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그리움 품은 꿀색 얼굴
2014-05-15
글 : 송효정 (영화평론가)
사진 : 오계옥
<피부색깔=꿀색>의 융 헤넨 감독을 만나다

영화, 그래픽 노블, 애니메이션을 오가며 융 헤넨(한국명 전정식) 감독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이다. 자전적 이야기를 토대로 한 작품 <피부색깔=꿀색>에 대한 질문은 감독 자신에 대한 질문과 구분되지 않았다. 한국계 입양아로서 벨기에에서 자라나 현재 프랑스에서 작가로 활동 중인 융 헤넨 감독을 만났다.

-한국은 몇 번째 방문인가.
=<피부색깔=꿀색>의 실사 장면을 취재하러 왔던 2010년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지난해 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PISAF)에서 내 영화가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방문했고, 이번이 세 번째다.

-동명 제목의 그래픽 노블이 있다. 처음부터 애니메이션화될 것을 예상했나.
=아니다. 본래 2007년에 단행본이 나왔고 애니메이션은 2012년에 만들어졌다. 처음 만화를 그릴 때엔 영화화까지 고려하지 않았다. 첫 번째 연재본을 본 뒤 영화 제작자가 연락해왔다. 그래서 그의 제의로 TV용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이후 다큐멘터리 기획은 취소되었고, 찍은 영상을 활용해 여러 자료를 활용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것이다.

-작품에 애니메이션, 뉴스릴, 홈비디오, 실사촬영 등 다양한 재료가 혼합되어 있다.
=나는 내 이야기를 100%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원치도 않았다. 영화적 기법을 활용해 좀더 현대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자전적 이야기의 장면은 애니메이션으로, 현재의 나를 보여주는 부분은 영화적 촬영으로 구성했다. 이 영화는 여러 자료를 활용한 하이브리드영화다. 정말 중요했던 것은 내가 지식인이나 예술성을 지향하는 소수의 관객을 넘어서 보다 많은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길 원했다는 점이다.

-공동연출작인데 특별한 역할 분담이 있었나.
=공동연출이었지만 특별하게 역할이 나뉜 것은 아니었으며, 실질적으로는 내가 전 작품을 관장했다. 좋은 감독이란 영화 전체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처음엔 나와 공동연출자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으나, 결국 나의 자전적 기억을 반영한 영화이기에 내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작품이 진행되었다.

-피부색을 꿀색이라고 표현하는 예는 드물다. 제목을 정하게 된 계기는.
=마침 관련된 사진을 갖고 있다. (사진을 보여주며) 홀트복지회의 한 한국인 여성이 입양서류에 내 피부색을 꿀색이라고 써넣었다. 제목을 찾을 때 나는 멀리서 찾지 않았다. 이미 작품의 제목이 여기 있었던 거다!

-오프닝에서 고아원의 아이들이 <아리랑>을 부른다. 자신을 버리고 간 사람에 대한 이별 노래라 선곡이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부른 멜로디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멜로디가 주는 느낌만은 기억에 생생해 곡을 선정할 때 고민 없이 넣었다. 가사의 내용까지는 잘 몰랐는데, 나는 막연히 조국에 대한 애국의 심리를 노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악 얘긴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오는 곡도 매우 아름답다.
=지금 음악을 공부하는 딸이 작품에 등장하는 영화음악들을 작곡했다. 엔딩곡의 경우는 딸이 아빠를 위해 작사, 작곡, 노래까지 했다. 이 곡은 그녀가 13살 때 작곡하여 17살 때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이다. 나는 딸의 첫 번째 팬이다. 딸은 지금은 리틀 코멧 알리(Little Comet Aly)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이나 만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처음엔 모든 아이들이 그러하듯 재미로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은 차차 나를 표현하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분출하는 통로이자 치유의 방법이 되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나는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의 스킬이 늘어가면서는 만화를 그렸다. 아마 어릴 때 카메라가 옆에 있었다면 지금쯤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어릴 때 그린 많은 그림들이 등장하는데, 실제 당시의 그림들을 넣은 것인가.
=이 영화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관객을 위한 것이다. 실제 이야기를 중시하되 소소한 부분들은 관객을 위해 새로이 할 필요가 있었다. 아! 사춘기의 융이 입양아 김에게 보여준 포트폴리오의 그림은 실제 그림이다. 김은 이후 자신의 소망대로 아주 잘생긴 이탈리아인과 결혼했다. (웃음) 그 당시 김을 만난 것은 내게 무척 중요한 사건이었다. 김을 통해 한국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이 내 그림을 보면서 내가 한국을, 나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일본 문화에 심취했는데, 어떻게 일본에 대한 이미지를 접했는가.
=백과사전을 통해 일본을 배웠다. 처음 백과사전에서 본 내용은 러일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매우 흥미로웠다. 아시아인들이 유럽인들과 싸워 이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아시아인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끊임없이 내 뿌리를 부정해왔는데, 아시아인에 대한 관심을 통해 차차 내 뿌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벨기에에서도 일본 만화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아톰이나 그랜다이저, 하록 선장 등을 봤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때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했나.
=왜 이렇게 많은 입양아를 해외로 보내는가? 내가 어렸을 때에는 한국이 대단히 수치스러웠다. 부끄러워했던 한국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살아가면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확인해왔으며, 이제는 내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렸을 때 기억이 풍부하다. 실제로 그 당시의 기억이 인상적인가.
=영화의 내용은 모두 나의 기억에서 나왔다. 꼬마 융이 벨기에에서 겪은 유년의 기억뿐 아니라, 입양 전 한국 고아원이나 거리의 경험도 모두 섬광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이후 주변에서 당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어서 그것들이 기억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감독의 작품에서 한국이란 어머니의 나라다. 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나 그리움은 없는가.
=이상하게도 친아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늘 어머니에 대해서만 생각해왔고, 그녀가 내 뿌리라고 여겼다. 보통 남자아이들은 어머니에 대한 보편적 그리움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저 미혼모일 친어머니를 스쳐간 한명의 남자일 뿐이라고만 생각해왔다.

-한국인 입양아로서 벨기에에서 성장해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당신에게 국적 개념 같은 게 있으며, 그것이 중요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뚜렷한 ‘하나’의 국적을 갖고 있지는 않다. 국적이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세개의 국적을 갖고 있기도 하다. 현재 벨기에 국적이지만, 한국 입양아이기도 하고 프랑스에서의 거주기간이 길기에 다른 국적을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기작으로 기획하고 있는 작품이 있나.
=지금 생각하는 작품은 실사영화로 한국과 프랑스가 공동제작하게 될 듯하다. 한국 배우가 한국어로 연기하는 영화다. 내가 정말 관심있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아이들과 나누고 싶으면 애니메이션이 될 것이고, 어른들과 나누고 싶으면 실사영화가 될 수 있다. 한편 미국과 한국을 배경으로 <피닉스의 모험>이라는, 한 남자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만화를 작업 중이다. 아마 내년에 프랑스에서 작품집으로 나올 것이다.

-만화 작가, 애니메이터, 영화연출가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데, 현재 자신은 어디에 가장 가까운가.
=글쎄. (웃으며 명함을 보여준다.) 명함을 보면 나는 필름메이커이자 그래픽 노블리스트다. 그게 현재의 나를 잘 설명해주는 게 아닐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