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하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뱃사람으로 탈바꿈한 여러 배우들을 보여준다. 생생한 디테일들이 꽤 많은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EBS <극한직업> 같은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는, 어선 위의 일들을 편집해서 참고용으로 나눠줬다. 하지만 배우들 모두 열의가 대단해서 각자 연구를 많이 해왔다. 가령 ‘고수레’처럼 약식제사 같은 설정들은 김윤석 배우가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 그렇게 모인 것들 중에서 취사선택하며 더욱 풍성해졌다.
-처음 연극 <해무>를 접했을 때 끌렸던 요소는 무엇인가.
=범죄자의 시점이라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무너져 내리는 죄의식과 그로 인한 생의 공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해무가 엄습하면 1m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 그런 상황에서 인물들 저마다 숨어 있던 괴물이 튀어나온다.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의 잘못이건 타인에 의해 일어난 일이건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함을 마주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해무>를 만들면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라이프보트>(1944)가 떠올랐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극한 상황,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은 배라는 설정은 영화적으로 매력적인 소재다. ‘연극과 영화’라는 개념에서도 무척 중요한 작품이다.
=존 스타인벡이 원안을 제공한 <라이프보트> 또한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물론 준비하면서 참고했던 작품인데, <라이프보트>를 통해 <해무>에 적용한 중요한 한 가지는 분명 있다. 출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히치콕이 했던 얘기인데, 집약적인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연극을 영화로 만들 때는 다채로운 배경을 등장시켜 그를 환기 혹은 통풍시켜야 한다는 통념을 굳이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통념에 부정적이었던 히치콕은 영화도 연극처럼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 <해무> 또한 연극적 무대에서 굳이 벗어나려는 강박은 없었다. 연극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너른 바다나 배의 전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걸 최소화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배 위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봉준호 감독님과도 ‘배우를 따라가자, 필요없는 것들은 다 쳐내자’고 얘기했다. 그 대신 연극의 막과 막 사이를 파고들고자 했다. 연극에서는 막과 막 사이 어둠 속에서 사운드로만 이뤄지는 밀항 신이나 기타 범죄의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데 공을 들였다. 홍기선 감독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도 준비하면서 봤던 영화인데 꽤 흥미로웠다. 현대판 노예선에서 탈출하려는 선원들의 이야기인데, 바다와 인간의 대결이 아니라 순전히 고립된 인간들끼리 부딪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통하는 바가 있다.
-원작 연극에서 배우 송새벽이 동식을 연기했다. 혹시나 다른 역할로라도 출연할 수는 없었을까.
=아마도 원작 연극을 본 사람이라면 송새벽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으니까. 잠깐이나마 다른 역할로 등장하는 것도 떠올려보긴 했지만, 도무지 동식이 아닌 다른 역할은 없다는 생각에 바로 접었다.
-출항하면 모든 일들이 배 위에서 이뤄진다. 세트와 로케이션 촬영의 분배는 어떻게 했나.
=기본적으로 해무가 엄습하는 갑판장 세트, 온갖 사건들이 벌어지는 기관실 세트, 수조 세트의 배가 있다. 그외 대부분은 최대한 CG 분량을 줄이면서 실제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 촬영하고자 했다. 그런 해상 촬영이 70% 정도 된다. 또한 어선에서 소화할 수 없는 부분들은 실제 배와 동일하게 공간별 세트를 만들어 촬영했다. 전진호의 각 공간들은 마치 선원들의 개별 ‘영역’처럼 존재한다. 조타실은 다른 선원들이 침범할 수 없는 선장만의 공간이고 부엌에서는 함께 밥도 먹고 빨래도 삶는다. 그외 기관실에서는 기관장, 갑판에서는 갑판장이 그 공간의 일을 책임진다. 그처럼 나눠진 공간의 재미가 있다.
-기관실 세트와 외부 갑판 등 장면 연결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한정된 배가 주는 밀도와 영화적 재미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엄청나게 큰 배일 수도 있고 어느 어촌에나 있는 작은 배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안강망 어선 정도의 규모가 그런 밀도와 재미 모두를 만족시킬 것 같았다. 중고 배를 사서 안강망 어선처럼 개조했다. 실제 배에 변형을 가한 부분이라면 촬영이 가능하도록 동식과 홍매가 함께 있는 공간을 좀더 넓히는 정도였다. 역시 중요한 것은 장면 연결이었다. 갑판 위에서 갑자기 기관실로 들어가면 세트 촬영이 시작되는 건데, 세트 같은 느낌을 안 주고 현장감을 살리려면 그 사이의 연결 지점이 탄탄해야 했다. 외부도 중요했다. 모든 배들이 부식방지 페인트를 쓰는데, 사실 그 색깔이 몇 종류 되지 않아 하나같이 색감이 강렬하고 좋다. (웃음) 그게 낡으면서 더욱 ‘간지’가 생기는 거다.
-색감 얘기를 하면 ‘금’도 빼놓을 수 없다. 밀항을 하기로 하면서 건네받은 밀수 금시계가 바다 빛깔과 묘하게 충돌하는 느낌이다.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돈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이고, 조선족도 결국 돈을 벌기 위해 그 배를 탄 사람들이다. 게다가 IMF 때는 금모으기 운동 같은 것도 있었다. 자세히 보면 어촌 계장도 금목걸이를 하고 있다. (웃음) 의도적으로 그런 디테일들을 넣은 것인데, 사람들끼리도 “금빛 육지에서 봅시다” 그런 얘기를 한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 금빛은 이루지 못한 꿈이 되고 만다.
-배우 김윤석의 이미지가 <황해>(2010)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에서의 모습과 겹친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애초의 시나리오에서는 오히려 힘을 뺀 모습이다. 분명 그런 생각들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바꾸게 된 마지막 신에 대해 얘기하면서 봉준호 감독님이나 나나 김윤석 선배가 아니면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강하기만 한 사람이기보다 그만의 슬픔이 있는 캐릭터라 생각했고, 그에 대해 김윤석 배우도 동의했다. 그 슬픔은 크나큰 결핍으로 강조된다. 남성성의 화신으로 생각되는 선장이지만 아내와 집은 이미 무너진 상태나 마찬가지다. 한쪽이 도드라져 보이는 만큼 다른 한쪽은 완전히 무너진 남자다. 오히려 직접 그를 만나 얘기를 나누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말끔하게 해소됐다.
-선장의 배에 대한 집착처럼 동식도 홍매에게 유난히 집착한다. 일종의 ‘밀당’ 같은 걸 하기도 하고, 단순히 한눈에 반한 것 이상으로 빠져든다.
=<해무>를 시작하기 전에는 남녀의 아주 리얼한 연애 시나리오에 4년 정도 매달렸다. 어쩌면 그 기억이 동식과 홍매 사이에 끼어든 것인지도 모르는데(웃음) 기본적으로 <해무>의 또 다른 한축은 남녀의 이야기다. 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 둘 사이에 그런 밀당 같은 느낌이 있었으면 했다. 또한 욕망이나 집착 그 모든 것들이 남녀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그런 관계를 너무 대놓고 드러내는 것 같긴 하지만, 기관장 완호가 배를 ‘마누라’라고까지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다.
-홍보하는 입장에서건 어쨌건 종종 주변에서 <해무>를 마치 ‘봉준호의 영화’처럼 인식하고 얘기하는 시선에 섭섭한 기분은 없나.
=전혀. 봉준호 감독님과 일을 하면 내 모든 걸 던지게 된다. <살인의 추억>을 회상해보면 ‘내가 무언가에 그렇게 빠져 있을 때가 있었나’ 싶다. 당연히 그때는 힘들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척 ‘촉촉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웃음) 나로서는 봉준호 감독님과 그런 순간을 한번 더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