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2일 금요일 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0여명 남짓한 스탭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일산서구 소재 어느 조각가의 작업실 겸 거처에도 스산한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정적 속에 영화감독 동원(최덕문)이 크리스마스 선물 겸 신혼 집들이 선물을 사들고 미술감독 정수(박혁권)네를 찾았다. 두 남자는 곧 정수가 수일 밤을 지새우며 만든 여중생 시체(류혜린)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좀처럼 교차하는 법이 없었다.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이라도 된 듯 초조한 정수, 백열전구 아래 묘한 화색을 발하는 시체, 진짜 같은 시체에 흠칫하는 동원, 순둥이 남편의 뒤통수를 답답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선 정수의 아내 영선(신동미)까지. “오늘 오후에 처음 모였고 리허설도 처음 했다”는 네 배우 사이에는 벌써 끈끈한 호의가 감돌았다. 그들끼리 ‘살아 있는 시체의 밤’이라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기미를 감지한 박진성 감독은 모니터 뒤에서 “뭔가 함께 비밀 제의를 치르는 사람들 같아서 아주 마음에 듭니다”라며 명쾌하게 “오케이”를 불렀다.
‘숏!숏!숏! 2013 소설, 영화와 만나다!’ 중 <THE BODY>는 <기담> <마녀의 관>으로 이름을 알린 박진성, 박진석 형제의 첫 공동 연출작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서스펜스 애호가 형제가 김영하의 10쪽 남짓한 단편 <마지막 손님>에서 모셔온 가장 귀중한 손님은 ‘시체’다. “화면 보면 사람이 시체한테 밀린다. 뭘 해도 안된다”라며 웃는 배우 최덕문의 농담 섞인 말대로다. 시체 역의 류혜린에 대한 그와 다른 배우들의 마음 씀씀이도 남달랐다. “현장에서 만난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을 모델로 연기 중”이라는 그들은 자신들의 모델과 별반 차이 없이 종일 찬 바닥에 누워 있어야 하는 그녀에게 틈만 나면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걱정하는 그런 순간들이 두 감독에게는 “더없이 중요했다”. 그들이 소설로부터 “강하게 전달받은 주제”,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애잔한 마음”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배우가 진짜 시체 같은 모형 시체를 힘들게 연기해야 했던 이유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영화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 만들기에 몰두한 박 형제의 이 자기 반영적 스릴러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체온이 묻어 있다.
한편 배우들간의 호흡을 어떤 질감으로 옮겨 담을 것인가는 박홍렬 촬영감독의 몫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성격 좋은 그는 화각이 넓어 공간과 인물을 함께 담기 좋은 에픽 5K 카메라를 잡은 채 연방 “편하게 하시면 제가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완성되어가는 그림은 사뭇 연극적이었다. 이 실내 촬영분이 “시체가 실제로 출연하는 영화를 담은 야외 촬영분과 대비를 이룰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흑백 촬영은 두 감독의 요청이었는데, 이유는 흥미롭게도 두 감독도 달랐고 두 감독의 의도에 대한 촬영감독의 짐작도 달랐다. 하지만 남다른 온기를 지녀야 할 시체에 관한 한 흑백 촬영의 미적 필요성과 효과에 대한 공감대는 분명했다. 그쯤 되니 촬영현장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두 형제가 원작을 구조와 정서를 어디까지 밀고 나갔을지 더 궁금해졌다. 그 물음표를 중요한 서스펜스로 남겨둔 채, <THE BODY>의 촬영은 역시 열심히 사는 감독과 배우와 스탭들의 은밀한 공모 아래 새벽까지 이어졌다. 영화 속 인물들의 앞날에 말간 해가 떠오르길 바라면서….
“소중한 마음이 중요하다”
<THE BODY>의 박진성, 박진석 감독 인터뷰
-왜 <마지막 손님>이었나.
=박진석_추리물에 가깝게 각색할 수 있는 걸 골랐다. 시체도 나오고….
-역할 분담은 어떻게 했나.
=박진석_형이 현장에서 배우 연출이나 사람들 다루는 일을 도맡고, 나는 기계와 더 친한 편이라 촬영감독과 기술적인 부분을 주로 논의한다.
-캐스팅 기준은 뭐였나.
=박진성_스틸 카메라맨 하면서 곁에서 봤는데, 모두 성격 좋으시고 부드럽게 연기하는 분들이다. 이번에 함께 고생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린다. 모두 마땅히 받아야 할 예술가로서의 존중을 받았으면 좋겠다.
-장르에 끌리는 이유는.
=박진성_잘 만든 장르물이 매우 아름다울 때가 있다. 잔혹할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것들에는 퇴폐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만들기에 관한 영화’의 구조에 어떤 매력을 느끼나.
=박진성_주위에 영화하는 사람들밖에 없어서 그런지 그게 내게는 일상이고 재미다.
-흑백 촬영을 선택한 이유라면.
=박진석_초안 쓸 때 아무래도 흉측한 시체를 컬러로 상상하기가 힘들었나보다. 근데 의견 교환하는 와중에 형도, 당시 촬영감독님도 흑백이라고 생각했더라. 박진성 사진을 전공해서인지 바닷가에 눈 내리는 첫 장면을 흑백으로 촬영하면 톤이 풍부하고 아름다울 거 같더라.
-소설에 비해 영화가 더 따뜻할 것 같다.
=박진성_우리가 대책없이 감상적인 데가 있다. 무례하게 보이던 남자 감독에게도 그런 구석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보여주는 게 우리에게 힘을 준다. 어떤 근사하고 어려운 말도 ‘이 사람들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마음에 못 이긴다고 생각한다. 영화에는 그런 게 중요한 것 같다.
-소설 속 부부는 반지하방 같은 곳에 사는 것 같은데, 촬영 장소로는 한쪽 벽면 전체가 유리인 밝은 곳을 골랐다.
=박진석_이들 부부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