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는 키스에 미치고, 중학생은 나이키에 미치고
“배우 신하균, 유명 여배우 B양과 키스하다 들켜….” ‘필름있수다’홈페이지(www.filmitsuda.com)의 ‘수다뉴스’ 중에 올라와 있는 다소 도발적인 카피만 보자면 이건 웬만한 스포츠신문 일면을 장식할 만한 특종이다. 여기서 잠깐! B양은 누구인가. 다 아는 사실인데 뭘 그걸 새삼스럽게 물어보냐고?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 평소 신하균은 함께 작업하는 동료, 스탭들에게 예의바르고 성실하다는 좋은 평판을 얻고 있던 터, 이같은 소문이 흘러나와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발빠르게 진위여부 확인에 나선 결과, 지난 연말 파주에서 촬영을 마친 단편영화 <사방에적>에서 키스에 미친 유부녀의 정부로 출연, B양과 장시간(밝히길 꺼려함) 키스한 것을 두고 퍼진 뜬소문. 화제의 여배우 B양은 극중 ‘키스에 미친 유부녀’ 역의 방(Bang)은진으로 밝혀졌다….”(중략)
한참 바쁜 신하균이 단편영화에 출연한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한국영화 제작진행표에서도 본 적 없는 금시초문의 <사방에적>이라니…. 이건 필시 유령영화다, 라고 생각하면 섭섭하다. 지난해 10월부터 소리소문 없이 진행되고 있는 필름있수다의 ‘2002 단편 프로젝트’ <사방에적> <내 나이키> <간이역> 중 하나인 <사방에적>은 신하균 외에도 류승범, 임원희, 정재영, 방은진, 윤주상 등 기존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을 뿐 아니라 35mm로 촬영되었으며 보통 장편영화와 다르지 않은 후반작업을 거쳐 시장출하를 기다리는 멀쩡한 영화다.
“우리끼리 보긴 너무 아깝네”
“원래 이렇게 거창한 프로젝트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니까요.” 지난해 수다에서 기획·제작했던 디지털 단편영화 프로젝트 <다찌마와 리> <극단적 하루> <커밍아웃>이 예상 외로 큰 인기와 반응을 얻고난 뒤, 또 한번 재미있는 그러나 부담스럽지 않은 무언가를 찾고 있던 수다는 애초엔 “우리 스탭과 배우들이 모여 재미있는 단편영화 한편 만들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사방에적>을 찍어나가기 시작했다. “찍다보니 아! 저 최고의 배우들이 저렇게 망가지는데 우리끼리 보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 그저 흘러가듯 만난 감독들과 뜻이 맞아 30분 분량의 단편 2편을 더 기획하게 된 거고….”
지난해 10월에 들어가 12월 초 작업을 마친 <사방에적>(四房에敵)(감독 박상원·시나리오 장진)은 <포룸>을 연상시키는 상황극이다. 한적한 도심 외곽의 모텔. 오로지 키스에 미친 유부녀(방은진)와 그녀의 젊은 정부(신하균)가 격렬한 키스를 벌이며 813호로 오르고 있다. 이 시간 변심한 애인을 방화살인하려는 810호의 남자(정재영)는 약먹고 잠들어 있는 애인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댕기려 한다. 그 순간, 헉! 성냥이 없다. 801호에는 ‘도라이바’를 무기로 사용하는 킬러(박상욱)에게 용문신의 한쪽 눈알이 뚫리는 치명적 상처를 입은 조직 보스(윤주상)가 있고 옆방 802호에는 그의 똘마니들이 복수를 위한 출격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한명의 똘마니가 “너무 과하게 일을 보는” 바람에 변기가 막히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고 ‘뚫어 기술자’를 기다리는 조직의 방으로 십자 드라이버를 들고 킬러가 들어선다. “마저 뚫으러 왔다!” “어이∼ 연장을 보아하니 진짜 기술자구만….”
현재 막바지 촬영중인 <내 나이키>(각색 장진 감독·각본 박광현)는 따뜻한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이다. 1981년 이후 전국에 불어닥친 나이키 열풍에 감염돼 나이키 운동화를 갖는 것이 소원인 중학생 명진에겐 하늘에 떠 있는 달모양도 나이키, 칠판을 봐도 나이키, 자나깨나 나이키 생각뿐이다. 사실 명진의 가족들에겐 저마다, 통일보다 더 간절한 소망들이 있다. 개인택시기사가 되는 게 꿈인 회사택시기사 아빠(임하룡), 개인택시기사 마누라가 되는 게 꿈인 엄마, 어서 빨리 죽었으면 하는 할머니, 교회에 미친 누나는 쌍꺼풀 수술, 큰형(임원희)은 일등먹는 게, 작은형(류승범)은 짱먹는 것이 꿈이다. 어느날 명진은 빨간 물감 하나로 꿈을 이루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내 꿈이 이루어지던 날,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졌다….”
2월20일경에 촬영에 들어가는 마지막 프로젝트 <간이역>(가제, 각본·각색 장진, 각색 조정화, 감독 이현종)은 이룰 수 없어 안타까운 러브스토리다. 휴가 마지막날, 유부녀가 되었지만 한때 사랑했던 누나 주희(박선영)를 만나는 이등병 영일(김일웅). 남의 여자가 되어버린 그녀를 보며 착잡함을 숨길 수 없는 영일은 귀대 시각이 다가오자 조급해진다. 한번도 고백하지 않았던 마음을 말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나 그런 마음은 주희도 마찬가지. 기차역 플랫폼.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리자 영일은 참았던 사랑을 고백한다. “누나… 사랑했어….” 그러나 여기까지, 제작진들이 “<식스 센스> 이상의 반전이 있다”고 과도하게 ‘뻥’치는 엔딩은 이 멜로영화가 ‘메이드인 수다’임을 입증해준다.
충무로 밖의 신선한 감독진 영입
지난해 인터넷 프로젝트가 기성 장편감독들의 단편영화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면 올해 단편 프로젝트는 영화경험이 전혀 없는 딴 매체의 감독들을 끌어들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장 감독의 고등학교 친구인 ‘도라이바’ 킬러 박상욱의 친동생인 <사방에적>의 박상원 감독은 미시간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영화학도. <내 나이키>의 박광현 감독은 마이클럽닷컴의 ‘선영아 사랑해’ 시리즈를 기획했고, 직접 감독한 맥도날드 CF 신하균편으로 얼마 전 뉴욕광고페스티벌에서 금상을 획득한 재능있는 CF감독. <간이역>의 이현종 감독은 베이비복스, 고재근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서울예대 출신의 젊은 뮤직비디오감독이다.
“장편으로 가기 위한 브리지가 아닌 진정한 30분의 재미와 미학을 만들어내겠다”는 포부로 제작중인 이 프로젝트는 ‘단편영화는 예술, 장편영화는 상업’이라는 기존의 개념을 뒤집어 엎고 칙칙한 자취방의 어둠을 벗어나 재미있게 잘 만든 단편영화는 상업적인 가치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감히 자신한다. 2억원이 조금 넘는 총제작비에 마케팅비를 포함해 전체 2억5천만원 정도의 예산이 들어가며 “배우들 개런티를 안 줘서 저예산이지 웬만한 장편영화 수준”는 이라는 것이 제작실장 지상용씨의 자랑.
이 세편의 영화를 이어서 보는 무엇보다 큰 재미는 3편에 동시에 출연하지만 매 작품마나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배우들. 적당한 역할이 없으면 길거리 전단지나 나이트 벽보에라도 얼굴을 비칠 예정이라고. 각각의 단편은 해외 페스티벌, 소도시 영화제에 “가리지 않고” 출품시킬 예정이며, 올해 5월쯤 3편을 묶어 전국 극장에서 관객과 조우코자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내 나이키> 박광현 감독 인터뷰
“타매체에 대한 수용력, 수다의 힘이다”
-어떻게 수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나.
=맥도날드 CF를 류승범, 임원희, 정재영, 이문식씨 등과 찍게 되면서 수다쪽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사실 원래 장진 감독 팬이었다. 수다에서 장편 준비하는 광고계 선배인 이경일 감독이 장 감독을 만나러 간다기에 ‘나 좀 데려가 달라’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마침 수다에서 단편 프로젝트를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간 남몰래 준비했던 시나리오 몇편을 내밀었다.
-시나리오를 준비해왔다는 것은 영화감독 데뷔를 꿈꾸었다는 건가.
=영화는 언제나 내 꿈이었다. 홍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자연스럽게 광고일을 시작했다. 어릴 땐 다 카메라 들이밀고 찍는 건데 뭐가 다를까 했으니까. <홍대 전철역 WC 세남자 이야기>라는 습작이 신영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데 힙입어 근무시간 외에 틈틈이 시나리오를 써왔다. 공모도 많이 냈는데 다 떨어졌다. (웃음)
-‘선영아 사랑해’ 기획도 그렇고 맥도날드 CF도 ‘빅스타, 빅버젯’이라기보다는 소소한 상황적 재미나 따뜻한 정감이 묻어난다.
=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웃음이 작위적이지 않았으면, 그러면서 재미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안고 일해왔다. CF에서 단편, 장편영화로 사이즈가 커지더라도 이런 기본 맥락은 잃고 싶지 않다.
-나이키를 갖고 싶어하는 소년의 꿈,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썼나.
=30대 초, 중반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다. 향수를 자극하는 부분도 있고 따뜻한 느낌이 나서 좋았다. 구체적인 것은 술자리에서 친구가 해준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내게 되었다.
-CF작업만 하다가 영화작업이 처음이라 어려움이 있겠다. 너무 꼭꼭 눌러서 찍는다고 스탭들의 원성이 자자하던데…. (웃음)
=그럴 거다. 아직 미숙해서 그렇다. 트레이닝하고 있는 느낌이다. 스스로에게 혹독히 깨지고 있다. 처음엔 영화현장에 내 스탭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적응하기 어려웠다. CF현장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여기서는 낯설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몰랐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게다가 배우들이 죄다 노개런티로 출연해주기 때문에 엄하게 지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특히 CF 출신이기 때문에 “나는 그림엔 강해”라고 생각하는 건 장점이 아니라 함정이란 걸 깨달았다. 지금은 많이 적응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이런 단편작업이 나를 실험할 수 있게 하고 제대로 준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수다와 함께 일해보니 어떤가. 이 집단의 힘은 무엇인 것 같나.
=일단 실력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인 건 분명하고, 무엇보다 타 매체에 대한 수용능력이 뛰어나다. 미술만 해도 순수회화하는 사람들은 디자인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얕보는 경향이 있는데 영화쪽도 CF쪽에 대한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수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 부분의 장점을 살려보라’고 할 정도였다. 이런 수용력이야말로 발전의 밑거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