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두려워해야 돌진할 수 있다
2013-03-19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인터뷰

스티븐 스필버그에 대해 좀 안다고 자부했던 관객도 <링컨> 앞에서는 당혹감부터 느낄 수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잔혹 동화 <워 호스>의 연장선상에서 미국 신화의 한 조각을 베어낸 이 영화에는, 마치 링컨의 그것과 같은 노감독의 고집이 배어 있다. 링컨이 일궈낸 승리는 필히 남북전쟁에서 75만 병사가 흘린 피로 얼룩지고, 타협에 능했던 그의 온건한 메시지도 극히 비타협적인 영화적 만듦새로 수송된다. 이는 이제까지 그의 영화를 맘 편히 즐겨왔던 관객에게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연유가 궁금해서 인터뷰를 모아봤다. 그는 왜 14년이나 <링컨>에 매달렸고, 왜 전과 다른 방식으로 <링컨>을 완성했는가. 명쾌한 답변은 요원해 보이나, 그 빈 괄호가 더 중요한 단서일 수도 있겠다.

-언제 처음 링컨에 사로잡혔나.
=5, 6살 즈음 삼촌을 따라 링컨 기념관에 갔었다. 한참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한 거대한 남자가 나타났다. 너무 무서워서 자리를 뜨려다 마지막 순간에 겨우 용기를 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는데,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완전히 매혹됐다. 그 뒤로 그는 미국사의 풍경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됐다.

-이제까지 당신이 만든 영화 중 <링컨>이 가장 오래 걸린 작품일 듯하다.
=그렇다. 도리스 컨스 굿윈이 막 쓰기 시작한 <권력의 조건>의 판권을 산 게 1999년이었으니까. 그 책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던 중 다른 각본가와 남북전쟁을 중심으로 한 시나리오를 작업했는데,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했다. 나중 보니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가 아니더라. 내가 원한 건 링컨의 사유 과정 속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토니 커시너의 각본에서 현재 <링컨>의 싹을 발견한 순간에 대해 듣고 싶다.
=처음에는 링컨의 임기 전체를 다루려고 했다. 토니가 초고를 보냈는데 550페이지쯤 됐다(실제로 토니 커시너에게는 스필버그에 게 보내지 않은 300페이지가 더 있었다고 한다.-편집자). <HBO> 미니시리즈라면 모를까, 영화로 만들기는 어렵겠더라. (웃음) 근데 읽다보니 그 전체가 링컨이 헌법 13조 수정안을 통과시키기까지 42일간의 투쟁을 다룬 70페이지의 확장판임을 깨달았다. 일생에서 가장 복잡한 싸움에 얽매인 그를 보여줌으로써 그가 얼마나 복잡한 인간이었는지 드러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링컨에 관해 알아가면서 어떤 점에 가장 놀랐나.
=그는 연방이 두 갈래로 찢어지는 걸 지켜본 유일한 대통령이다. 거기다 노예제와 전쟁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75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북전쟁이 계속되었고,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신경쇠약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초임 기간 중 한번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너진 적이 없었다. 그 모든 역경을 거치면서도 그가 도덕성과 침착함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링컨의 인생 중 어느 부분을 이 영화에 꼭 포함시키고 싶었나.
=셋째 아들 윌리의 죽음이었다.

-꼭 넣으려 했던 장면이라면.
=그가 선택하기 위해 말을 멈추는 순간들이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링컨이 마치 유령처럼 백악관의 긴 복도를 떠돌며 생각에 빠져 있는 이미지들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배우들을 모두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다고. 메소드 방법론에 입각한 설정처럼 느껴진다.
=현장에 항상 슈트를 입고 가기도 했다. 19세기 분위기를 가능한 한 실제와 가깝게 재현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카메라와 모니터와 스탭들이 방해가 되는데, 그외에는 어떤 인위적인 설정도 피하고 싶었다.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스스로 세월의 시험을 견딜 만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느껴야 했다.

-배우들의 자연스런 욕구를 조절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나.
=즉흥 연기는 없었다. 왜냐하면 21세기 배우가 19세기적 표현을 자신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해서 자연스럽게 내뱉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본을 엄격히 따랐다. 한줄이라도 각본을 벗어났다가는 15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토니에게서 쪽지가 날아왔다. 그때마다 “오, 주여” 소리가 절로 나 왔다. (웃음) 하지만 도리스가 10년 걸려 쓴 책을 바탕으로 토니가 6~7년 걸려 쓴 각본인 만큼 그 시대의 언어를 존중해야 했다.

-이 영화의 문학적 밀도가 영화 관객에게는 과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분명히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점이 두렵기도 했다. 이번처럼 각본이나 배우의 연기에 성패가 좌우되는 영화는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가능한 한 150년 전의 언어로 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이해시키겠다고 결심했고, 최선을 다했다. 어쩌면 관객이 그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를 두번은 봐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어드벤처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다. 핵심은 그러지 않아도 이 영화를 아주 미시적인 차원에서 이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초반 15분 동안 중심 갈등을 이해하지 못해도 경청하다보면, 자리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여 대사를 듣는 데 집중하다보면, 여러 차원의 디테일을 통해 영화를 따라갈 수 있다. 토미 리 존스, 샐리 필드, 대니얼 데이 루이스 같은 배우들은 이 영화를 경청하기 굉장히 쉽게 해준다. 관객은 그들의 대사를 영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같이 작업해온 편집기사 마이클 칸과의 작업은 어땠나.
=디지털 편집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은 애초에 필름이 없는 영화였고, <워 호스>는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과 동시에 작업해야 했기 때문 에 부득이하게 디지털로 편집한 경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링컨>은 내가 만든 영화 중 배우의 연기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은 영화였기 때문에 디지털 편집을 택했다. 여러 테이크를 나란히 놓고 보면서 테이크간의 차이를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완성된 영화에서 한 장면만 고른다면.
=아, 어려운 질문이다. 이제까지 내가 만들어온 영화는 말보다 이미지가 우선이었지만, 이 영화는 이미지보다 신념과 언어와 캐릭터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이야기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보통의 나는 카메라를 이야기보다 앞세워왔고, 그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지 않았고, 그런 맥락에서 링컨이 모자에서 메모를 꺼내는 장면을 고르겠다. 왜냐하면 그 모자 속에는 이 영화가 감히 보여주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끝낼 지점은 어떻게 정했나.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결국 링컨이 말을 타고 피터스버그 외곽의 전장을 돌아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에필로그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링컨이 그러기도 했고.

-암살범 존 윌키스 부스나 그전의 다른 암살 시도에 관한 묘사를 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그건 아주 쉬운 선택이었다. 암살장면을 넣었더라면 그것이야말로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섹스나 폭력의 전시를 통해 관객에게 호소하는 영화.-편집자)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를 다룰 때 그것은 매우 경계해야 할 단어다. 그건 영화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다.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때문에 평소보다 비판적인 평가를 받을까봐 걱정하지는 않았나.
=나는 항상 최악을 상상한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때가 오히려 놀랍다. (웃음) <링컨>에 대해서도, 영화에서 전쟁부 장관 스탠튼이 포트 피셔에 분당 100발의 폭격을 퍼붓는 것과 비슷한 반응을 예상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링컨과 남북전쟁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훌륭한 학자와 역사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창작에 유용하다고 보나.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그렇게 SF를 많이 만들겠나. (웃음) 물론이다. 두려움이 클수록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을 향해 돌진해 그것의 정체를 알고 싶어진다. 거기엔 어떤 힘이 있다. 그걸 파헤치고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누구인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주)이십세기 폭스코리아에서 제공한 프로덕션 노트, <링컨> 공식 홈페이지(http://thelincolnmovie.com)에 링크된 인터뷰 및 포럼 녹화 영상, <뉴욕타임스> <데드라인> <콜라이더>를 토대로 발췌, 편집한 인터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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