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기대하라! 리얼리티 그 이상의 비주얼
2013-07-23
글 : 장영엽 (편집장)
기술적 완성도 높은 한국산 3D 블록버스터 <미스터 고>의 성취

“불가능?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다! 그게 서커스예요. 그런데 기자 아저씨들은 왜 똑같은 걸 매일 물어봐요?” 영화가 시작되면, 단발머리의 중국 소녀 웨이웨이(서교)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이것은 <미스터 고>를 만들기로 결심한 김용화 감독이 소녀의 목소리를 빌려 전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천여컷 분량의 ‘야구’ 하는 CG 고릴라, 그를 풀 3D 영상에 담아내겠다는 선택. 4년 전만 해도 <미스터 고>라는 프로젝트는 한국 영화계의 가장 예측 불가능하고 위험한 곡예처럼 느껴졌다. 감독조차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고 말했던 <미스터 고>가 오랜 산통 끝에 드디어 거대한 막을 열어젖혔다. 7월8일 언론시사회에서 공개된 이 영화는 한국 최초로 등판한 디지털 주연배우를 앞세워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미스터 고> 이후 충무로의 그 어떤 영화인도 기술적인 도전에 있어 ‘불가능’이란 말을 쉽게 꺼낼 수 없게 될 거라는 점이다.

중국 룡파서커스단의 아기자기한 막사 안에서 <미스터 고>의 서막이 오른다. 사람이 던지는 공을 너무나도 쉽게 받아치는 기술을 지닌 45살 고릴라 링링과 그를 조련하는 15살 소녀 웨이웨이는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이다. 야구에 미친 할아버지(변희봉)가 투수로 키우겠다며 엄청난 빚을 내 또 다른 고릴라(레이팅)를 사들이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웨이웨이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한편 한국 야구계의 새로운 스타 선수를 물색하고 있던 악독 에이전트 성충수(성동일)는 고릴라 링링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웨이웨이에게 거액의 계약금을 제안한다. 우여곡절 끝에 소녀와 고릴라는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향하고, 두산 베어스에 입단한 링링은 인간의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타격 실력으로 한국 프로야구의 일약 스타가 된다.

이야기는 사실+판타지, 비주얼은 극사실

줄거리만 듣고서는 의아하게 생각할 관객도 있을 것이다. 고릴라가 한국 프로야구팀에 영입돼 스타 타자로 활약한다는 게 과연 납득 가능한 이야기일까? 사실 <미스터 고>가 직면한 첫 번째 난관은 기술이 아니라 이야기에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인 허영만 작가의 만화 <제7구단>에서는 가능할 일일지 몰라도, 디지털 캐릭터인 고릴라가 실사영화에서, 야구선수를 연기할 실제 배우들과 함께 야구장을 뛰어다닐 모습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한국영화들을 돌이켜보아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고릴라가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설정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하고, 점잖은 의사 선생님이 옷을 찢어발기며 초록색 성난 괴물로 변신하는 게 할리우드영화에선 흔한 일이지만, 리얼리즘이 강한 한국영화 속 디지털 캐릭터들은 유독 현실과 맞닿아 있는 ‘근본’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괴물>의 괴물은 미군이 한강에 방류한 포름알데히드를 통해, <차우>의 식인 멧돼지는 산을 파헤친 사람들의 욕망으로부터, <7광구>의 괴물은 인간의 바닷속 자원 채취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을 떠올려보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스터 고>는 ‘야구 하는 고릴라’라는 영화적 설정에 있어서 만큼은 리얼리티의 잣대를 의식하지 않는 영화다. 그 이유에 대한 김용화 감독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고릴라가 야구를 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20페이지 넘게 쓴 적이 있다. 그리고 거울을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지. ‘야, 이 미친놈아!’ 원작으로부터 가져온 발상 자체가 ‘고릴라가 야구하는’ 이야기인데, 이걸 구단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니,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반대하느니 하는 지난한 과정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겠나 싶더라.” 그의 말처럼 <미스터 고>는 고릴라 선수 링링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리얼리티의 한계를 시치미 뚝 떼고 건너뛴다. 대신 TV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나 <동물농장>을 연상케 하는, 룡파서커스단을 배경으로 한 오프닝 시퀀스를 통해 선천적으로 공을 치는 능력을 타고난 특별한 고릴라가 여기에 있다는 점을 관객에게 주지시키려 한다. 앵커의 내레이션이 흐르는 이 시퀀스는 일견 성장동화의 예고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뭇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고릴라와 소녀는 고릴라의 특별한 능력 덕분에 낯선 나라로 모험을 떠날 것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될 때 그들은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현실과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와 달리 <미스터 고>는 극사실주의적인 비주얼을 지향하는 영화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가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고릴라의 모습이 꽤 만족스럽게 구현됐다. 1년이 넘는 후반작업 기간 동안 400여명의 한국 스탭들이 전념해 만든 두 마리의 고릴라는 가장 기본이 되는 털과 골격부터 얼굴 표정과 움직임까지 자연스럽게 실사영화에 녹아든다. 영화의 절반이 넘는 장면에 고릴라들이 등장하는데도 별다른 저항감 없이 관람할 수 있을 정도다. 특히 메인 캐릭터인 링링의 느릿하면서도 의뭉스러운 성격을 표정이나 행동으로 구현해내는 장면들이 매력적이다. 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 난을 먹고 싶어 은근슬쩍 화분의 주인인 성충수의 눈치를 보거나, 300kg에 달하는 육중한 무게 때문에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아빠 다리를 하고 앉는 링링은 <미스터 고>의 수많은 주•조연 배우들과 더불어 영화의 정서를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러한 링링의 모습은 야성성이 부각된 <킹콩>의 콩과 인간만큼 예리하고 민첩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시저와는 달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반려동물의 모습에 가깝다.

김용화 감독은 링링의 모습을 구상하며 SF 장르적 캐릭터로 고릴라를 활용하는 할리우드영화의 공식에서 벗어나 어떤 캐릭터를 구현할지를 고민했다고 말한다. “영웅적인 행동과 모션을 보여주지 않더라도 충분히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거쳐 그가 떠올린 건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구하러 가는 느낌”이었다.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미스터 고>의 링링은 <길버트 그레이프>의 지적장애인 소년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캐릭터다. 도무지 그 속을 종잡을 수 없는 엉뚱한 행동을 해 종종 형 길버트 (조니 뎁)의 애를 태우지만, 어니는 특유의 순수함으로 가족을 봉합시키고 형의 성장을 이끈다. 웨이웨이에게 링링도 그런 존재다. 김용화 감독은 “동물과 인간이 같은 곳을 바라보다가, 인간이 충족되지 않는 고민과 욕망 때문에 다른 곳을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인간의 뒤에 서 있던 고릴라는 항상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는 말로 <미스터 고>의 테마를 정의한 적이 있다. 다 같은 동물이지만 자신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못하던 인간이 고릴라의 순수한 모습을 통해 자신의 오만함을 깨달으며 무너지는 순간, 이 영화의 울림이 있으리라고 김용화 감독은 생각했던 것 같다.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던 인물들이 인생의 굴곡을 피하기 위해 잠시 나쁜 마음을 가져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어떤 사건과 인물의 영향으로 깨달음을 얻고 진정한 자신을 되찾는다는 이야기는 장편 데뷔작 <오! 브라더스>부터 <국가대표>까지 김용화 감독의 영화들이 끊임없이 변주해왔던 테마다. <미스터 고>도 이 범주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 브라더스>의 상우(이정재), 봉구(이범수) 형제, <미녀는 괴로워>의 한나(김아중) 부녀, <국가대표>의 방 코치(성동일)와 다섯명의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들(하정우, 김동욱, 김지석, 최재환, 이재응)은 <미스터 고>의 소녀와 고릴라가 맺고 있는 관계의 다른 얼굴들이다. 그러나 어쩐지 전작의 인물들에 비해 소녀 웨이웨이와 고릴라 링링의 유대관계는 그리 단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개별적으로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함께 호흡할 때 두배의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한다고 할까. 무엇보다 소통의 문제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다. 김용화 감독의 전작들에서 사람과 사람간의 오해와 갈등, 화해의 과정이 영화의 후반부에 이어지는 결속의 드라마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면, <미스터 고>에선 인간과 고릴라가 그 역할을 해야 하나 많은 장면에서 링링은 일방적으로 소녀를 바라보거나 인간의 성공을 위한 도구처럼 묘사된다.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연출의 목적이었다고 해도, 세심한 관객이라면 <미스터 고>의 주연 캐릭터인 웨이웨이와 성충수가 종종 링링에게 보여주는 무심함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듯하다.

링링과 레이팅이 맞붙는 신을 기대하라

하지만 캐릭터간의 정서적 유대감이 다소 아쉽다는 점을 제외하면, <미스터 고>는 상업영화로서 즐기고 누릴 거리가 충분한 영화다. 우선 시원하게 펼쳐진 경기장 깊숙이 3D 카메라를 투입하고 역동적으로 찍어낸 프로야구 장면은 보는 이가 야구팬이든, 야구의 룰을 알지 못하든 관계없이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할 거다. 특히 경기 장면에선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건너뛰면서까지 ‘야구 하는 고릴라’를 구현해내고자 했던 제작진의 각오를 엿볼 수 있다. 세계 최초로 고릴라의 타격 폼(링링)과 투구 폼(레이팅)을 완성해낸 덱스터 디지털의 제작진과 김용화 감독은 그 퍼포먼스에 ‘오리지널’이라는 이름을 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고릴라의 육중한 무게가 실린 시속 200km의 공이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포수를 저만치 날아가게 하는 장면이나, 고릴라의 투박한 손에 쥐어진 배트가 야구공을 하늘 높이 날려버리는 장면을 우리는 <미스터 고>에서 처음으로 목도하게 된다. 특히 레이팅의 던지는 힘과 링링의 받아쳐내는 힘이 맞붙는 괴력의 클라이맥스 신은 짧고 임팩트있게 보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명장면이다. ‘신 스틸러’로 기능하는 몇몇 조연배우와 카메오의 존재는 <미스터 고>의 유머를 담당한다. 특히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채업자로 분한 김희원의 림샤오강과 “30년간 같은 미용사에게 머리를 깎아온”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의 바가지 머리 구단주로 출연하는 오다기리 조의 활약을 언급할 만하다.

“지금은 안되는 기술인데, 개봉할 때쯤엔 다 가능해질 거야.” 16년 전, <타이타닉>을 만들던 제임스 카메론이 스탭들에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 김용화 감독은 내심 놀랐다고 한다. <미스터 고>를 만들고 있던 자신의 심정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란다. 4년 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던 <미스터 고>의 제작진은 드디어 터널의 끝에 다다랐고 4년 전의 시행착오를 더이상 되풀이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유머와 액션, 쓴웃음이 공존하는 김용화 감독의 영화 <미스터 고>는 플롯상 약간의 아쉬움도 남지만 400여명의 한국 토종 스탭들이 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온전히 이 프로젝트에 몸바쳤던 노력과 긴장의 결과를 남부끄럽지 않게 만들어준 3D 블록버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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