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성우들이 2000년대를 ‘한국 성우의 암흑기’라 부른다. 방송사들이 외화 더빙 대신 자막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스타 배우들이 애니메이션 더빙에 활발하게 참여하기 시작하며 성우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성우들은 더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을 시도하며 미래를 모색하고 있고, 그 이야기는 들어가는 글에서 이미 소개했다. 이 지면에선 한국 성우들이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과거의 순간과 작품들을 시대별로 소개한다.
1950~60년대-라디오 드라마 전성시대
엄밀히 말해 한국에서 ‘성우’라는 직업의 시초는 ‘변사’였다. 무성영화 시대, 각 극장들은 변사들과 전속 계약을 맺었고, 극장 간판에 내걸린 변사의 이름이 관객의 영화 관람 여부를 결정할 정도였으니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성영화 시대의 종말 이후 사라져버린 변사라는 직업과 달리 성우라는 전문 직업은 방송국 시대의 개막과 함께 본격적으로 그 존재감을 대중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라디오 드라마가 전 국민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1950~60년대를 주목할 만하다. 1956년 방송을 시작한 KBS 라디오 드라마 <청실 홍실>은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이자 연속 방송극의 시초로 평가되는 작품으로, 젊은 연인들의 사랑과 고뇌를 성우들의 목소리에 성공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로 성우인 고은정 선생의 채록문을 공개한 한국영상자료원에 따르면, 당대의 스타 배우들조차 <청실 홍실>의 성우 목소리를 모방해 말끝을 흐리며 연기할 정도였다고.
60년대는 그야말로 라디오 드라마의 황금기였다. KBS의 라디오 홈드라마 <즐거운 우리집>과 TBC의 아침 드라마 <아차부인, 재치부인>은 전 국민의 아침을 책임지는 인기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구민, 고은정, 이혜경, 유기현, 최응찬, 장유진 등의 스타 성우가 등장한 것도 이때다. 그들의 목소리에 반해 성우에게 팬레터를 쓰거나, 직접 만남을 청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1970~80년대-외화 더빙 전성시대
인기 외화를 소개하는 <주말의 명화> 등의 프로그램과 각 방송사들이 수입해온 미국 드라마들이 인기를 끌었던 1970, 80년대는 그야말로 성우들이 가장 빛났던 시대다. 외국 배우의 목소리보다 성우의 목소리로 친숙하게 기억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소머즈 <600만불의 사나이>에서 스티브 오스틴과 함께 활약하던 ‘바이오닉 우먼’이 바로 소머즈다. ‘청력’이 무기인 그녀는 드라마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에 힘입어 자기만의 이야기를 얻었다. <600만불의 사나이>와 더불어 <소머즈>에서 제이미 소머즈를 연기한 건 주희 성우다. <말괄량이 삐삐>의 ‘삐삐’로도 유명한 그녀는 ‘공주과’와는 거리가 먼, 활동적이고 주도적인 여성의 목소리를 주로 연기했다. 쥐를 잡아먹는 장면으로 유명했던 <V>의 외계인 다이애나도 그녀의 목소리로 구현됐다.
맥가이버 맥가이버 머리와 스위스 만능칼을 전국적으로 유행시켰던 당대 최고의 인기 드라마. 첩보원 맥가이버가 주인공이다. 각종 무기로 무장한 적들과 달리 만능칼 하나와 주먹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그의 개성은 당대의 수많은 첩보 캐릭터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특히 배한성 성우의 “우리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지…”라는 대사는, 한국 더빙 버전에서만 볼 수 있는 명대사였다. 60년대 라디오 드라마 시절부터 스타 성우로 활약해온 배한성은, 목소리 연기폭이 넓어 ‘천의 목소리’를 가진 성우로 불린다. <형사 콜롬보>의 코맹맹이 목소리와 <컴퓨터 형사 가제트>의 얇고 기묘한 목소리, 액션 히어로 이소룡과 성룡의 목소리가 모두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다.
6백만불의 사나이 액션 장면에서 흐르는 ‘뚜뚜뚜뚜’ 효과음이 인상적이었던 인기 드라마. 우주에서 사고로 두 다리와 한팔,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은 뒤 ‘바이오닉 인간’으로 거듭난 스티브 오스틴이 주인공이다. 양지운 성우는 과학의 힘을 빌려 완벽한 육체를 얻었기에 자신감 넘치고 거침없는 스티브 오스틴 특유의 여유만만한 목소리를 매력적으로 표현해냈다. 더불어 양지운 성우는 멜 깁슨(<리쎌 웨폰> 시리즈), 해리슨 포드(<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로버트 드 니로(<대부2>) 등의 목소리 연기를 도맡기도. 활동적이고 거친 남성적 매력을 풍기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구현해내는 게 그의 장기다.
1990년대-애니메이션 더빙 전성시대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창작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투니버스가 개국한 1990년대는 성우들의 활동 영역이 한층 다양해진 시기였다. 애니메이션 더빙이 인기를 끌며, 중후하고 매력적인 외화 더빙 시대의 목소리보다는 개성 넘치는 목소리의 성우들이 주목받았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슬램덩크 <슬램덩크>는 1994년 대원에서 출시한 비디오판, 98년 SBS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 버전이 있는데 비디오판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백순철 성우와 강수진 성우가 강백호를, SBS 애니메이션에서는 유덕화,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전담 성우로도 유명한 홍시호 성우가 강백호를 연기했다. 특히 강수진 성우는 투니버스의 인기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코난’ 남도일, <케로로> 시리즈의 도로로 목소리로도 유명하다. 외화 더빙과 방송 프로그램의 내레이션, 애니메이션 작품을 병행하는 대부분의 성우와 달리 주로 애니메이션 작품에 집중한다는 점도 강수진 성우의 특징이다. 하지만 그는 <타이타닉> <길버트 그레이프>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전담 성우이기도. 소년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에 잘 어울리는 배역들이다.
날아라 슈퍼보드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시청률(42.8%)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토종 애니메이션. 허영만 작가의 만화가 원작이다. <날아라 슈퍼보드>는 특유의 한국적인 색채와 더불어 개성 넘치는 성우들의 목소리로는 당대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던 작품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바주카포를 날리며 “~하셔”라는 유행어를 양산했던 저팔계는 노민 성우가, 귀가 먹어 말을 잘 듣지 못하며, 가끔 괴성을 지르며 입에서 독나방을 쏟아내는 사오정은 유해무 성우가 연기했다. 노민 성우는 “작두를 대령하라!”는 명대사로 기억되는 <판관 포청천>의 포청천이기도 했다. 통 크고 선 굵은 남자 캐릭터에 일가견이 있었던 그다. 유해무 성우는 새뮤얼 L. 잭슨의 전담 성우이자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해그리드 역을 맡았다. 흔히 ‘주인공 목소리’라 불리는 세련된 목소리가 표현할 수 없는 개성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X파일 인기 애니메이션의 홍수 속에서도 외화 더빙의 성역을 사수한 작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X파일>의 주인공이었던 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질리언 앤더슨보다 이규화, 서혜정 성우의 목소리로 이 작품을 기억한다. “스컬리, 진실은 항상 저 너머에 있어요”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이규화 성우는 전세계 네티즌에게 ‘최고의 멀더 역 성우’로 뽑히기도 했다. 지적이고 부드러운 남자주인공의 목소리가 그의 장기. 지금은 <남녀탐구생활 롤러코스터>의 내레이션으로 유명한 서혜정 성우의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는 초자연적인 현상보다 이성을 신뢰하는 스컬리의 모습을 잘 구현해냈다는 평을 받았다. <X파일> 방영 당시 멀더와 스컬리를 연기한 두 성우의 호흡이 너무 좋아, 뭇 팬들은 이들이 실제로 부부가 아닐까 오해하기도 했다. 2002년 종영한 <X파일>의 인기는 2000년 대 <CSI 과학수사대>가 이어받았다. 길 그리섬 반장 역의 박일 성우가 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