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머스 앤더슨이 5년 만에 <마스터>로 돌아왔다. 그가 내놓은 ‘실물보다 큰’ 마음의 지도를 따라 헤매다, 그가 어떻게 1940∼50년대 미국을 복원해냈는지, 복원 과정에서 중요한 힌트로 삼은 것은 무엇인지, 그 모든 노력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할 이들을 위해 한 인터뷰를 여기에 옮긴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 2012년 12월호에 실렸던 인터뷰다.
-<마스터>를 시작할 때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 영화의 발단이 된 최초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는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을 무렵, 내가 정말 만들어보고 싶었던 건 자크 투르뇌르의 거친 영화들처럼 긴장감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저속해 보이는 B무비였다. 복고풍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충동이 일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런 부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출발점이었던 건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프레디 퀠(와킨 피닉스)같이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며 사회에 다시금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당시 정신분석학이나 그와 관련된 이론들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미국 정부는 1946년에 ‘정신보건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개념들이 서민층에까지 흘러든 결과, 사이언톨로지 같은 단체가 생겨났다고 보나.
=‘다이어네틱스’(사이언톨로지의 창시자 엘 론 허버드가 주창한 심리요법-편집자)가 당시 생겨난 유일한 이론이 아닌 건 확실하다. 특히 미국에서는 동시에 아주 많은 이념과 단체가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를 포장하는 방식이나 사용하는 용어가 달랐을 뿐이다. 한 단체가 한 장소에서 유독 강력해지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당시에 다이어네틱스와 사이언톨로지는 영국에서도 장악력을 키워갔다. 하지만 동시에, 내 아버지처럼, 전쟁에서 막 돌아왔지만 그런 것을 단 2초도 견딜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강인하고 거칠었다. 과거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는 건 여자들의 수다쯤으로나 여겼다.
<빛이 있으라>가 미친 영향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의 신경증 치료 과정을 담은 존 휴스턴 감독의 다큐멘터리 <빛이 있으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어떤 부분인가.
=대단한 작품이다. 수년 전에 봤는데도 내 기억 속에 깊숙이 제대로 박혀 있다. 난 절박한 마음으로 재향군인회병원 장면들을 수정 중이었다. 내가 쓴 건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빛이 있으라>의 장면이나 대화들을 대거 차용했다. 그 작품에는 그 시대 다른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성과 혼란스러움이 있었다. 국방부는 전쟁에 들인 수고를 기록하기 위해 많은 감독을 고용했지만 완성된 영화들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함구했는데(1980년까지 대중에 공개하지 않았다), 영화를 보면 그 이유가 이해가 간다.
-그런 맥락에서 프레디와 랭카스터 도드(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어느 정도로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캐릭터인가. 엘 론 허버드의 인생이 랭카스터라는 캐릭터의 발단인가.
=프레디는 매우 충동적인 집필 과정의 산물이다. 그는 사실 우리가 하고 싶어도 참는 것들을 마음가는 대로 다 해버리는 인물이다. 프레디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 난 그저 “그가 술을 마지막으로 마신 게 언제지?”, “그의 숙취는 어느 정도지?” 정도만 생각하면 됐다. 반면 랭카스터는 복합적이었다. 엘 론 허버드도 있었지만 ‘실물보다 큰’ 느낌의 전설적인 인물 오슨 웰스 역시 참고했다. 모든 것을 탐하고, 시동이 켜질 때는 아주 빠른 속도로 켜지는 반면 아닐 때는 아예 꺼져 있는 사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와킨 피닉스와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을 염두에 두고 프레디와 랭카스터를 그려냈나.
필립은 그랬다. 와킨은 계속 생각이 났지만, 워낙 오랜 기간 만든 캐릭터라 와킨이 들어오기 전부터 피와 살을 지닌 한명의 인물이 완성돼 있었다. 예전에도 여러 번 그를 캐스팅하려다 실패했는데, 이번에는 그를 설득하는 데 별로 힘들지 않았다.
-프레디라는 캐릭터를 발전시키기 위해 와킨 피닉스에게 라이오넬 로고신의 1955년 다큐멘터리 <바워리가에서>를 보여줬다던데. (바워리가는 뉴욕에 싸구려 술집이 모여 있는 도로로 일용직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편집자)
=맞다. 그 역시 훌륭한 영화다. 술꾼들이 나오는 영화는 많지만, 그 영화는 뭔가 다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슬픔에서 절망으로 변화한다. 육체적인 묘사도 뛰어나다. 그들의 몸에는 지방이 거의 붙어 있지 않다. 실제 나이는 30대일 텐데 겉보기엔 50이나 60대처럼 보인다. 파괴적인 행동을 일삼는 인물을 구축하는 과정에도 도움이 됐다. 공포영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열지 말아야 할 문을 꼭 열게 되지 않나. 마찬가지로 저들이 결코 술을 끊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중 누군가 한명이 술을 끊으면 막연한 기대로 인해 긴장이 생긴다. 물론 그들은 계속 술병을 향해 손을 뻗지. 보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아플 수 없다.
65mm만의 힘
-배후의 실질적 브레인인 페기 도드 역의 에이미 애덤스도 이 영화의 발견이다. 그녀의 캐릭터도 메리 수 허버드(엘 론 허버드의 셋째 부인)를 바탕으로 했나.
=솔직히 페기는 메리 수 허버드와 많이 다르다. 물론 그녀도 메리 수 허버드처럼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는 한다. 그 정도 느낌만 가져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때가 오기 전까지 권력을 가진 남자 뒤에서 때로는 병풍처럼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충실한 오른팔 역할도 하면서 권력을 발휘하는 여자. 에이미에겐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마치 엑스트라처럼 필립의 뒤를 따라다녀야 했으니까. 하지만 페기는 천천히 빛을 발하며 그 모든 노력을 충분히 보상할 만한 캐릭터다.
-배우들에게 즉흥적인 연기를 권했나.
=조금은. 거의 즉흥 연기인 부분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시나리오에 있었다.
-배에서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처음으로 ‘프로세싱’ 질문들을 던지며 그에게 눈을 감지 말고 대답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어땠나.
=즉흥 연기가 여기저기 조금씩 들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시나리오에 있었던 거다. 내가 쓴 건 프레디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였고, 그다음 랭카스터가 프레디에게 느끼는 감정, 보이는 것들, 기억, 냄새 같은 것을 묘사해보라고 하는 부분은 필름이 다 될 때까지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거다. 하지만 문답을 주고받는 건 이미 시나리오에 있었다.
-데이비드 린치나 테렌스 맬릭과 자주 작업하고 당신의 전작 <데어 윌 비 블러드>에도 참여했던 프로덕션 디자이너 잭 피스크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췄다. 노골적인 지표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포착했다.
=누구나 가구를 사올 수는 있다. 좋은 스탭들과 일한다면 당시의 컬러 사진들을 참고해 적당한 벽지도 구해올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잭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걸 찾아낸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그가 대니얼(데이 루이스)이 은광으로 내려갈 때 탈 사다리를 만들었던 게 기억난다. 1년 동안 편집하면서 보니 그제야 그가 사다리의 닳은 정도를 얼마나 정교하게 표현해놨는지 보이더라. 손과 발이 닿은 곳에 따라 올라갈 때 닳는 곳과 내려갈 때 닳는 곳이 다른 거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법한 그런 디테일이 우리를 리얼한 공간과 시간, 장소에 데려다놓는다. 또 우리 둘 다 시대배경을 알려주는 명백한 지표를 피하고 싶어 한다. 로케이션 헌팅을 다닐 때면 항상 서로 “실제로는 어땠을까? 여기서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까?” 하고 물어본다. 하지만 잭과 작업할 때 재밌는 건, 그렇게 신중한 준비 과정을 거쳐 정확성을 기한 뒤 막상 세트에 가면 딴소리를 한다는 거다. “저런 잡스러운 것들은 신경쓸 필요없어. 그냥 내키는 대로 해!” 그런 이상한 조합이이야말로 잭 피스크를 잭 피스크로 만드는 요소다.
-1996년 이후 한번도 장편영화에 사용된 적 없는 65mm 필름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테스트를 해보니 65mm가 이 영화에 가장 잘 맞는 것 같더라. 고해상도를 원한 건 아니었다. 아이맥스처럼 아주 선명하게 찍는 게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65mm에는 무언가 특별한 게 있었다. 각자 캐릭터에 맞게 의상을 입고 헤어스타일을 한 배우들을 카메라로 봤을 때, 우리가 그 시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 대개는 그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에서 얻은 것일 그 인상과 직결되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야기에 더욱 빠져들게 하는 65mm만의 힘이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한 시도였지만 촬영을 진행하면서 결국 65mm를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촬영 포맷에 관해 많이 이야기되는 게, 한편으론 긴장도 된다. 왜냐하면 극장을 찾은 사람들에겐 특정한 기대치가 있을 테니까. 65mm는 주로 와이드 스크린용 영화나 대서사시에 사용되어왔잖나. 그걸 가지고 실내극을 만들었으니 포맷에 대한 관심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당신, 변했니?
-마틴 스코시즈에 비교됐던 <매그놀리아>나 로버트 알트먼에 비교됐던 <부기 나이트> 이후 많이 변화했다고 스스로 느끼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은 것 같나.
=변화했길 바란다.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 했던 것들을 계속 똑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싫으니까. 시나리오 작업에 좀더 자신감이 붙은 건 맞다. 나 자신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는 데 예전보다 자신이 있다. 영화를 만들려면 두려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준비는 됐지만 막상 현장에 나가면 전혀 새로운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마스터>는 (내 전작들과 비교해) 좀더 수수께끼 같은 영화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친구 하나가 필립의 랭카스터에 대해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 필립과 한번도 얘기해본 적은 없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영화에는 늘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기 마련인 것 같다. 만약 필립의 랭카스터가 이 이야기의 궁극적인 주동자라면, 그 사실은 영화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의도한 효과는 아니다. 감독은 자신의 전략보다 자신이 전달하려는 이야기와 캐릭터를 통해 새로 발생하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부분을 편집을 통해 조정하나.
=첫 작품을 제외하자면, 촬영은 예전보다 더 적게 하는 편이다. <마스터>도 적게 촬영한 편이다. 심지어, 단 하루 만에 마쳐야 하는 로케이션 촬영에서도 통제가 잘됐다. 물론 어떤 신이냐에 따라 상황도 달라진다. 영국 헤드쿼터에서 촬영한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잘 쓰였을 뿐 아니라 통제도 잘돼서 하룻밤 만에 촬영을 마쳤다. 하지만 예를 들어 와킨이 벽과 창문 사이를 반복해 오가는 장면은 좀더 자유롭게 촬영했다. 시나리오에는 조금만 묘사돼 있었고, 촬영을 하며 뭔가가 더 만들어지길 바랐다. 그런 장면은, 가능하다면, 60일간의 촬영 기간 사이에 잘 계산해 넣어야 한다. 아무 계획 없이 그냥 세트에 뛰어들어 ‘예술’이 탄생하길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방식은 나와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편집도 마찬가지다. 어떤 신은 어느 날 오후면 완성이 되는데, 그렇게 촬영이 됐거나 애초 시나리오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다른 시퀀스에서는 유동적인 조각들을 사운드트랙과 함께 조합해나간다. 그 과정이 진짜 재미있다. 1년 동안 편집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재미 때문이다. 그외 다른 신에도 그때그때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어떤 장면들에서는 작은 제스처를 기민하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커즈의 구성원들이 뉴욕의 파티에 도착했을 때 프레디가 여주인의 목걸이에 손을 대는 장면도 그렇다. 작은 몸짓 하나가 신의 톤을 결정한다. 관객은 즉각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될 것 같다는 예감을 받는다. 그런 것도 다 시나리오에 있었나.
=아니, 그건 와킨의 아이디어였다. 촬영 준비를 하면서 그 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서는 대충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2시간 동안 15번 가까이 테이크를 갔는데, 새로운 테이크에 들어갈 때마다 무언가 다른 부분이 생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런 파티 장면에서는 수많은 배우들이 움직이니까. 필립, 와킨, 에이미만이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훨씬 느슨한 연출방식인 거다. 그런 경우 프레임이 이미 정해져 있다 해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매번 달라진다. 그렇게 찍힌 것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하나를 찾는 거다. 하지만 그 하나를 찾기 위해 2~3일씩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마냥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니다. 전체 촬영 기간을 감안해 스스로 정해놓은 원칙이 있으니까. 가끔은 잘못해 토끼 굴에 빠질 때도 있다. 첫 테이크에 마음에 드는 컷을 얻었는데도 뭔가를 더 얻겠다고 계속 촬영을 하는 거다. 그렇게 10테이크쯤 가면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막상 편집실에 가서 찍어놓은 것들을 봐도 대개는 초반에 찍은 컷이 더 낫다. 물론 다 내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