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촬영을 보니 소행성의 충돌 위험으로부터 혼란에 빠진 인간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확연한 SF 장르다.
=종말 이야기와 주말극의 막장 요소를 가지고 와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잘 조화가 되어야 하는데 못할까봐 걱정스러운 면도 있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에피소드 중에 ‘인생은 참 불가측하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결국 그게 내가 가진 세계관이라면 세계관이다. 원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지름이 400km 이상 되는 것들은 울퉁불퉁하다고 하더라. ‘감자별’이라는 이름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형태가 삶에 대한 메타포가 될 수 있다. 삶을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혼란 같은 걸 표현하고 싶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가 떠올랐다. 소행성과 지구의 충돌을 앞둔 가운데 한 개인의 우울증을 다룬 것처럼 <감자별>의 인물들도 비슷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멜랑콜리아>는 결국은 우울증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 시각이 좋더라. 행성이 다가오는 이야기면 전부 재난 이야기일 텐데 이 영화는 재난 이야기가 아니어서 좋았다. <감자별 >은 코미디지만, 영향이 없지 않았다. 우린 그런 이야기를 좀 코믹하게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기자회견에서는 “이번엔 웃기는 것만큼은 자신 있다”고 장담했다. 전작인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 코믹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대한 응수 같기도 하더라.
=그렇게 말하면 안됐는데 약간 오버한 거다. (웃음) 어떤 기자분이 4회까지 보고 전화를 해서는 “감독님! 재밌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여전히 심각해요”라고 하더라. 반응 듣고 충격 받았다. 나름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영 다르더라. 4화에서 김정민이 딴 여자와 아침 운동하러 나온 거 들킬까봐 한강에 뛰어들어서 물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게, 작지만 내가 생각하는 코미디다. 사람들은 이걸 서사로만 생각하니까, 불륜을 저지르다 도망가는 게 한두개야? 라고 한다. 난 같은 불륜이지만 어떻게 다르게 갈까를 생각하고 세부적인 걸 다르게 해야 한다고 본다. <개그콘서트>의 개그도 다음주엔 변주가 되는 것처럼, 나도 여태까지 해온 것에 변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애초에 종말론이 저변에 깔려 있으니, 작품 속 인물들처럼 시청자도 좀 불안한 게 아닐까 싶다.
=앞서 내가 만든 작품들이 있으니 시청자가 뭘 해도 편하게 잘 못 보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마음을 열까가 그래서 고민이다. 그런데 난 그 불안함이 코미디 요소라고 생각하고, 이런 걸 즐겨보면 어떤가 제시를 하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옛날에 비하면 소수인 것 같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 이 생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이다 보니 조금 편하다. 일단 공중파라면 시청률 두 자리 수가 안 나오면 곤란하다.
-김병욱표 시트콤은 케이블의 비주류적 감성과는 다른 노선을 취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tvN 방송을 하게 된 건 지금의 케이블이 주류의 감성을 가지게 된 건가, 아니면 케이블의 비주류적 감성을 허용하게 된 건가.
=예전에 마이너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 메이저가 된 게 많다. 지금은 장르드라마들이 자리를 잡는 시대다. 세분화되고 디테일화되고 발전했다. 예전에 함께 작업했던 김은희 작가가 쓴 <유령>만 보더라도 굉장히 리서치가 꼼꼼하다. 치열한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런 인재들이 드라마의 진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그런 데 비해 우리 작품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고 자아비판하게 된다.
-16부작 드라마도 1회에 성패가 판가름나는 시대다. 120부와 그 속에 담긴 다종다양한 캐릭터를 활용하자면 최소한의 워밍업이 필요할 텐데, 요즘 시청자의 인내심에 대비하자면 워밍업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120화라는 덩치가 산만 한 드라마의 초반 싸움이 후반의 맺음보다 더 큰 관건이다.
=예전 기준으로 보면 시트콤은 배우가 15명이면 15명이 다 흥하는 장르다. 초반에 부각이 안돼도 100부 지나면 잘됐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한두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붙어서 해도 될까 말까인데 사소하게 다뤄서는 흥할 수가 없다. 다른 드라마들이 거의 2년씩 준비해서 나오는 콘텐츠인데, 매일매일 대본 쓰고 작업해서 그런 드라마와 경쟁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사실 2005년을 기점으로 흥한 시트콤이 하나도 없다. 그동안은 나도 테크닉으로 버틴 거다. 이런 시스템이 계속 지속되는 게 가능한 일은 아니지 싶다. 그런 비애가 있는 거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청춘구도에서 벗어나 이번엔 다시 조부와 손자가 포함된 3대 가족 구성이다. 전작에선 3대 가족이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져 작위적인 것 같아서 변화를 줬다고 했는데, ‘김병욱 시트콤’에서는 3대 구성이야말로 완벽한 가족이 아닐까 싶다. 빠지면 결핍 같고 그래서 전작의 재미가 반감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잘하는 걸 하려고 돌아온 거다. (웃음) <응답하라 1997> 같은 청춘물은 역시 청춘물의 솔이 있어야 한다고 봤다. 난 그런 자격은 없다. 수많은 가족 중 한 구성원으로 청춘을 다룰 수는 있지만 본격적으로는 안된다. 어느 날 보니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내가 다루는 건 50대 아저씨가 다루는 여고생이더라. 내가 재밌다고 해도 그 시대를 절절하게 살았거나 그걸 공감하는 사람이 쓰는 것과는 다르다. 20대가 보면 확실히 그걸 눈치챈다. 20대 배우를 내세워서 막연히 어설프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무모하다고 생각했다.
-<하이킥> 시리즈를 통해 IMF 시대의 실직가장, 88만원 세대의 고뇌를 중산층과의 대립각으로 전개시켰다면 이번엔 재개발 철거 지역 주민과 부정부패가 집결된 80년대를 배경으로 부동산 투기, 뇌물로 부를 축적한 재벌가를 대립시킨다.
=이들이 재벌이 된 과정이 단순히 운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려 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성실하게 일한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물론 재벌을 다룬 드라마들도 많고, 역시 그들이 훌륭한 방법으로 재벌이 됐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지점을 코미디로 만들려고 한다. 노수동은 제 의지 하나 없이 부자가 됐는데, 지나고 나면 미담으로 남는다. 우리 집이 옛날부터 근면성실해서 부자가 됐다, 이런 식으로. 여기 부동산 투기, 뇌물수수 등이 다 얽혀 있다. 우린 그걸 희화화하려고 한다.
-진아(하연수)의 중요성이 여기서 대두된다. 실질적으로 회사 설립의 일등공신인 자신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내쳐졌을 거고, 보상은 1년에 한번씩 보내지는 쌀가마니밖에 없다. 2세가 자라 회사 경영권을 쟁취하는 복수 구도도 생각해보게 된다.
=복수까지 가고 그 감정이 너무 첨예해지면 어느 지점에서 코미디를 잘 못 만들게 될 수가 있다. 너무 치닫다가는 편하게 웃지 못하는 드라마가 될 수 있으니 지금은 어느 지점에서 끊어버렸다. 물론 끊기도 전에 사람들은 좀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뒤는 좀 완화해서 가려고 한다.
-이름도, 나이도, 출생도, 그 어느 것도 자기 스스로 밝히지 않는 혜성의 존재가 결국 출생의 비밀, 미스터리한 부분에 대한 키를 쥐고 있는 핵심 캐릭터로 활약할 텐데.
=그건 그렇다. 사실 난 이 시트콤이 완벽하려면 120부작이 아니라 40부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작을 하다보면 17부를 쓰다가, 아차! 8회에 이렇게 써야 했는데 하면서도 할 수 없이 그냥 가는 경우가 있다. 완벽하게 써놓고 가면 좋은데 그렇지 못해 생기는 문제다. 그런데 혜성이만은 그런 완결성이 통하는 캐릭터다. 혜성은 이 이야기 속에서 철저하게 타자로 다루어진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오지도 않고, 오직 진아가 추측하는 혜성만 존재한다. 혜성은 한번도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다.
-싸느냐 못 싸느냐의 문제가 이전 시트콤을 관통하는 화두였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꼬마 해리(진지희)의 변비 문제처럼 이번에도 배설의 문제가 첫회부터 끊임없이 대두된다. 노수동은 소변에 곤란을 겪는 전립선비대증을 앓고 있고, 혜성은 너무 잘 싸서 그게 웃음의 코드가 된다.
=사람들은 왜 똥! 똥! 그러느냐고 하는데, 난 그게 즐겁다. 지엽적인 아이템으로 이야기한다면 혜성과 진아는 똥으로 맺어진 연인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회 때 행성이 오고 지구가 멸망될 위기에 처하자 혜성과 진아가 키스를 하는데, 혜성이 다음날 키스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니까 진아도 그걸 되받아치려고 한다. 옆집의 혜성이 똥을 싸러 매일 자기 집에 왔는데 갑자기 안 오니까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거다. ‘자연스럽게 배에 똥이 찰 때까지 진득이 기다리자’ 했다가도 ‘행성의 충돌을 앞둔 이런 혼란의 시대에 나는 어떤 놈이 똥을 싸러 오는지 고민하고 있나’ 하는 자기 회의에도 빠진다. 똥과 사랑, 자존심, 이런 게 결부되는데 이런 게 언밸런스하고 코믹하다고 생각한다. 난 그 자체가 거대한 블랙코미디이고, 그게 내 시트콤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일일드라마의 멜로 구도가 초반부터 확립됐다. 부와 외모를 가진 재벌 2세 노민혁과 출생의 비밀을 가진 혜성, 캔디형 여자 진아로 이루어진 삼각관계다. 하이킥의 청춘멜로와는 다른 통속 멜로다. 그런데 이들 모두 전형적 캐릭터에서 변형을 시도한다.
=원래 그런 생각으로 출발했다. 약간의 비틀기를 시도해보려는 게 있고 그게 재미다. 지나치게 시도하면 편하게 볼 수 없고 이도저도 아닌 게 된다. 난 작품을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한 30년 지나면 이런 드라마가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갈 거고 난 그 시대에 유행하는 상품을 파는 거다. 그렇다고 내 생각을 반영하는 게 아닌 건 아니니까 약간 모순되는 거다. 예전에는 내 생각과 디자인을 살짝살짝 넣어도 잘 팔렸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뭐야?’ 이렇게 돼버린다. 눈치를 금방 채더라. (웃음)
-오늘 너무 혹독한 자아비판이다.
=나의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지면에서만큼은 내가 느끼기에 어떤 문제가 있나, 어떤 걸 생각하나, 이런 인터뷰로 봐줬으면 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