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벨기에의 ‘융’이 한국의 ‘정식’에게 보내는 담담한 위로
2014-05-15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경계인의 자전적 성장 기록: <피부색깔=꿀색> 읽기

한 경계인의 과거와 현재를 병치시키는 애니메이션 <피부색깔=꿀색>은 애잔하면서도 덤덤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다. 이 작품은 2013년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대상과 관객상, 아니마문디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작품상,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관객상과 유니세프상을 비롯해 세계 80여 영화제에 초청, 23개의 상을 휩쓸며 잔잔하지만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의 출발은 자전적 그래픽 노블 <피부색깔=꿀색> 3부작(한국에는 2013년 통권으로 발간되었다)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벨기에에서 자라난 한국계 입양아 ‘융’의 성장애니메이션, 영화에 직접 출연한 감독의 현재를 반영한 실사 영상, 여기에 뉴스릴 화면과 홈비디오 영상, 스틸사진까지 혼재된 하이브리드 애니메이션으로 완성되었다. 1965년 한국에서 태어난 감독 융 헤넨은 1971년 벨기에로 입양되어 성장했다. 브뤼셀의 생-뤽 아틀리에, 보자르 아카데미를 거쳐 라 캉브르 예술학교에서 그림과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다. 그는 현재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거주하며 그래픽 노블작가로 활동 중이다.

한 이방인의 뿌리 찾기

아시아인도 아니고 유럽인도 아닌, 백색도 흑색도 아닌 피부색 ‘꿀색’의 소년은 성인이 된 뒤 자신의 기원을 탐색해 간다. 그 무엇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할 때, 그림만이 그가 현실을 탈출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었다. <피부색깔=꿀색>은 상처를 응시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한 이방인의 자전적 성장의 기록이다.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벨기에의 한 가정에 입양된 융(Jung은 한국 이름 정식(Jung-Sik)의 첫 글자에서 유래된 것이다)은 중년의 나이에 모국을 처음 찾아 자신의 뿌리를 더듬어본다. 융이 입양된 곳은 이미 4명의 아이가 있는 벨기에의 가정이었다. 양부모의 공평한 관심과 형제자매와의 우애어린 생활 속에서 융은 자라난다. 몇년 뒤 한국인 입양아 출신 여아가 동생으로 들어온다. 융은 겉보기엔 활발한 개구쟁이 꼬마였다. 십대 시절엔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부정하고 일본 문화에 빠진 괴짜가 되었다. 일상적인 거짓말과 도둑질, 악의적인 장난기도 심해졌다. 화가 난 양엄마가 그를 ‘썩은 사과’라고 하자, 융은 버려졌던 자신의 과거 기억을 떠올린다. 평온한 현실 속에 잠복하고 있는 불안의 단초들이 융의 내면에 풀리지 않는 의문을 만들어낸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왜 버려졌을까? 융의 일탈은 계속된다. 가출도 해보고 매운 소스 얹은 흰쌀밥만 먹다가 건강을 상하기도 하지만 본원적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주변의 한국인 입양아들도 그러했다. 자살, 우울증, 약물중독, 사고사 등 자기파괴적 성장기를 보냈던 것이다. 융의 한국계 입양 여동생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성숙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그녀는 발레리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그녀 나이 25살이었다. 주위에 만연한 상처와 불행을 극복하고 소년은 관대하고 평화로운 발견과 성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어른이 된 그는 한국에 와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과거와 현재, 상상과 실제를 오가며 초연히 전개되어간다.

일상적 에피소드와 사실적 재현의 힘

이 영화는 화해, 극복, 완전한 치유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그 과정을 따라가는 관조의 영화다. 헤넨 감독의 첫 장편애니메이션임에도 작화, 서사적 전개, 감정의 깊이 등 여러모로 조화롭고 안정적이다. 그래픽 노블 작가로서의 역량은 수묵화가 기반이 된 작화의 완성도와 정서적 깊이를 만들어냈고, 체험에 근거한 설정의 진정성은 섬세한 스토리 전개에 일조했다.

이 작품이 입양아가 겪는 문화적 갈등과 주변의 은밀한 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혹은 자신이 거부했던 뿌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감격과 계몽의 영화였다면 지금과 같은 호평을 이끌어내지 못한 하나의 이벤트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자전적 경험의 특이성과 체험의 진정성만이 이 작품의 미덕은 아닌 것이다. 이 작품의 힘은 그가 성장했던 벨기에 가족의 일상을 포착하여 재현해낸 리얼리티에서 나온다. 감독은 활동적이고 때로는 거짓말을 일삼던 아이였던 자신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감독은 이 작품이 트라우마로 인한 내적 붕괴를 다루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버려짐이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비극적인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었다. 악의적 학대를 일삼는 양부모라든가 그에게 너무도 적대적인 사회라든가, 노골적인 차별이나 따돌림 등 전형적인 설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평범한 가족들 사이에서 있을 법한 작위적이지 않은 갈등과 충돌의 에피소드들과 그 안에서 생겨나는 페이소스 섞인 유머는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치고받는 대화의 실감도 뛰어나다. 이물감처럼 그를 따라다니는 불안함과 문화적 이질감은 하나의 정서적 무드로 작품에 깔려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 짓는 방식도 인상적이다. 가령 이러한 장면이 있다. 양아버지는 반복적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융의 머리를 체벌삼아 밀어버린다. 이는 과거 어린 정식이 고아원에서 머리를 미는 회상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바리캉이 피부에 닿는 차가운 느낌은 고아원에서 의사가 벌거벗은 어린 몸에 차가운 청진기를 들이대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진료실에서 냉기에 몸을 떠는 장면은 벌거벗은 채 목욕탕에서 샤워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이는 벨기에의 꼬마 융이 차가운 비를 맞는 장면과 맞닿는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의 일화가 감각적 체험과 감성적 경험을 통해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끝내 닫히지 않을 텍스트

<피부색깔=꿀색>의 또 다른 미덕은 관객으로 하여금 신파적 정조에 빠지지 않게 하면서도, 적절한 이해에 머물도록 파토스의 수위를 조율하는 능력에 있기도 하다. 슬픔과 분노의 장면에 오래 머물지 않으며, 본원적인 악의나 교정 불가능한 어떠한 교착상태를 과장하지도 않는다. 덤덤하게 때론 냉소적이거나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과거를 응시하나 동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적절한 거리감각이다. 아름답고 서늘한 터치의 작화는 주관적 체험과 정서의 깊이를 그윽하게 채워 나간다. 오래 머물지 않고 상황들을 스쳐 보내며, 짐짓 영화는 슬픔에 찬 시선으로 인물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에서 융은 얼굴이 없는 한국 어머니의 상상적 그림에 벨기에 양어머니의 얼굴을 채워 넣었다. 이것이 완전한 화해의 제스처는 아닐 것이다. 단지 그 단계에서의 이해와 공감의 제스처일 뿐인 것이다. 사람의 고향은 여기이거나 저기일 수 있다. 그는 한국인이자 벨기에인, 때로는 프랑스인일 수 있다. 하지만 본원적 이방인으로서 인간의 뿌리 깊은 불안은 쉽게 해소될 수 없다.

작품은 한국전쟁 이후 지속된 한국의 해외 입양 문제나, 미혼모 문제에 대한 의제도 넌지시 제시한다. 버림받은 아이도 불행하지만 아이를 버리게 하는 사회도 불행하다. 한국 사회는 결혼 이외의 제도로 출생한 아이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한다. 문화와 관습, 제도적 뒷받침의 변화가 있어야 할 때다. <피부색깔=꿀색>은 한국계 입양아의 현지 성장담을 다룬다는 점에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감독 장길수, 1991)을, 입양아 출신 감독의 신산한 기억을 헤집는다는 점에서 <여행자>(감독 우니 르콩트, 1999)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예외적 일탈과 파국을 다루지도, 상실감을 품은 유년 시절에 유폐되지도 않은 <피부색깔=꿀색>은 과거를 현재적 맥락과 연관시켜 우리 앞에 불러들인다. 꼬마 융의 성장을 그려나간 애니메이션만 따라가면 상처를 극복하는 하나의 완결된 치유의 이야기로 이해되지만, 중간중간 삽입된 실사 장면들은 정서적 몰입을 방해하며 이질감을 남긴다. 이곳저곳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끝내 닫히지 않을 텍스트다. 세대 및 관객의 기대지평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작품 해석의 폭이 넓다. 그렇기에 보는 관점에 따라 납득의 영화일 수도, 질문의 영화일 수도 있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