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정유미] 정유미라는 질문 오늘이라는 대답
2013-09-09
글 : 송경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선희 역의 정유미

가볍게 던진 질문에 한참을 고민한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가 싶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엔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좀처럼 드러내고 싶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홍상수 감독의 <우리 선희>에서 선희로 분한 정유미는 선희처럼 모두의 눈길을 잡아끌고, 선희처럼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지만, 선희처럼 알 수 없다. 그녀를 설명하려는 말은 차고 넘치지만 그 어떤 것도 없는 미로에 빠진 기분. 몇번의 대화가 오가고 미로를 헤맨 끝에 겨우 실타래 한쪽 끝이 잡힌다. ‘모르겠다’는 대답이야말로 최선을 다한 진심의 형태다.

<우리 선희>에는 선희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나온다. 선희는 어떤 아이니.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똑똑하고 똘기도 있는 용감한 친구. 마무리는 항상 착하고 예쁘다로 끝나는 두루뭉술한 답변. 이 모든 표현들은 정확히 선희를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선희를 완벽하게 오해하도록 만든다. 단어의 조각들이 만들어낸 이미지 속에 나의 선희, 너의 선희, 우리의 선희가 있다. “선희를 궁금해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설명하려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경험 다들 있잖아요.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말을 자기 생각처럼 이야기하고 그 말이 다시 입에서 입으로 떠돌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그런 상황들이 재미있었어요. 농담과 말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의 관계랄까.” 배우 정유미를 둘러싼 말들도 대체로 이와 다르지 않다. 일부는 사실, 일부는 이미지, 때로는 캐릭터, 때로는 진심. 조각난 말들이 사람들의 사이를 떠돌며 오늘의 정유미를 만들어왔다.

데뷔 9년차.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의 수줍은 소녀로 출발해 <사랑니>(2005), <가족의 탄생>(2006), <차우>(2009) 등 호평받은 영화에서 인상적인 캐릭터를 선보였고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을 통해 88만원 세대의 얼굴로 거듭났다. 몇편의 드라마를 통해 단단하게 다져진 팬층을 확보했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부터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매번 출연하며 생각있는 배우의 이미지를 얻었다. 적지 않은 필모그래피에 나아가는 방향도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배우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망설인다. “왜 이렇게 작품을 고르냐는 분들도 있지만 외부에 비친 이미지와 실제 들어오는 시나리오 사이엔 괴리가 있어요. 특별히 이런 걸 해야지 하고 목표로 하고 있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주어진 걸 제대로 해내려고 노력 중이에요. 사실 데뷔 연차에 비해 많은 작품을 한 것 같지도 않아요.”

신중하거나 겸손한 것과는 살짝 다르다. 그저 진심이다. 그녀는 특별히 장대한 목표를 세우고 달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다. 정해진 캐릭터, 일정, 틀에 자신을 맞추는 데도 서투르다. 대신 정유미의 연기는 기본적으로 ‘오늘’에 맺혀 있다. “시나리오를 완전히 이해하고 시작하진 않아요. 홍 감독님 영화는 애초에 그게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주어진 대사와 대략적인 상황만 가지고 자리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요. 실제 나는 여기 와본 적도 없고 그런 일을 겪은 적도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 순간들이 너무 좋아요.” 로베르 브레송이 말했던 것처럼 ‘그 순간 그 장소에서 허락된 유일한 연기’가 그녀에게 찾아온다고 해야 할까. 그 순간 그녀의 연기는 의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체험에 가깝다. 자연인 정유미의 경험이 연기에 녹아들어가는 게 아니라 선희라는 캐릭터가 거꾸로 그녀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그 순간을 직접 체험했기에 더욱 생기를 발하는 장면들.

“어떤 역할을 맡는 순간 나는 그 시간을 그렇게 산 거예요. 거기 그렇게 있었던 거죠. 살면서 매일매일이 기억되진 않잖아요. 근데 작품을 찍을 땐 어떤 몇달은 내가 거기 그렇게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 그 시간에는 선희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들과 함께했구나. 그런 순간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행운인 것 같아요.”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그녀의 기억(이 된 연기)을 마주하고 그녀의 진심에 공감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의 정주리, 영화 <옥희의 영화>의 옥희, <우리 선희>의 선희와 정유미는 다르지만 적어도 작품에서만큼은 한결같이 거짓 없는 눈빛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알 수 없지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 알 수 없는 먼일을 염려하며 가능하지도 않을 계획에 정력을 허비하느라 정작 ‘오늘’을 놓치는 이들이 대부분인 요즘, 지금 이 순간을 연기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그녀는 이미 좋은 배우다.

스타일리스트 최경원/헤어&메이크업 이신애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