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래, 저렇게 랩 배틀이 태어났지
2014-03-11
글 : 김봉현 (음악비평가)
<노예 12년>을 통해 돌아본 힙합 음악과 미국 흑인의 역사
<보이즈 앤 후드>

<노예 12년>을 비롯해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2013) 등 최근 블랙시네마의 ‘흑형’ 묘사에서 드러나는 그 어두운 심연은 무얼까. 영화 속 흑인 남자들의 무력감과 콤플렉스를 힙합 역사와 함께 엮는, 음악비평가이자 힙합 애호가인 김봉현의 <노예 12년>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힙합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음악 중 하나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동시에 힙합은 오해와 편견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음악이기도 하다. 어느 음악보다 자기 고유의 색깔과 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흑인 래퍼들이 왜 자기 자랑을 하거나 허세를 떠는지, 왜 천박(!)하게 돈에 집착하는지, 왜 여성을 ‘비치’(해변이 아니다)라고 부르는지 궁금해하거나 불쾌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힙합은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열광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지금의 힙합 산업을 떠받치는 상당수가 바로 백인 중산층이다. 비평가들은 이를 가리켜 흑인 래퍼들이 그들에게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고 말한다. 올바른 것과 매혹적인 것은 서로 다를 때가 더 많다.

대뜸 힙합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힙합이라는 음악이자 문화가 아프로-아메리칸, 즉 미국 흑인으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다. 즉 지금 우리가 힙합을 통해 마주하는 ‘흑형’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흑인의 역사와 특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예를 들어 <허슬 & 플로>(2005)를 보자. 이 영화는 말초적이고 흔히 ‘쌈마이’라는 속된 말로 표현되는 미국 남부 힙합 사운드가 미국 남부 지역 흑인들의 생활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블랙시네마의 고전이 된 존 싱글턴의 <보이즈 앤 후드>(1991)와 다큐멘터리 <후프 드림스>(1994)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작품은 미국 흑인에게 ‘게토’란 어떤 의미이고, 그들이 게토에서 탈출하기 위해 랩이나 농구를 악착같이 하고 있으며, 흑인 래퍼들이 왜 그토록 자신의 음악에서 ‘자수성가’를 논하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예 12년> 역시 지금의 힙합 흑형들과 연결지어 바라볼 수 있다.

<노예 12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는 기운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바로 ‘무력감’이다. 분노와 환희도 간간이 느낄 수 있지만 어느 유행어처럼 ‘우린 안 될 거야’ 같은 무력감이 영화 내내 온몸을 감싸고 돈다. 솔로몬(치웨텔 에지오포)은 내내 무력하고 좌절 뒤엔 더 큰 좌절이 찾아온다. 솔로몬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기껏 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거나 배신당한다. 그리고 이 무력감이라는 세 글자야말로 노예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국 흑인 남성을 규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라 할 수 있다.

노예시대에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흑인이 백인에게 탄압당했다. 그러나 여자노예는 이에 더해 성폭행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백인 지주는 자신의 욕구에 따라 여자노예를 오두막이나 들판 등지에서 얼마든지 강간할 수 있었고, 당연히(!) 처벌받지 않았다. 이에 불복종하는 여자노예는 채찍질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했다. 자신의 아내, 여동생, 누나, 어머니가 백인에게 강간당하고 유린당해도 남자노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의 초반부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어린 세실(포레스트 휘태커)의 어머니가 백인 지주에게 끌려가지만 세실의 아버지는 오히려 분노하는 세실을 나무란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미국 흑인 남성은 남성으로서의 힘을 상실한 채 살아가야 했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백인에 비해 열등한 대접을 받는 지금도 큰 의미에서 마찬가지라면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뺏겨야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족 해체를 빈번하게 경험해야 했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흑인 남성 래퍼들에게서 나타나는 남성우월적이자 여성폄하적인 면모는 이러한 지점과 연결된다. 역사적으로 대물림되어온 남성성의 상실이 흑인 남성 래퍼들에게 오히려 과도한 남성성의 과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허슬 & 플로>

말하자면 ‘콤플렉스의 반영’이다. 남자답게 행동할수록 진짜배기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하면 가짜로 전락해 신용을 잃는 힙합 특유의 문화는 분명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빈민가의 젊은 흑인 남성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더욱더 마초적으로 행동하고 여성을 모욕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성공한 유명 흑인 래퍼들 대부분은 주로 이러한 게토 출신이다.

또 하나. <노예 12년>에는 예배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한다. 이 역시 지금의 힙합을 나타내는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이다. 명예로운 일은 아니지만 힙합은 대체로 ‘동성애 폄하’ 성향으로 잘 알려져있다. ‘게이 같은’이라는 표현은 힙합 안에서 그 어떤 표현보다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다. 흑인 래퍼들은 랩 배틀을 벌일 때 상대 래퍼를 자주 동성애자에 비유하고, 동성애자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는 구절 뒤에는 ‘노 호모’라는 표현을 덧붙인다. 남성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힙합 세계에서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학자들은 흑인 남성 동성애자가 미국 흑인 남성의 트라우마를 건드렸다고 해석한다. 미국 흑인 남성은 (당연히) 노예시대 같은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성스럽고 약한 (혹은 그렇게 보이는) 흑인 남성 동성애자는 미국 흑인 남성에게 단순히 꼴보기 싫은 존재를 넘어 불안과 위협을 야기하는 대상이다. 극복해야 하며 청산해야 할 대상인 셈이다.

더불어 힙합의 동성애 폄하 성향은 <노예 12년>의 예배 장면에서 드러나듯 미 흑인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개신교’에 기인한다. 비록 노예시대의 백인 지주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하면서까지 활용했던 개신교이지만, 흑인 노예들에게는 개신교야말로 유일한 삶의 버팀목이었으며 그 관습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그들은 신앙을 통해 삶을 버텨냈고 고단한 노예의 삶이 천국에 이르러서는 끝날 것을 믿었다. 흑인들의 예배가 유독 열정적이고 떠들썩하며 간절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노예 12년>에서 다른 노예가 죽었을 때 ‘요단강을 건넌다’고 노래하며 추모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현재 미국 내 흑인의 약 80%가 개신교도이고, 종교와 관련한 미국 흑인의 모든 수치가 미국 내 타 인종이나 미국 평균을 상회한다. 심지어 종교를 가지지 않은 미국 흑인의 ‘신에 대한 믿음’이 미국 개신교도 평균보다 높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성공한 유명 흑인 래퍼들 대부분이 동성애를 금지하는 개신교를 모태신앙으로 삼으며 자랐다. 즉 미국 흑인 사회에 개신교가 뿌리박힌 이유는 간절하고 비극적이었지만, 이것이 일정한 ‘나비효과’를 거쳐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힙합음악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를 만들어낸 셈이다.

<후프 드림스>

<노예 12년> 속 힙합의 순간들

이 밖에도 <노예 12년>은 힙합과 관련한 많은 것을 연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솔로몬이 백인 지주 몰래 다른 흑인 노예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현대 랩의 기원과 관련지을 수도 있다. 흑인 노예들의 대화는 백인 지주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연적으로 은유와 상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요소들이 현대랩의 체계와 표현방식, 문학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솔로몬이 영문도 모른 채 다른 노예들과 뒤섞여 짐짝처럼 팔려오는 장면을 힙합의 랩 배틀과 연결시킬 수도 있다. 당시 흑인 노예들이 묶음이나 떨이로 팔리는 것을 가리켜 ‘더즌’(12개짜리 한 묶음)이라고 불렀다. 그 과정에서 당하는 폭력에 대한 자기방어적 대응, 흑인 노예간에 벌어지는 생존을 위한 사투 등은 미국 흑인 사회 특유의 공격적인 구술 전통의 기원으로 작용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전통이 현대에 이르러 힙합과 결합해 탄생한 것이 바로 랩 배틀이다. 그렇게 나는 <노예 12년>을 보는 내내 힙합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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