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 선희>의 문수(이선균)를 보며 불현듯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났다. 파리의 북한 유학생으로 분했던 <밤과낮>부터 영화과 대학원생으로 출연하는 <우리 선희>까지, 홍상수 감독의 다섯 영화에 출연한 이선균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따로 떼어 붙여놓고 보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들 영화에서 이선균은 대개 지식인이었으며 어떤 여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비슷한 역할을 맡은 적이 있는 김태우, 김상경 등의 배우들과는 또 다르다. <옥희의 영화> 속 한 장면. 구애를 퍼붓는 진구(이선균)에게 옥희(정유미)는 “난 네가 착해서 좋아. 믿을 수가 있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이선균이 진구를 연기하기 때문에 비로소 진심처럼 들린다. 젖먹던 힘을 다해 팔씨름으로 성남(김영호)을 이겨보려던 <밤과낮>의 경수처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돌진하는 맹목적인 순수함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이선균에게서 종종 엿보인다. 버려야 할 것보다 얻고 싶은 것이 더 많고, 노련함보다 솔직함으로 승부하는 ‘젊은 남자’의 이미지가 그의 것이다.
어느 햇볕 좋은 가을날 우연히 옛 연인 선희(정유미)와 재회한 <우리 선희>의 문수는 일견 <옥희의 영화> 속 진구의 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보고 싶었던 전 여자친구에게 끝내 이별의 이유를 듣지 못하고, 좋아했던 선배가 냉담하게 대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저마다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우리 선희>의 인물들 중에서 문수는 솔직하고 용감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며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지만, 그의 시도는 번번이 “나중에 얘기해줄게”라는 말에 가로막혀 좌절되고 미끄러진다. 귀엽고도 애처로운 문수의 모습을 보며 <첩첩산중>의 명우와 <옥희의 영화>의 진구를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 같다. “모두 (정)유미와 함께 출연한 작품인데, 이름만 바뀌었지 둘 사이의 관계는 거의 똑같은 것 같다. 이번 영화에선 (정)재영이 형과 유미의 키스 신이 나오는데 그걸 보며 기분이 나빠지더라. (웃음) 난 늘 유미를 쫓아다니기만 했는데.” 그래서 이선균은 <우리 선희>의 문수를 연기하며 현장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투정 섞인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단다. “감독님, 저 유미 그만 쫓아다닐래요. 이제 학생 역할도 그만하면 안될까요.” “알았다, 앞으로는 너의 다른 결을 찾아줄게.”(홍상수 감독) 그런데 이 대화에서마저도 귀엽고 거침없는 문수의 모습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이선균이 <우리 선희>의 출연 제안을 받은 건, 드라마 <골든타임>을 마치고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골든타임>은 유독 몸과 마음이 힘든 작품이었다. 촬영하면서 불면증에 걸릴 정도였으니까. 그 작품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홍 감독님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사실 감독님을 만나는 자리에 거절하려고 나갔었다. 하지만 회차도 많지 않았고(그는 <우리 선희>에 3회차 출연했다) 홍 감독님의 영화는 참여하고 나면 늘 즐거운 작업이 되기 때문에 결국 참여할 수밖에 없겠더라.” 이선균은 <우리 선희> 현장에 “놀러가는” 기분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곡해해선 안된다. “대본도, 준비 과정도 있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짧은 시간 안에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더불어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에너지와 극의 흐름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배우 이선균이 ‘노는’ 방식이다. 그 놀이 과정에는 언제나처럼 우연이 빚어낸 아름다운 순간도 포함되어 있다. “끝까지 파고, 파고, 파고 들어봐야 뭐가 중요한지 아는 거잖아요.” 최 교수(김상중)가 선희에게 말했고, 선희가 문수에게 전한 말을 자신의 것처럼 선배 재학(정재영)에게 얘기하는 문수의 모습은 15분간의 롱테이크 촬영 과정에서 “잠시 대사를 잊어버려 NG를 낼 위기에 처했지만” 배우 정재영과의 호흡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이선균이 만들어낸, <우리 선희>의 인상적인 순간이다.
이선균은 지난해 가을에 촬영한 <우리 선희> 이후, 10년 만에 출연한 연극 <러브 러브 러브> 이외엔 다른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동안 매년 두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하며 쉴새없이 달려왔던 그에게도 잠시 숨고르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조만간 촬영을 시작할 영화 <무덤까지 간다>에서 위기에 처한 형사 건수를 연기할 이선균은 길지 않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신발끈을 질끈 동여매는 중이다. 그의 말대로 “일하면서 노는 게”, 이선균의 스타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