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이하 <월터의 상상>)는 무려 20여년 동안 할리우드를 떠돌던 프로젝트였다. 그동안 스티븐 스필버그와 론 하워드 감독 등이 연출자 물망에 올랐고, 주인공 월터 역엔 짐 캐리와 오언 윌슨, 마이크 마이어스, 사샤 바론 코헨, 케빈 앤더슨 등의 배우들이 캐스팅된 바 있다. 이처럼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프로젝트에 합류했다가 다시 나가는 과정을 번복했지만, 정작 이 영화를 만들 사람은 따로 있었나보다. <월터의 상상>의 감독과 주연을 맡은 벤 스틸러는 “본능적으로” 이 영화를 자신이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한 남자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다. 누구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지 않았을까? 벤 스틸러는 이 영화가 70여년 전 출간된 소설과 캐릭터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나, 여전히 현대인들의 마음속엔 월터와 같은 자아 찾기의 욕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제임스 서버의 단편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1939)이 원작이다. 더불어 대니카가 주연을 맡은 영화 <월터의 비밀 인생>(1947)도 있는데, 부담이 되진 않던가. =늘 영화의 전반적인 면모를 먼저 보는 편이다. 스티브 콘래드의 시나리오는 원작을 좀더 감성적인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현재의 나 자신이나 연출가로서, 배우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원작 영화를 리메이크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에겐 새로운 시도였다.
-처음부터 연출과 주연을 병행할 생각이었나. =처음에는 배우로 제안을 받았다. 감독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다보니 내가 배우가 아닌 감독의 관점으로 이 작품을 보고 있더라. 시나리오작가와 스튜디오와 함께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감독의 자리가 아직 공석인데 내가 한번 맡아보겠다고 했다. (웃음) 솔직히 연출과 연기를 함께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그건 필요에 의한 선택이다. <월터의 상상>의 경우 감독도, 배우도 탐나는 자리였기에 함께 맡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만 선택했을 거다. 개인적으로 감독을 맡을 때마다 ‘주연은 맡지 말걸’ 하고 늘 후회하는 편이다. (웃음)
-월터의 실생활은 무척 지루해 보인다. 당신의 인생에선 이런 경우가 없었을 것 같은데. =부모님이 배우라 어릴 적부터 쇼비즈니스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유명 코미디언 부부 제리 스틸러와 앤 미어러의 아들이다).재미있고 화려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나도 배우 지망생 시절에 카메라 가게 점원이나 쓰레기 수거 등 많은 일을 했다. 다행히 월터처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사무직은 해본 적이 없다. 아마 못 견뎠을 거다.
-월터처럼 당신도 가끔 백일몽이나 판타지를 꿈꾸곤 하나. =특별히 자주 공상하는 것은 없지만, 주로 작업 중인 작품이나 최근에 본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자주 혼자 꿈을 꿔서 아이들이 그런 나를 깨우곤 한다. (웃음) 또 극중에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는 과정이 나오지 않나.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선 백일몽을 꿀 시간조차 없다. 사람들은 늘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도 그렇고. 하지만 가끔 상상 속에서 어딘가로 향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월터가 상상하는 장면 중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재미있게 패러디한 장면도 있더라. =9개월간 영화에 대해 제작진과 토론하면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벤자민 버튼…>을 패러디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웃음) 눈앞에서 자신의 인생이 한순간에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영화의 형식이 어울릴 것 같아서 추가한 장면이다.
-월터의 직장이 <라이프> 잡지사인 만큼 실제로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실제로 월터처럼 <라이프> 잡지사가 문을 닫을 때 아카이브 정리를 담당했던 분의 도움을 받았다(1883년 창간된 <라이프>는 2000년 폐간된 뒤 여러 차례 특집 이슈를 발간했다). 실제 오피스와 로비에서 촬영했다. 나에게 아이콘인 <라이프>의 모습과 잡지에 담겨 있던 이미지를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건물은 물론 당시 잡지의 분위기를 최대한 담고 싶었다. 극중 사용된 사진도 아카이브에서 직접 보고 사용할 수 있었는데, 어린 시절에 봤던 역사적인 이미지들을 보면서 고른다는 것이 즐거운 고민이었다.
-이 작품에서 코미디와 드라마의 밸런스를 맞추기 힘들지는 않았나. =코미디언의 눈으로 이 작품을 보지 않았다. 어떤 장면을 웃기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만들지도 않았다. 나는 스토리 자체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거다. 월터라는 캐릭터는 늘 표면 아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월터가 상상을 할 때에는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없었던 행동을 하는 거다.
-가라오케 장면에서 휴먼 리그의 <Don’ t You Want Me Baby>가 나오는데. =그렇다. (웃음) 고등학교 다닐 때 유행했던 노래다. 개인적으로 가라오케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웃음) 이제는 없어져가는 전통 미디어에 대한 오마주인가. 월터는 내 나이쯤 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기를 경험한 세대다. 아날로그 세계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디지털로의 전환 역시 완벽하게 해야 하는 세대다. 독특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세계에서 산다는 것과 필름이 없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래서 이 영화도 필름으로 촬영했다. 이 작품은 필름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누구나 나이가 들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 50살이 되기 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그는 현재 48살이다). =(웃음) 리스트를 만들거나 하진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생활하는 것이 아닐까. 앞만 보고 살면 놓치는 게 너무 많다. 인생에는 보장되는 것이 없지 않나. 지난 몇년간 가까운 사람들을 잃게 되면서, 더 이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고. 그래서 현재 이 순간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싶다.
-연기와 연출, 제작 중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연기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어릴 적부터 감독이 꿈이었다. 제작보다도 연출이 더 좋다. 프로듀서는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기 힘들다. 물론 제작과 연출을 겸한다면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감독이 가장 큰 꿈이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계속하고 싶다.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영화를 같이 보기도 했다던데. =함께 여러 편의 영화를 보며 이 작품을 어떤 느낌의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얘기들을 나눴다.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찬스> <시골 영웅> 같은 영화들을 봤다. 이 작품들을 보고 실질적으로 뭔가를 얻길 바라서가 아니라, 함께 영화를 보며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 이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배우들이 그저 하나의 작업 과정이 아닌, 무언가를 함께 창조한다는 느낌을 받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