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유니버스를 대표하는 영웅이 돌아왔다. 6월13일 개봉한 잭 스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과 DC의 슈퍼히어로들이 총출동할 <저스티스 리그>(2015)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그 책임감이 막중한 작품이다. 새로운 <슈퍼맨> 프랜차이즈의 문을 열어젖힌 이 영화의 실체를 공개한다. 더불어 <맨 오브 스틸> 이후 개봉을 기대해볼 만한 DC 코믹스 원작의 영화화 프로젝트도 함께 소개한다.
<맨 오브 스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DC의 세계에 잠시 몸담았던 한 불운한 남자의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그의 이름은 조스 웨던. <어벤져스>로 마블의 영웅들을 성공적으로 대동단결시켰던 그 남자다. 웨던은 2005년 DC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원더우먼>의 시나리오작가로 고용되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7년, 한통의 전화도 받지 못한 채 그는 워너에서 해고당했다. 이후 오랫동안 조스 웨던은 <원더우먼>의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질문을 기자들에게 받아야 했는데, 그가 밝힌 DC 코믹스 원작 영화의 애로사항은 다음과 같다. “<원더우먼>은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단순한 기교로만 만들 수 없는 작품이더라. (중략) 슈퍼맨, 원더우먼, 그린랜턴은 인간과는 너무 동떨어진 존재이고 그들의 힘은 특징이 없기 때문에 열배는 더 힘들게 작업해야 한다. (마블을 예로 들면) 캡틴 아메리카보다 토르의 전투장면을 쓰는 게 더 힘들다. 그건 토르가 훨씬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DC의 캐릭터들은 마블의 영웅들보다 다루기가 까다롭다. 결함 많은 인간이 영웅으로 변모하는 마블 세계에선 스파이더맨이 거미 가면을 쓰고 계란 심부름을 하거나 아이언맨이 스티브 잡스처럼 최신 IT제품을 소개하는 모습이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제작진이 원작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여지가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신적인 슈퍼파워를 지녔고 진지한 이상과 고민을 안고 있는, 보다 고전적인 영웅상에 가까운 DC의 슈퍼히어로들을 21세기 관객이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슈퍼히어로들 가운데서도 마치 영웅의 교본처럼 옳고 좋은 미덕만 두루 지닌 슈퍼맨은 시리즈의 리부트를 원하는 제작진에게 큰 고민을 안겨줄 만하다. 너무 완벽한 존재이기에 잘못 메스를 들이대면 오리지널 세계의 균형이 깨져버리거나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진지하나 어둡지 않은
이 딜레마에 대한 <맨 오브 스틸> 제작진의 해법은 영웅의 본질을 오히려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 공중전화부스에서 허겁지겁 쫄쫄이 복장으로 갈아입거나, 연인의 변심에 마음 아파하는 슈퍼맨의 인간적인 모습은 그의 초월적인 면모를 훼손시킬 거라고 제작진은 생각했던 듯하다. 리처드 도너가 <슈퍼맨> 시리즈에 담았던 소소한 유머나 브라이언 싱어가 <수퍼맨 리턴즈>를 통해 보여준 애잔함과 로맨틱한 정서를 배제한 <맨 오브 스틸>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외계의 유전자를 지닌 자신의 혈통과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지구에서의 삶이 상충되며 클라크 켄트/칼엘(헨리 카빌)의 머릿속은 이미 충분히 복잡해 인간 여자친구를 찾아 주변으로 눈돌릴 여유가 없다. 게다가 외부에서는 자신과 같은 크립톤 행성 출신의 강력한 적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이 나타나 크립톤 행성의 유전자 정보가 담긴 코덱스를 내놓지 않으면 지구를 멸망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은 두 가지 거대한 전쟁을 벌여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내면의 전쟁이 하나이고, 그를 길러낸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크립톤의 멸망 뒤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족들과 벌여야 하는 불가피한 전투가 다른 하나이다.
<맨 오브 스틸>의 각본을 맡은 데이비드 S. 고이어는 이 영화가 “선택에 대한 고찰”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확실히 이전의 <슈퍼맨> 영화들이 소홀히 다뤘던 문제다. <슈퍼맨2>에서 슈퍼맨은 사랑하는 여자 로이스 레인과 행복하기 위해 크립토니안으로서의 능력을 포기한 적이 있지만, 조드 일당이 미국을 위협하자 아버지와의 연결고리를 끊으면서까지 자신의 슈퍼파워를 되살려 미국인들을 구해냈다. 그러나 <맨 오브 스틸>의 클라크 켄트/칼엘은 북극에 감춰진 크립톤 비행선에서 정체성을 자각하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를 머뭇거린다. 아직 세상이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초인적인 힘을 숨겨야 한다는 지구인 아버지 조너선 켄트(케빈 코스트너)의 가르침 때문이다. 반면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 조엘(러셀 크로)은 크립토니안의 능력에 지구인의 미덕인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배운 너야말로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다며 아들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이처럼 슈퍼맨의 “존재의 그림자”인 두 아버지의 다른 노선은 <맨 오브 스틸>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 즉, 클라크 켄트/칼엘은 왜 슈퍼맨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더 깊이있게 만들어준다.
이러한 선택의 테마에 있어서 <맨 오브 스틸>의 프로듀서 크리스토퍼 놀란과 각본가 데이비드 S. 고이어의 영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인물로 성장하고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놀란과 고이어의 합작인 <배트맨> 3부작의 모든 작품에 흐르고 있는 거대한 주제였다. 배트맨이 선과 악의 경계를 위태롭게 가로지르는 고뇌 끝에 결국 조커처럼 파괴적인 악당이 되지 않고 도시의 구원자가 되는 길을 택한다면,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의 고민은 두명의 아버지가 제시한 두 가지 유형의 선 중 어떤 쪽이 더 나은 선일지를 선택하는 과정에 머물러 있다. 자신의 다름을 부정하고 지구라는 세계에 불협화음 없이 섞여드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아니면 혼란과 놀라움을 야기하더라도 지구의 미래를 사수하기 위해 자신의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 배트맨 프랜차이즈를 성공적으로 리부트시킨 고이어의 아이디어와 그런 그의 생각을 영화화로 밀어붙인 프로듀서 놀란의 추진력은 슈퍼맨의 기원을 다시금 탐구하려 하는 이 영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하지만 <맨 오브 스틸>의 감독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아니라 잭 스나이더라는 점이 중요하다. <배트맨> 3부작에 기여한 제작진의 DNA를 이어받았으나 잭 스나이더의 비전을 통해 완성된 <맨 오브 스틸>은 정교하게 직조된 우아한 블록버스터이기보다 21세기 할리우드의 최신 테크놀로지를 장착한 폭주기관차 같은 영화다. <가디언의 전설> <써커펀치> 같은 영화를 통해 스토리텔링의 헐거움을 지적받아왔던 스나이더의 약점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현재 시점의 클라크 켄트를 비추며 그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특정 시점의 기억을 보여주는 플래시백 형식은 촘촘한 이야기 구성의 부재로 인해 별다른 정서를 길어올리지 못한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대목은 자아를 찾아 오랜 시간 지구의 이곳저곳을 방랑하던 클라크 켄트가 난파된 크립톤 비행선에서 아버지 조엘에게 출생의 비밀을 들은 뒤 망설임없이 비행선 밖으로 나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이다. 두 아버지의 다른 노선 사이에서 혼란을 겪다가 결국 자아를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 <맨 오브 스틸> 속 슈퍼맨의 여정이라면, 그 변화의 순간을 섬세하게 담아내지 않은 스나이더의 ‘선택’은 여전히 슈퍼맨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초고속 액션과 극강 비주얼 그러나
비주얼리스트로 평가받아온 잭 스나이더의 장기는 역시 슈퍼맨과 조드 일당이 벌이는 후반부의 전투 신에서 발휘된다. <어벤져스>의 전투로 인해 황폐화된 뉴욕은 <맨 오브 스틸>의 메트로폴리스 전투장면에 비하면 엄살로 느껴질 정도다. 건물과 사람이 토네이도에 휩쓸린 가로수처럼 튕겨나가고, 도시의 모든 것들은 가루처럼 으스러진다. 이 아비규환을 담아내는 잭 스나이더의 미학적 선택은 핸드헬드 촬영이다. 그는 관객이 초월적인 존재들의 슈퍼파워를 체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핸드헬드 촬영이 이 영화에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한다. 대규모 CG 물량공세와 더불어 <300>의 전투 신을 연상케 하는 역동적인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흔들리는 화면에 담다 보니 3D 아이맥스로 상영되는 <맨 오브 스틸>은 자주 현기증을 유발한다. 마치 인간 미사일처럼 폭발적인 스피드로 하늘을 활강하는 슈퍼맨의 비행장면 또한 이전의 <슈퍼맨> 영화에서 느껴볼 수 없었던 시각적인 쾌감을 준다. 이러한 액션장면을 통해 잭 스나이더가 얻어낸 성취가 있다면 그건 21세기 슈퍼히어로영화가 필연적으로 담아내야 하는 영웅의 위력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묘사해봤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영웅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을 충분히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뒤따르는 액션은 다소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맨 오브 스틸>은 절반의 성취와 절반의 한계를 체감하게 한다.
<맨 오브 스틸>의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는 영화의 개봉에 앞서 이미 <슈퍼맨> 프랜차이즈의 두 번째 영화를 계획 중이라고 발표했으며, 잭 스나이더와 데이비드 S. 고이어의 속편 합류를 확정지었다. 2015년 개봉예정인 <저스티스 리그>를 통해 자사의 영웅들을 대통합할 DC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맨 오브 스틸>의 제작으로 비로소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그러나 잭 스나이더가 열어젖힌 이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해 보인다. 다시금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속편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싶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