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선언했다. 1978년 <미래소년 코난>으로 감독 데뷔한 이래 장장 35년간 일본 애니메이션의 살아 있는 신화로 군림한 감독이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자신의 전설에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벌써 세 번째 은퇴 선언이지만 앞서 두 차례와 달리 이번엔 지난 9월1일 베니스영화제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했고 6일 일본에서 정식 기자회견도 가질 예정이다. 슬프지만 진짜 이별인가 보다. 이젠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바람이 분다>의 논란을 뒤로한 채 거장은 날개를 접었다. 그의 마지막 비행은 정치적 논란을 남긴 채 끝나고 말 것인가. 그는 왜 <바람이 분다>를 마지막으로 선택했을까. <바람이 분다>에 드리워진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자를 되짚으며 그를 추억해본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를 두고 유독 아쉬움의 목소리가 큰 것은 결과적으로 <바람이 분다>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의 작품 중 가장 논란을 일으킨 작품으로 기억될 <바람이 분다>는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그간 쌓아올린 미야자키의 신화에 균열을 남기고 있는 중이다. 일본 우익들은 일장기를 단 전투기들이 추락하는 장면이나 작품 속 직접적인 전쟁 반대의 대사들을 두고 미야자키 감독이 외국의 눈치를 보며 인기에 영합했다고 비난한다. 동시에 반대편에서는 군국주의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전투기 제로센[零式]을 만든 호리코시 지로를 지나치게 미화했다며 거장의 역사 인식을 아쉬워한다.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 감성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감독은 “단지 그 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 죄를 안고 살아야 하는 건 잔인한 일”이라며 편견을 버려줄 것을 당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실존인물을 소재로 선택한 시점에서 이미 논란은 예정되어 있었다. 미야자키는 왜 하필 호리코시 지로란 문제적 인물을 자신의 마지막 작품 속으로 초대한 것일까.
이 작품은 분명 그의 마지막으로 선택되었다. 일각에서는 영화 공개 뒤 정치적 부담감에 피로를 느낀 미야자키 하야오가 어쩔 수 없이 은퇴라는 강수를 둔 것이 아닌지 추측한다. 하지만 여론에 떠밀린 즉흥적인 판단으로 보기엔 <바람이 분다>가 취하고 있는 모순적 태도를 쉬이 납득하기 힘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람이 분다> 역시 사람과 사랑, 그리고 꿈을 담아낸 전형적인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틀 안에 있다. 하지만 굳이 2차대전에 일조한 사람(비록 적극적 동조가 아니며 결과론이라 할지라도)을 그 대상으로 삼는 순간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진다. <바람이 분다>를 비난하는 일각에서는 이 점을 지적하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판타지의 세계로 도피했다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자. <바람이 분다>는 이같은 자기모순에서 출발하기에 가치있는 영화다.
<바람이 분다>는 그간 선보였던 미야자키 월드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다른 작품에 비해 빼어나다거나 미야자키 감독의 일관된 주제 의식이 결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순히 작품이 미치는 파급력, 관객의 감정이입과 동기부여 차원에서 볼 땐 그의 필모그래피 중 범작을 벗어나진 못한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에는 그 이상의 울렁임, 일견 광신이라 부를 만한 격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격정, 이 에너지는 내부적 모순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바람이 분다>는 자연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닮았다. 정치적 논란에서 한 발짝 벗어나 바라보면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대기가 아닌가 싶을 만큼 그의 여정과 겹쳐 있다. 다만 그것이 작품 속 메시지로 직접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호리코시 지로라는 인물을 대하는 태도, 그를 구성하는 형식을 통해 묻어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직 아름답다
영화 속 호리코시 지로는 옆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좀처럼 상대의 눈을 보지 않는다. 밥을 먹을 때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의 시선은 언제나 책을 향해 있다. 정확히는 책 너머 꿈이란 이름의 미래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쩌면 현실에 맺혀 있지 않은 초점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가 왜 하늘을 날고 싶은지, 비행기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하늘이 거기 있고 그는 비행기를 띄우고 싶다. 그게 전부다. 이기심이라 불러 마땅한 이 순수한 욕심은 당위의 영역에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고 오직 그것만을 향해 매진했을 때에야 겨우 성취된다. 그만큼 무모한 꿈이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작품은 꿈을 좇는 한 사람의 뒷모습에 관한 영화다.
호리코시 지로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온몸을 불태운다. 아내가 아파도 사상범으로 오해받아도 지진이 일어나도 기계처럼 설계와 계산을 멈추지 않는다. 하늘을 동경하는 호리코시 지로에겐 꿈 이외에는 모두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래서 순수하다. 달리 말하자면 무지하다. 이것은 미야자키가 오랜 시간 고민해온 삶의 태도, 혹은 미의식에 대한 대답처럼 보인다. <바람이 분다>를 향한 비판의 대부분은 이 영화가 시대의 아픔을 읽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분명 “파시스트로 살 바엔 돼지가 되는 게 낫다”며 결기에 찬 선택을 감행했던 <붉은 돼지>에 비해 이 영화의 태도는 미온적이다. 아니 선택 자체에서 시선을 돌린다. 호리코시 지로를 둘러싼 환경은 전쟁 중임에도 언제나 유복하다. 한국인을 강제노동시키며 무기를 생산하는 기업 미쓰비시는 마치 꿈을 좇는 대학 동아리처럼 그려져 있고, 호리코시 지로는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에서는 자유로워 보인다. 때문에 관점에 따라선 호리코시 지로가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이 어떤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전혀 보지 못하는 몰역사적인 인물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분명 일정 부분 그런 면이 있다. 만약 <바람이 분다>가 당시 일본의 어떤 지점을 미화하고 있다면 역사적 책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꿈에 몰두하여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 철저히 개인적 차원으로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노골적으로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려 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바람이 분다>는 역대 지브리 영화 중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영화다. 지로는 무언가에 빠지는 순간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신한다. 그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나눠져 있는 듯하다. 사랑하는 여인은 아름답다. 창공을 나는 비행기는 아름답다. 바람을 잘 받도록 휘어져 있는 곡선은 아름답다. 비행기 프레임을 떠올리는 생선의 가시뼈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죄의식, 책임감, 시대의 아픔을 아름답다는 말로 치환해버리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수시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호리코시 지로 역시 현실의 아픔을, 당시 일본의 상황을, 배고픔을 모르는 인물이 아니다. 관동대지진 한복판에서 사람을 구할 만큼 인간애를 지니고도 있다. 다만 그는 꿈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만큼 용감한 인물이다. 시대의 모순을 알면서, 일본이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 자신의 연구가 전쟁에 활용될 것을 알면서 멈출 수 없는 열정에 몸을 던진다.
그는 여기에 대해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최후의 순간 제로센의 탄생을 지켜본 그가 꿈속에서 자신의 우상 지아니 카프로니와 문답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는 “우리의 꿈의 장소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는 그의 말에 “이곳이 지옥”이라 화답한다. 카프로니 역시 “비슷한 거지”라며 자조한다. 여기서 지워지는 것은 역사의식이나 시대정신이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선택의 문제다. 그는 아름다운 것들을 위해 상대적으로 덜 아름다운 것들을 포기한 배덕자다. 그렇다. 여기엔 배덕자라고 불려도 상관없다는 결기가 자리한다. 자신의 이기심, 욕망을 직시하고 어떤 비난과 도덕적 대의명분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는 늘 그래왔다. 그가 즐겨했던 말처럼 “마음의 갈증이 뜻을 이루게 한다”.
‘아름답다’는 말은 알다[知], 안다[抱], 연대한다[私]는 의미를 품고 있다. 나를 알고 상대를 인정하며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참모습이다. 미야자키는 젊은 시절 비행기 군수공장 공장장이었던 아버지께 “왜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앙금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전쟁을 이용해 돈을 버는 아버지를 아들로서 이해할 수 없어, 일일이 어린 생각으로 맞서왔지만 이 나이라면 솔직한 마음으로 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후회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의 문제는 그저 부모의 문제라고 간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도 어리석었지만 아이도 어리석었다.” 미야자키의 세계는 서로의 타고난 모양을 인정하고 품어주는 아나키즘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가 파시즘을 혐오하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선택을 제한하기 때문이지 거창한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리 짓고 목적을 설정하는 자들은 부패한다.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난 것은 선악이 없는 균형 감각,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여유, 그리고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 태도다. <바람이 분다>는 그것을 극단적으로 실행한다. 하늘과 비행기라는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의 꿈에 빗대어서 말이다.
오직 꿈속에서만 자유롭다
호리코시 지로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의 속마음은 꿈속에서 종종 드러날 뿐 여동생의 투정처럼 일상생활에서는 무뚝뚝하고 주위를 살피지 못한다. 그가 수다스러워지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 이탈리아의 비행기 설계사 지아니 카프로니를 만나는 순간뿐이다. 그는 오직 꿈속에서만 자유롭다. 스스로 정당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희생된 것들이 무엇인지, 그 가치를 알고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의 꿈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오직 꿈속에서만 자유롭다. 호리코시 지로가 잠시 쉬러 간 별장,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진 듯한 그곳에서 그는 잠시 안식을 허락받는다. 그곳에서 나호코를 재회한다는 것은 사랑마저 비행이란 목표에 비하자면 한순간의 꿈결이라는 의미와 진배없다. 호텔에서 만난 독일인 카스트로프는 소설 <마의 산>을 계속 이야기한다. 카스트로프라는 이름 자체가 <마의 산>의 주인공 아닌가. 지로에겐 다른 이들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이 꿈이고 비행기를 만든다는 꿈이 현실인 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다를 바 없다. 그는 3D애니메이션이 대세가 된 지금도 어린 시절의 꿈을 좇아 2D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든다. 이는 사실 ‘지브리’라는 이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브리를 제외하곤 오늘날 일본 영화계에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고집한다는 건 그야말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그것도 2D의 질감으로 꿋꿋이 만들어왔다. 어떤 의미에서 ‘지브리’ 자체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꾸는 꿈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꿈과 연결되어 그의 꿈을 통해 그 시절의 향수, 그리움, 포근함을 맛보고 있다. 그리고 이제 꿈은 끝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바람이 분다> 제작발표회에서 “판타지를 만들기 어려운 시대에 와 있고, 그래서 판타지가 아닌 현실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그의 마지막 작품은 그 어떤 영화보다 판타지적이다. 호리코시 지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미처 꾸지 못했던 꿈이자 자신의 삶을 비춘 거울이며, 아직까지 꿈꿀 수 있는 인간들을 위한 아름답고 잔혹한 변명이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 왔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단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