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주연의 맛
2014-02-25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백종헌
영국 드라마 <셜록>의 셜록과 왓슨을 연기한 장민혁, 박영재 성우
셜록을 연기한 장민혁 성우, 왓슨 역의 박영재 성우(왼쪽부터).

“‘셜록’도 곧 도착한대요.” 인터뷰 장소인 KBS 본관 로비에 마중나온 박영재 성우가 말한다. 온화한 표정이며 체격, 옷차림이 영락없이 ‘왓슨’이다. 머지않아 영국 신사처럼 코트 깃을 빳빳하게 세운 장민혁 성우가 “왔어요” 하며 조용히 합류한다.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니 혹시 <셜록>의 한국판 더빙을 맡은 PD가 이들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캐스팅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화롭다. “우리가 참 잘 맞는다. 개인적인 취향도 비슷하고, 이야기도 잘 통하고, 평소 일하면서 어려운 점이나 수입도 공유한다.”(장민혁) 일부러 맞춰가야 하는 사이가 있고 처음부터 손발이 잘 맞는 사이가 있다면 <셜록>의 주연을 맡은 두 성우의 관계는 후자에 가까운 듯 보였다. 이들이 공유하는 비슷한 정서는 분명 셜록과 왓슨의 목소리 호흡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거다.

지난 2010년 방영을 시작한 <셜록>은 당시 KBS 전속 성우에서 갓 프리랜서가 된 ‘신인’이었던 장민혁과 박영재를 단숨에 스타 성우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전세계적으로 ‘셜록 신드롬’을 일으켰던 <BBC> 드라마의 후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셜록을 연기하는 장민혁 성우의 목소리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섹시한 저음과는 다른 젊고 활기찬 매력으로 다가왔고, 왓슨을 맡은 박영재 성우는 영국 배우 마틴 프리먼이 한국말을 하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캐릭터와 높은 싱크로율을 이뤄냈다. 그런 그들에게 <셜록>의 팬들은 장셜록과 박완순이란 별명도 붙여줬다. 일가친척과 학창 시절 친구는 물론이고, 라디오 시대의 주역이었던 선배 성우들에게까지 “잘 봤다”라는 연락을 받으며 두 성우는 <셜록>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다고.

6전7기, 7전8기의 노력

하지만 기대감이 큰 만큼 부담감도 배가 됐다. 첫 번째 시즌의 녹음을 앞두고는 <셜록> 더빙을 담당했던 현혜원 PD에게 전화도 받았다. “지금 인터넷에 <셜록> 더빙판 방영한다고 난리가 났다. 이제 막 프리랜서가 된 신인들에게 목소리 연기를 맡긴 것에 대한 중압감이 있으니 드라마 시사 열심히 하고 우리 잘해보자고 말씀하시더라.”(박영재) 특히 ‘보이스 포르노’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마성의 목소리를 지닌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었던 장민혁 성우는 밤잠을 설쳐야 했다. “밤에도 애들 재워두고 (드라마를) 보고 또 봤다. 거의 잠을 못 잘 정도였다. 나도 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가 많이 힘들었을 거다. 처음에는 셜록의 성격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 감이 잘 안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도 시즌1은 어색한 부분이 눈에 보여서 잘 못 보겠더라.”

시즌을 거듭하며 캐릭터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자 다행히 부담감도 줄었다. 특히 어마어마하게 긴 대사가 쏟아졌고 감정의 진폭도 컸던 <셜록> 시즌1, 2와 달리 비교적 소품 같은 느낌의 시즌3는 보다 편한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었다고 두 성우는 말한다. “시즌3에 참여하며 ‘내가 좀더 성장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안 되던 발음도 예전보다 더 잘되는 것 같더라. 왓슨과의 호흡도, 이제는 눈을 감고 있어도 영재 형이 이렇게 연기하겠구나 싶을 정도로 잘 맞는다.”(장민혁) 그렇다고 방심하는 건 절대 아니다. 주연배우의 연기 톤, 말의 속도, 감정상태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재해석하는 건 시즌1이나 시즌3나 마찬가지다. “시즌3에서 셜록이 ‘노프’(Nope, ‘아니’라는 뜻)라는 대사를 두번 한다. 컴버배치의 입모양이 ‘프’에서 멈추기 때문에 나도 ‘아니, 프’라고 연기했다. 그렇게 호흡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반영하는 게 중요하다.” 저음의 목소리를 연기하기 위해 녹음 전날 2시간 정도만 잠을 청하는 것도 장민혁 성우의 노하우다. 이처럼 다른 배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장민혁 성우가 목소리 구현에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반면, 박영재 성우는 “어떻게 왓슨을 연기해야 셜록이 돋보일지”에 대한 고민이 깊다. “주인공은 정해져 있는데, 다른 사람 목소리가 주인공으로 들리는 경우”를 피하기 위해서란다. 그의 말을 듣던 장민혁 성우가 “왓슨이 더 연기하기 힘들 것 같다”라며 웃는다. 이들의 말을 들으니 <셜록> 더빙의 인기 비결은 화려한 꽃 같은 장민혁의 연기와 캐릭터 사이의 강약을 조율하는 박영재의 섬세함이 멋진 조화를 이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영재와 장민혁은 KBS 성우 출신의 선후배 사이다. 박영재가 31기, 장민혁이 32기로, 한 기수 차이인 이들은 같은 시절 3년간 KBS 전속 성우로 활동하며 친분을 맺었다(최근의 KBS 출신 성우들은 입사 뒤 2년간 KBS 전속 성우로 활동한 뒤 프리랜서가 된다.-편집자). ‘성우’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 두 사람 모두 짧지 않은 길을 돌아왔다. 장민혁 성우의 대학 시절 전공은 소방안전관리. 취업에 유리하겠다는 생각에 지원한 학과였지만 마음을 다잡아보아도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때 불현듯 초등학생 시절의 꿈이었던 ‘성우’가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20대의 절반을 성우 시험 준비에 쏟아부었고, 고단했던 인디 성우(한국성우협회에 속하지 않은 성우들을 지칭하는 말.-편집자) 시절을 거쳐 6전7기 끝에 KBS에 입사했다. 박영재 성우는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그의 목소리를 눈여겨본 담임 선생님은 희곡 녹음을 그에게 맡겼다. 혼자서 목소리를 바꾸어가며 온갖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녹음했으니, 성우 조기교육을 제대로 한 셈이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방송인을 동경해온 그는, 28살의 이른 결혼으로 갑작스럽게 ‘가장’이 됐다. “당장 먹고살 게 없어서 온양에 옷가게를 차렸다. 나름 CEO였다. (웃음) 그런데 옷 장사에 집중을 못하겠더라. 가게를 하다가도,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서울에 올라가서 스터디를 하고 성우를 연기하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했다. 집사람이 ‘제발 이제 가게에 집중 좀 하라’고 말리는데도….” 시험에 일곱번 낙방하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응시했던 KBS 시험에 합격하면서 박영재는 소망하던 ‘방송인’ 그리고 ‘성우’가 됐다. “가게는… 합격과 동시에 함께 일하시던 분에게 넘기고, 난 ‘서울 갑니다’ 하고 올라왔다. (웃음)”

장셜록, 박완순의 활약은 보류?

<셜록>은 KBS 라디오 드라마의 단역, 크고 작은 외화•애니메이션의 ‘잔배역’을 맡아왔던 장민혁, 박영재 성우에게 ‘주연의 맛’을 만끽하게 해준 첫 작품이었다. 하지만 주연배우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들의 목소리 연기를 비판하는 일부 시청자의 항의가 두 성우를 심란하게 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장민혁 성우의 또 다른 출연작이자 완성도 높은 더빙으로 화제가 된 <겨울왕국>(크리스토프 역)과 <셜록>을 비교할 때가 가장 속상하다고.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단순 비교하는 건 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외화 더빙의 경우 이미 목소리까지 다 아는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다보니 애니메이션 더빙을 작업할 때보다 반대의 목소리가 큰 것 같다. 하지만 <셜록>은 유명한 작품치고 긍정적 반응이 컸던 드라마이다.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박영재) 아쉽게도 당분간 장셜록과 박완순의 활약은 보류다. <셜록> 시즌4가 제작은 확정했으나 방영 계획이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두 성우는 각자의 자리에서 더 다양한 도전을 해볼 참이다. 드라마 <푸른 거탑 리턴즈>의 중대장 역으로 출연하며 배우도 겸하고 있는 박영재 성우는 기회가 된다면 VJ프로그램도 맡아보고 싶단다. 장민혁 성우는 “어떤 분야의 성우이든 다 (경험)해보고 싶다”라며 “일도 다양하게 고루 들어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영재 성우가 한마디 한다. “이게 바로 안정적인 성우의 모습이지! (웃음)” 장민혁 성우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그런데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없잖아! (웃음)” 셜록과 왓슨처럼 주고받는 호흡이 일품인 그들의 재회를 더 빨리 목격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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