라고 판단하진 않았을 텐데, 어떤 이유로 출연을 결정했나요.
나카무라 | 외국 사람들과 일한다는 것,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환경에서 일한다는 것이 가장 흥미로웠어요. 만에 하나, 흥행이 잘 안 돼도 다른 데서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 좋은 재산이 될 거라는 생각으로 결심을 굳히게 됐죠. 반년 이상 모르는 외국 사람들과 일한다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느꼈고, 그것이 시나리오나 캐릭터에 대해 느낀 매력만큼이나 컸어요. 일본에서도 영화 한편을 이렇게 길게 찍은 적이 없는데, 반년 이상 촬영하면서, 언어의 벽 그리고 수많은 벽에 부딪히면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아까 시사회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한국에 다시 오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럽더라고요. 긴장돼서. 지금은 다시 오고 싶어졌지만. (웃음)
장동건 | 촬영하면서는 뭐가 제일 힘들었나요.
나카무라 | 가장 크게 힘들었던 건 일하는 시간대의 차이가 컸다는 거죠. 일본에선 아침에서 오후까지 일하는데, 한국에선 오후부터 새벽까지 일하는 거예요. 이제까지 15년 동안 일해 오던 시간대와 완전히 달라서, 몸이 많이 힘들었어요. 그 이외에 크게 힘들었던 건 없어요. 아,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다. 총 쏘는 신을 찍을 때 그 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동건씨한테 귀마개 안 하냐고 물었잖아요. 동건씨가 안 한다고 그래서, 한국에선 이게 그렇게 큰소리가 아닌가 보다, 그러면서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죠. 그런데 동건씨도 나중에는 귀마개 썼다면서요.
장동건 | 도오루상 얘기에 힌트를 얻어서요. (웃음) 아, 귀마개를 하면 되겠구나, 그래서 하게 됐죠.
나카무라 |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웃음) 한국 현장은 찍기 전의 준비가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사소한 차이 때문에 한때는 힘들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부분들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장동건 | 저는 이번 영화가 여태까지 출연한 작품 중에 몸을 가장 많이 사용한 영화일 거예요. 사실 그건 별로 힘들게 느껴지진 않았어요. 일본어 대사가 힘들었죠. 단순히 모르는 말을 연기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더 깊게 들어가면, 일본어 대사를 아무리 완벽하게 암기하고 대사하더라도, 머릿속에서는 한국말이 맴도는 거예요. 100% 감정을 전달할 수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본어 연기가 끝나면 계속 그 찜찜함이 쌓였어요. 또 <친구>가 소개된 다음의 작품이라서, 부담이 컸죠. <친구> 연기로 칭찬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는 연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비주얼 강한 영화를 찍는 부담이 있었어요. 뭐, 촬영하기 전에 했던 걱정이지만. 그러다 보니까, 사카모토라는 인물의 표현방법이 전형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됐고. 인물의 상황이나 갈등에 대해서 감독님과도 얘기를 많이 했죠. 그러다 내린 결론이 이거예요. 이 영화가 블록버스터고, 볼거리 위주의 영화라면, 표현하는 방법이 전형적이어도, 비주얼과 맞물려서 영화 느낌이 전달되기만 한다면, 나쁘지 않겠다. 그러던 도중에 <친구>가 개봉해서, 제가 선택한 것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죠. 연기하는 데 있어서는 그런 점들이 힘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