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이후 1년 반이 지났다. 그간 TV에서는 다른 많은 화제작이 생산됐고 우리는 열광했다. 하지만 시청자에게 ‘시트콤’을 학습시킨 주인공,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의 분위기를 대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는 시청자들에게 늘 초조한 기다림을 종용하는 유일한 이름의 연출자다. 그런 김병욱 감독이 귀환했다. 지난 9월23일 방송 시작, 총 120회 예정, 매주 4회 밤 9시15분에 방송되는 시트콤 <감자별 2013QR3>(이하 <감자별>)은 앞으로 6개월 동안 우리를 웃고 울려줄 태세로 초반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SF 장르를 틀로 하여, 드라마는 한층 강화되고 시트콤의 형식은 더 많이 해체된, 또 다른 변주의 시트콤이다. 스튜디오 촬영, 대본 회의, 집필 과정이라는 빡빡한 일주일 일정 속에서 자그마한 짬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무턱대고 그러나 조심스럽게 한나절을 공개해달라고 여러 번 청했고, 바람은 드디어 이뤄졌다. <감자별>의 촬영이 한창인 파주 스튜디오의 문이 그렇게 열렸다.
10월12일 오전, 촬영은 이미 새벽 6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야외촬영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촬영이 파주 교하읍의 이 세트에서 이뤄진다. 배우와 스탭들 모두 일주일에 꼬박 이틀 정도는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보면 된다. 세트장 근처 어딘가에서 체육대회가 열린 모양이다. 소음으로 인해 이따금 촬영이 멈춰서고, 그때마다 어두컴컴한 촬영장 안에는 사뭇 심각한 기운이 감돈다.
미지의 소행성 감자별의 충돌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온 진아가 술에 취해 잠든 엄마(오영실)를 세차게 흔들어 깨운다. “엄마! 엄마! 우리 다 죽어! 엄마!” 놀란 엄마의 첫마디는 “왜 전쟁 났어?”다. 곧바로 뉴스속보를 확인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엄마를 끌어안은 진아가 대성통곡하는 장면. 김병욱 감독이 진아가 엄마의 멱살을 어느 정도 세차게 잡아야 하는지 꼼꼼하게 알려준다. “죽기 직전이라고 생각하고, 대사도 급하게 해. 마지막 죽기 전에 엄마를 한번 안아보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과격하게. 옷이 찢어져도 할 수 없지.” 딸이 몇년간 패스트푸드점에서 뼈빠지게 아르바이트해 애써 모은 적금 1천만원을 다단계 회사에 홀라당 갖다 바친 엄마의 발밑으로 빈 소주병이 나뒹군다. 6개월간 월급 한푼 못 받는 조건으로 취직한 인턴사원 진아는 곧 이 허름한 집마저도 비워줘야 하는 상황이다. ‘차라리 내일 지구가 멸망했으면!’ 하는 진아의 바람을 하늘이 듣기라도 한 듯, 그 시각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한다. 종말의 암울한 기운 속, 온 힘을 다해 절규해야 하는 연기. 하연수가 김병욱 감독의 꼼꼼한 디렉팅에 충실하게, 격하게 옷깃을 잡은 바람에 오영실의 목에는 테이크의 숫자만큼 빨간 손톱자국이 남겨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곳은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 <감자별> 촬영현장이고, 세상 다 끝날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되는 이 촬영은 총 120화의 에피소드 중 초반에 불과한 9화의 한 장면이다.
8회 방송분에서 지구는 이미 한번 흔들렸다. 재난속보에 서울 도심 속 사람들은 우왕좌왕 피난할 곳을 찾느라 바빴고, 재벌 2세 민혁은 떨어지는 구조물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흥건히 흘리고 쓰러졌다. 올여름 개봉한 지구 종말 SF블록버스터 트렌드를 십분 반영한 듯, <감자별>에는 영화 <애프터 어스>같이 지구 멸망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익히 보았던 전형적인 아비규환의 상황이 고스란히 재현됐고, 그 여파로 시트콤이 웃음을 잃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20부작 시트콤의 포문치고는 처연하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니 어째 좀 잠잠하다 싶었다. 바로 전작인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결말은 그런대로 큰 사고 없이, 인물들에게 즐거운 안녕을 고할 수 있었고 덕분에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부터 <지붕 뚫고 하이킥!>을 이어 관통하던 어둠의 결말이 주었던 트라우마도 어느 정도 치유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근 1년 반 만에 다시 돌아온 김병욱 감독은, 역시나 변하지 않았다. 암과 교통사고로도 미진했는지 <감자별>은 다시, 인생은 그렇게 우리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소행성까지 동원해서 전 우주적으로 설파하고 나설 셈인 것 같다.
출생의 비밀+삼각관계, 대체 어쩔 셈?
<감자별>은 김병욱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서사가 강렬한 작품이다. 콩콩주식회사의 창업주 노수동 가족으로는 아내 왕유정(금보라), 아버지 노송(이순재), 큰딸 노보영, 아들 노민혁, 작은딸 노수영(서예지)이 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리다 이 회사의 인턴사원이 된 하연수는 엄마와 단둘이 재개발 지역에서 사는데, 사실 죽은 진아의 아버지는 노수동의 친구이자, 콩콩주식회사를 번창하게 만든 ‘스카이콩콩’의 개발자이지만 왜 현재 노수동은 부자가 되었고 진아네 집은 가난을 면치 못하는지 그 내막은 아직 알 수 없다. 이 두 가족을 연결시키는 끈은, 진아에게는 ‘홍버그’(마크 저커버그에서 따온 이름)로 불리는 정체불명의 사내 혜성(여진구)이다. 갈 곳이 없는 그는 지금 진아네 옆집에 살며 진아네 화장실을 같이 나눠 쓰는 이웃사촌이지만, 그는 어릴 때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된 노수동의 잃어버린 아들임이 분명해 보인다. 출생의 비밀을 전제로 하고, 빈부의 계급차가 끼어들며, 멜로 삼각구도까지 총망라된다. 하늘 아래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일일드라마적인 스토리를 대놓고 떡하니 차용한다.
‘도대체 어쩔 셈으로?’에 대한 대답의 키워드는 지구 종말이라는 소행성의 접근이다. 소행성이 지구로 향해 돌진하는 CG장면은 느닷없고 맥락 없이 시시각각 끊이지 않고 드라마 사이사이에 삽입되는데, 시아버지 노송과 며느리가 격하게 말싸움을 하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다가온다. 작은 암덩어리가 한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고, 차 사고가 여러 명을 죽일 수도 있다면, 소행성은 단 한번에 전 지구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메가톤급 치명상이다. ‘위기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삶의 우연성을 전달해주는 암과 교통사고에서 확장된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러니 예고 없이 다가오는 행성의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SF블록버스터영화의 CG장면과는 애초 상대도 안될 조악한 CG 효과임에도 괜히 숙연해지는 마음을 누를 길 없다. 이 정도면 시트콤적인 상황에 빠져들려는 찰나, 웃음을 싹 거두어들이는 매몰찬 효과다. 김병욱 감독은 1화부터 6화까지 의도적으로 웃음이나 장면을 전환할 사운드 효과를 전면 배제하며 시트콤의 외형적 변화를 시도하고 나섰다. 일단 따라 웃고 볼 수 있는 웃음 가이드라인을 모두 제거하고 정면승부하겠다는 다짐처럼 읽히는데, 이거 웃어도 되나 혹은 나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자기 점검에 빠지게 된다는 부작용도 없지 않다.
물론 <감자별>의 인물들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듯 꾸준히 자신만의 삶을 전개한다. 그들 대부분은 닥쳐올 종말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며, 그 덕분에 매분, 매초 절망의 그늘에 갇혀 지내지 않는다. 종말은 다가오지만 막상 실감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다. 그 안에서 <감자별>의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감자별>의 주인공들은 세대별, 빈부격차별, 남녀별로 구분지어진 기존 김병욱 시트콤 캐릭터들의 자장 안에서 반복, 변주돼 생산된 캐릭터들이다. 홍상수 감독의 인물들처럼, 김병욱 감독의 인물들도 그들만의 계보도를 지니고 있다.
<감자별>은 <하이킥> 시리즈와 기존 <순풍산부인과> <똑바로 살아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중 어느 하나를 물러서게 하고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다. 조부모와 손자, 손녀로 형성된 삼대의 구성은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제외하고는 이전까지 김병욱 시트콤에서 이어져오던 가족구성원이 그대로 재현된 구조다. 구성원이 워낙 다종다양하고, 이들이 각자 대립각과 갈등구조를 형성한다는 게 웃음의 주요 코드다. 삼대 안에서 세대 차이는 노송이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대변되며, 유명 연예인 집안, 의사 집안 등이 재벌가로 바뀌었을 뿐 부유한 계층과 IMF, 사업 실패, 구직난 등으로 가난을 등에 업은 계층의 갈등과 대립 또한 여전히 그려진다. 회사에서는 신사고와 파격적 경영으로 구습을 타파하려는 재벌 2세의 진보적인 경영방식과 세습 경영을 못마땅해하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구경영진간의 알력 다툼이 ‘유치하게’ 전개된다. 하버드 출신의 엘리트 재벌 2세가 펼치는 학벌 최고주의는 스펙이 달리는 고졸 인턴사원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에피소드를 만든다. 다행인지 아닌 건지, “하버드 이하는 대학을 나오건 고등학교를 나오건 도진 개진”이라는 주의 덕에 고졸 진아도 인턴의 기회를 얻었으니, 극단적인 엘리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는 진보로 통용될 수도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너는 불안하고 나는 살아간다
총 120화, 주 4회, 밤 9시15분 방송. 주연배우인 하연수의 발목 부상으로 한시적으로 주 2회로 편성된 <감자별>은 이제 정상궤도에 진입한다. 이번주는 다가오는 행성에 압도된 혜성과 진아가 자신들도 모르게 끌리듯 키스를 하면서 끝났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멜로 모드인 여진구의 키스 신은 <감자별>의 최대 화제로 떠올랐다. 아뿔싸! 그러고보니 이 시트콤의 진짜 심각성은 소행성의 충돌이 아니라 그들이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오현경처럼 글로만 배운 시트콤적인 키스가 아니라 그들은 시작부터 실전인 멜로드라마의 진지 모드로 적극 진입한다.
시트콤의 인물들이 전달하는 시청자와의 밀착도는 시청률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상상을 초월한다. 주 4회 동안 일거수일투족, 즉 식습관, 통장 잔고, 심지어 화장실 문제까지 시시콜콜 엿보게 되는 시청자에게 시트콤의 인물들은 적어도 몇 개월만큼은 남이 아닌 것이다. 노수동 일가, 진아네, 혜성까지 막 캐릭터 점검을 끝낸 1단계에서, 김병욱 감독은 그런 시트콤적인 지구를 뒤흔들었다. 행성이 비껴갈지 그대로 충돌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 불안을 안고 <감자별>을 ‘재밌게’ 볼 것이고, 더불어 인물들과 친밀감을 나눌수록 그 불안도 한층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