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
[봤니, 이 영화] 웃기고 슬픈, 평범남의 백일몽 속으로
2014-04-25
글 : 장영엽 (편집장)
벤 스틸러가 연출과 주연 맡은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미리 보기

벤 스틸러가 감독, 주연배우로 나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내년 1월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미리부터 웃음만을 기대하지는 말 것. 한 남자의 자아 찾기를 조명한 이 영화는 사라지는 것들, 쉽게 잊고 사는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을 것들을 짚어봤다. 더불어 뉴욕에서 만난 벤 스틸러와의 인터뷰도 함께 전한다.

감독 벤 스틸러 할리우드 코미디영화의 대표적인 얼굴, 벤 스틸러가 연출에도 재능이 있다는 점은 종종 잊혀지곤 한다. 그는 X세대의 상징적인 영화 <청춘 스케치>와 더불어 <케이블 가이> <쥬랜더> <트로픽 썬더> 등의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이하 <월터의 상상>)는 그런 그가 다시 한번 연출과 주연을 겸한 작품이다. 처음에 벤 스틸러는 주인공 월터 역의 캐스팅 제안을 받았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본능적으로 이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벤 스틸러 하면 으레 떠오르는 <미트 페어런츠>와 <쥬랜더>의 코믹한 이미지를 잠시 지우고 싶었던 걸까. <월터의 상상>은 스틸러의 연출작 가운데서 <청춘 스케치>의 정서와 가장 비슷하다. <청춘 스케치>는 아름다운 젊음과 빛나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였다. <월터의 상상>은 청춘을 평탄하게 보냈으나 뒤늦게 변화의 홍역을 앓는 남자의 이야기다. 다시 말해 세상이 규정한 틀 안에서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뤘다는 점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월터의 상상> vs 원작 소설, 영화 <월터의 상상>의 원제는 ‘월터 미티의 비밀 인생’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이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마크 트웨인을 잇는 미국 최고의 유머작가’라 불리는 제임스 서버의 원작 단편소설을 읽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겠다. 제임스 서버의 <월터 미티의 비밀 인생>은 1939년 3월 <뉴요커>에 발표돼 큰 인기를 얻었다.

평범한 중산층 남자 월터 미티가 주인공이다. 그는 아내가 쇼핑하는 동안 다섯개의 백일몽을 꾼다. 현실에선 사랑하는 아내를 둔 평범한 남자이지만 상상 속에서 그는 해군이 되기도 하고 유명한 의사가 되어 수술도 집도해보고 악명 높은 암살자로 법정에 서기도 한다. 진부한 일상에서 탈출해 상상 속에서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만 다시 씁쓸한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는 월터의 이야기는 이후 많은 미국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47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나왔다. 노먼Z. 맥레오드 감독이 연출한 <월터 미티의 비밀 인생>은 원작 소설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 됐다. 영화적 재미를 주기 위해 제작진은 원작 소설의 유부남 월터를 미혼남으로 바꾸고, 네덜란드 여인과의 로맨스와 진귀한 보물에 얽힌 모험담을 추가했다. 원작자 제임스 서버는 영화 제작진들의 이러한 각색에 상당히 언짢아했다고 전해진다. 잡지 <라이프>에 영화에 관한 긴 항의문을 보낼 만큼. 그로부터 66년 만에 등장한 벤 스틸러의 신작 영화에서 월터 미티가 잡지 <라이프>의 직원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월터의 상상>의 시나리오를 쓴 스티븐 콘래드는 이 영화를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한 뉴욕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단편소설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원작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월터가 소설에서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했을 법한 행동이나 말을 생각하면서 각색을 해나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줄거리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믿을 만한 사람이다. 16년 동안 잡지 <라이프>의 뉴욕 메인 오피스에서 포토 에디터로 사명감을 갖고 일했고, 가끔 정신줄을 놓기도 하는 어머니(셜리 매클레인)와 배우 지망생인 여동생(캐서린 한)을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한다. 그는 직장 동료들에겐 좋은 선배이자 믿음직한 친구다. 하지만 월터가 원하는 삶은 이것이 아니다. 그가 틈만 나면 백일몽을 꾸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만을 다하며, 정작 자신의 꿈은 저 뒤편에 접어놓았기 때문이리라. 아직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본 월터에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바로 신입사원 셰릴(크리스틴 위그)에게 반한 것. 백일몽에선 멋진 산악인, 불길을 뚫고 셰릴을 구하는 영웅이 되지만 막상 셰릴을 만나면 제대로 말조차 못 건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잡지사가 매각되면서 잡지에는 관심조차 없는 대기업 매니저(애덤 스콧)가 내려와 직원들을 정리해고하기 시작한다. 잡지 출판을 중지하고, 인터넷 매거진을 위한 최소 인원만 남기겠다는 것. <라이프>의 마지막 출판본을 준비하는 월터. 전설적인 사진작가 션 오코넬(숀 펜)이 특별히 그에게 보낸 네거티브 필름으로 표지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지만 이 필름의 종적이 묘연하다. 이때 월터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한다. 뉴욕을 벗어나보지 못했던 월터는 그간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통신수단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션의 행적을 찾기 위해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노샤크 산까지 기나긴 여정에 오른다. 션의 사진으로만 경험했던,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세상’을 직접 마주하면서, 월터는 꼬깃하게 접어두었던 꿈을 하나씩 펴기 시작한다.

주목할 만한 요소들 <월터의 상상>에는 <어벤져스>에서나 볼 듯한 아스팔트 위의 격투 장면이나 회사 복도가 쪼개지며 ‘산악인’ 월터가 걸어나오는 장면 등 상상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이들 장면은 이야기와 관련없이 튀어나오기보다는 월터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효과적으로 도움을 준다. 더불어 이 영화는 스틸러의 연출작 <청춘 스케치>에서 대변했던 X세대의 감성도 잘 살려준다. 지금 중년이된 이들은 세상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세대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런 변화에 주목하고, 아날로그 세상의 아름다움을 잊어버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준다. 벤 스틸러는“아날로그 시대의 대표적 예술도구였던 필름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데에서글픔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필름에 대해 오마주를 바치는 의미에서, 그는 <월터의 상상> 또한 필름으로 촬영했다고.

<라이프> 1939년의 월터 미티가 2013년에도 살고 있다면, 그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각본가 스티븐 콘래드의 고민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제임스 서버의 단편을 현대적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그가 선택한 월터 미티의 직업은 바로 잡지사 직원이다. 그 잡지가 <라이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자신의 진짜 인생(Life)과 이제까지 살아왔던 안정된 인생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월터 미티의 고민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특히 <라이프>는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이자 저명한 사진 주간지로서 명성을 누렸지만, 2009년 웹사이트 Life.time.com에 흡수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라이프>의 실제 배경이 변화의 위기에 직면한 월터의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스티븐 콘래드의 말이다. “월터가 <라이프>의 네거티브 사진실에서 일한다는 설정이 마음에 든다. 지난 70년 동안 찍힌 가장 중요한 사진을 보관하는 인간 저장소 같은 느낌을 주기때문이다. 월터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포착된 사진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보지만 그를 진정으로 봐주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관객은 월터를 응원하게 된다. 많은 현대인이 직장에서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거나 정말로 삶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캐스팅> <월터의 상상>에는 주인공 월터의 모험에 동행할 매력적인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월터가 짝사랑하는 신입사원 셰릴과 월터의 현실 세계 영웅, 사진작가 숀이 그들이다. 셰릴은 미국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쇼>의 출연진으로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배우 크리스틴 위그가 연기한다. 벤 스틸러는 처음부터 그녀를 셰릴 역에 점찍어두었다고 말한다.

“크리스틴은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유머 감각을 지녔다. 나는 그녀가 우리에게 익숙한 광범위하고 정신없는 코미디를 선보이는 게 아니라 이런 역할을 맡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그녀는 따뜻하고 호감 가는 성격이다. 그녀라면 셰릴과 월터가 왜 천생연분인지 단번에 관객을 납득시킬 거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현실에서 일자리를 잃을까봐 전전긍긍하는 평범한 싱글맘으로 분한 크리스틴 위그의 모습이 셰릴을 더욱 공감가는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이 벤 스틸러의 말이다. <라이프>의 유명 사진작가 숀으로 분한 이는, 두말할 필요 없는 연기파 배우 숀 펜이다.“숀 오코넬은 진정한 창조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므로 월터가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되었을 때 관객에게 놀라운 존재감을 줄 수 있어야만 했다.”(벤 스틸러) 출연하는 작품마다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선보여온 숀 펜이기에, 이번 영화에서 그가 월터 미티를 어떻게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지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을 거다. 물론 숀 펜과 벤 스틸러의 콤비 연기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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