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주의 시에 늘 호의적이었던 신형철 평론가는 “김경주의 시는 감각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라는 기율에 충실하다”고 썼다. 그런 그가 새로운 ‘감각’의 시극(詩劇)을 준비 중이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자고 있어, 곁이니까> 등을 쓴 시인이자 극작가인 김경주가 시극 <나비잠>을 무대에 올린다. 서울 사대문 축성에 얽힌 신화와 창작설화를 시적 언어와 라이브 음악 및 인형극, 그림자극, 영상 등 다양한 이미지의 오브제를 융합해 무대화한 것으로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가 협연연출에 나선다. 데오도라 스키피타레스는 ‘<뉴욕타임스> 최우수 연극 10선’에 선정되면서 주목받았던 예술가로 뮤지컬 <라이언 킹> 그림자극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모국어의 충만한 속살’과 ‘우리 자장가의 아름다움’을 근사하게 담아낼 <나비잠>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추석인 9월19일 개막해 29일까지 열흘간 계속된다.
-시극이라는 형식이 아무래도 낯설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비롯해 나중에 카를로스 사우라가 영화로 만들기도 했던,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극작가인 가르시아 로르카의 <피의 결혼식>, T. S. 엘리엇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원작으로 삼은 뮤지컬 <캣츠>도 다 시극이라고 볼 수 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나 최인훈의 작품들도 시극으로 재평가받아야 한다. 시 낭독이나 정극과는 다른, 시적 드라마가 살아 있는 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리움의 시’라는 뜻의 <일리아드> 이래 시와 극은 원래 한몸이었다. 인류 드라마의 원형이라고나 할까. 그런 흐름 속에서 시극의 복원 작업에 관심이 많았고 10년 넘게 꾸준히 그 작업을 해왔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의 시극이라?
=홍상수의 <하하하>에서 문화센터의 시인(김강우)이 매일 시를 쓴다고 말하자, 미자(문소리)는 정말 그러냐며 깜짝 놀란다. 보통 갖고 있는 시인의 이미지라는 게 매일 술 마시고 폐병에 걸려 있는 것이니까. (웃음) 언어는 더욱 발달하고 풍성해져가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시를 읽게 하는 방식이 뭘까 계속 고민했다. 현대무용이 추상적이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시를 안 읽는다고 나무라고 혼내면 폭력이 된다. 시극의 복원 작업은 시를 드라마와 공간의 형태로 보여주는 시 작업의 확장이자 역류적인 형태의 시 운동이다. 시인이 여전히 대중과 소통하고 교감하려는 시도이면서, ‘우리 시대에 왜 시가 필요한가’라는 화두 속에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시를 읽게 하기 위한 운동이다.
-평소에도 ‘극작가’라는 이름에 대한 애착이 크다.
=시극의 본질을 무언극, 이미지극, 모노극, 낭독극이라는 네 가지 형태로 보고 입체성을 가지고 소극장을 바탕으로 해왔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게릴라전을 하듯 시극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극도 1년에 많게는 5~6차례 무대에 올리면서 단 한번도 쉰 적이 없다. 지난 10년 넘게 대학로의 폐쇄성 때문에도 힘들었고 굳이 내 자리를 연극인들 안에서 찾아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에 많이 지쳤고 외로웠다. 가장 직접적인 충격은 지난해에 올린 연극 <블랙박스>가 한달 동안 불과 200명 정도만 왔다는 사실이다. 소극장 하루 대관료가 50만원선인데 6일 정도는 관객이 한명도 없었으니 빚더미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지원금 얘기도 하는데, 그건 거의 링거 맞는 것과 같아서 그것에 의존하다보면 고사해버린다. 상상력을 고민하기보다 지원금에 맞춘 연극을 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극의 고유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관객도 ‘차라리 영화나 한편 볼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
-대학로를 떠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게 된 점도 눈에 띈다.
=지금도 대학로의 수많은 연출가들은 “대한민국 국민 절반이 아직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안 봤다”는 말이나 하면서, 발굴하고 창작하려는 노력 없이 ‘좋은 텍스트가 없다’며 검증된 것들만 무대에 올리려 한다. 극작가로서 시극처럼 새로운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블랙박스>가 참패하면서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는데, 다행히 <블랙박스>가 미국에도 소개됐고 서울시극단의 김혜련 단장(<나비잠> 연출)이 ‘서울의 영혼을 보여주는 작품을 기획 중’이라며 4대문에 얽힌 우리 이야기를 써줄 수 있겠냐고 제안해 지금에 이르렀다. 과거 서울은 사람들의 응집력이나 결속력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4대문 축성은 외부세력을 막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안을 감싸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정도전이 천자문의 원리로 4대문을 과학적으로 설계했고, 엄청난 노역과 징발이 이뤄졌다. 그 속에서 4대문의 ‘인의예지신’, 일본의 ‘원령’과는 다른 개념인 우리의 ‘정령’이 녹아든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나비잠>은 지난 10년 동안 극작을 하며 처음으로 ‘페이’를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웃음) 그전에는 받아도 그냥 돌려주는 식이었으니까.
-자장가라는 형식이 무척 흥미롭고 독특하다.
=예전부터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장가를 수집하는 게 취미였다. 아프리카 자장가 중에는 “엄마가 너무 더워서 구아바 열매 안에서 자고 있어” 같은 가사도 있다. 구아바 안이 시원하니까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자는 거다. (웃음) 하얀 눈밭에서 순록이 졸고 있다고 노래하는 북유럽의 자장가는 무척 몽환적이다. 그렇게 나라마다 다른 자장가가 고유의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비잠>의 영어 제목에 ‘Butterfly’가 들어가지 않고 ‘Sleeping Rhyme’이다. ‘잠으로 가는 리듬’이라는 말인데, 데오도라도 너무 매력적인 제목이라고 하더라. 게다가 자장가라는 게 아이의 울음을 멈추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비단 아이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치매 걸린 노인을 생매장하면서도 ‘자장자장 우리 엄마’ 하며 자장가를 불렀다.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와 연인을 잠으로 데려가기 위해 무의식을 달래는 노래였다. ‘달랜다’는 표현을 무척 좋아해서 이번 공연 포스터에도 서울의 ‘혼’이 아니라 ‘얼’을 밀었는데 결국 안됐다. (웃음) 혼은 누구나 있다. 얼의 어원을 보면 달랜다는 뜻이다. 혼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거라면 얼은 떠돌면서 주인을 찾아간다. ‘soul’도 아니고 ‘spirit’과도 다르다. 아마 외국에서는 ‘젖동냥’이라는 우리말의 질감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다. <나비잠>을 통해 모국어의 속살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자장가를 통해 세상의 모든 불면의 존재들을 달래고 싶은 거다.
-원래 시 낭독 이벤트도 꾸준히 해왔고, <나비잠>의 자장가도 그렇고, ‘글’이 아닌 ‘소리’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 모범답안을 찾기만 했지 정작 문학을 즐기고 향유하지는 못했다. 시는 주제를 찾아야 하고 소설은 플롯을 이해해야 한다고만 배웠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소설이든 영화를 보면서 플롯을 이해하지 못하면 짜증부터 낸다. (웃음) 가장 중요한 건 소리내서 읽는 문화다. 시나 소설을 소리내 읽으면서 작가의 호흡에 다가선다. 독자든 작가든 그 누구도 숨을 멈추고 읽을 수 없고 쓸 수 없다. 문학은 숨 쉬는 것이고, 글은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숨으로 읽는 것이다. 출판사들이 품위유지를 위해 시집은 내도 희곡집은 돈이 안되니까 창비나 문지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나비잠>은 독립출판 500부라도 꼭 시극집을 내고 싶다. 말하자면 시와 희곡을 쓰는 사람으로서, 시극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절박한 심정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