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러니까 아직은, 해피엔딩
2014-09-02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야간비행>은 학교 내 성소수자와 구조적 폭력을 어떻게 말하는가

※ <야간비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8월28일 개봉하는 이송희일 감독의 신작 <야간비행>은 보통의 청소년 성장담과 많이 다르다. 학교 폭력뿐만 아니라 왕따 문제, 성소수자 문제까지 다루는 데다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송희일 감독은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 시스템의 피해자라고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또, 친구끼리 두손 꼭 잡고, 팔짱 껴서 우정을 지키는 작은 연대만이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또 한명의 감독이 한국 중•고등학교 소년들의 성장기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접해도, 우리는 더이상 별반 궁금하지 않다. 왕따, 폭력, 파국의 엔딩. 지난 몇년간 반복 재생되어온 학교 폭력 이야기는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굳어져 정작 현실과의 접점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는 현실 속 폭력의 양상들을 떠올린다면, 이 장르가 극단적인 설정이나 풋풋함만으로 우리를 설득해내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송희일 감독이 학교 폭력에 대한 영화 <야간비행>을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추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또한 위의 궁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성소수자, 탈영병 등을 통해 한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마주해온 그에게 이 소재가 꼭 한번은 거쳐가야 할 근본적인 영역이었음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게다가 한국 사회에서 어른-남자가 되기 위한 억압을 완전히 내면화하지 못한 이송희일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나이를 불문하고 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에는 진짜 소년을 다룰 차례인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인물들과 달리, <야간비행>의 소년들은 길 위를 서성대면서도 ‘학교’라는 특정 장소로 돌아와야 한다. 다시 말해, 한국의 ‘학교’라는 장소의 전형성 안에서, 그것이 빚어내는 상투들과 싸워야 하는 과제가 <야간비행> 앞에 놓인다.

기존 학교 영화와의 변별점

<야간비행>이 그 과제를 돌파하는 방식은 전작들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들의 관계망을 보다 복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지난 작품들에서는 인물들이 마주한 현재의 행위, 욕망, 감정의 교환과 표출 그 자체가 영화 속 세계를 지탱했다면, <야간비행>에서는 거기 얽힌 개별 사연들이 그만큼 무게 있게 다뤄진다. 그러나 동시에 개별 사연들이 인물들을 하나의 유형으로 환원하거나 행동의 동기를 하나의 원인으로 소급하는 기능이 되지 않도록 경계한다. 인물들의 관계와 심정은 종종 모호하고, 그들 각각이 서 있는 자리는 하나의 조건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가학적이고 사악한 가해자를 한편에 던져두고, 나약한 피해자를 한편에 둔 다음, 액션과 리액션만을 보여주다가 극단적인 복수로 사태를 뒤집는 일련의 학교 폭력 영화들로부터 이 영화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한다.

고등학생 용주(곽시양)와 기택(최준하)은 중학생 때부터 단짝이다. 기택은 반장 성진(김창환)이 중심이 된 같은 반 무리로부터 수시로 괴롭힘을 당하는 처지다. 하지만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기택과 달리 용주는 담임의 기대를 받는 우등생이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적은 계급이다. 성진 무리는 기택과 어울리는 용주를 건드리지 않는다. 용주는 자유분방한 엄마와 단둘이 살며 사이좋은 친구처럼 지낸다. 또래의 소년들이 가질 만한 폭력성, 불안감, 결핍 대신, 그는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특유의 온기를 지녔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비밀이 있다면, 같은 반 친구이자 일진인 기웅(이재준)에 대한 마음이다. 중학생 시절에 용주, 기택과 친했던 기웅은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학교는 밥 먹듯이 빠지고, 배달 일을 하면서 종종 청부 폭력도 일삼는다. 기웅의 아버지는 노조활동을 하다가 공장에 불을 내고 도망다니고 있으며 엄마는 그런 현실 속에서 자기 한몸 지탱하기 힘들어한다. 기웅은 종종 자신에게 머무르는 용주의 애틋한 눈길을 알아채고, 경멸어린 눈으로 차갑게 반응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웅은 용주를 외면하지 못한다. 한편 반장이자 학급의 이진인 성진은 수시로 기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기웅과 용주가 가까워질까봐 전전긍긍한다. 성진이 기웅과 용주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느낄 무렵, 의외의 인물에 의해 용주가 게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고, 용주의 위상은 한순간에 추락한다.

복잡해진 퀴어멜로의 조건들

한국 사회에서 게이들은 사랑을 긍정하기 위해 어떻게 세상과 그리고 자신과 싸우는가. 이송희일의 지난 작품들을 관통하던 화두는 큰 틀에서 보면 <야간비행>에도 해당되지만, 학교라는 제도가 중심 배경이 되면서 여러 갈래의 질문이 더해진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하기 직전 엘리베이터의 CCTV에 찍힌 아이의 모습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감독 자신이 밝혔듯, <야간비행>의 방점은 학교라는 구조적 폭력에 희생되는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다. 주인공 용주가 게이이며 그의 시선이 영화의 중심을 지탱하고 있다는 점은 이 영화의 퀴어적인 면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만, 영화는 더 넓은 의미에서, 어떤 불확정적인 상태에서의 퀴어적 공기 또한 잡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동성애에 적대적인 이성애 중심적인 집단이지만, 그 내부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 동성애적 징후를 영화는 감지한다. 그 징후가 성적 욕망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남자로만 이루어진 집단에서 그들의 이해관계, 인정욕구, 의리와 배신의 저변에 자리한 욕망과 관련된다.

이송희일의 전작들에서 퀴어멜로는 언제나 계급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영화 속 커플들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사회적으로 권력의 우위를 점했고, 성적 욕망은 일시적으로나마 그 불균형한 구도를 흔들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사회•경제적인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나, 그들의 하룻밤, 길 위의 여정은 잠시일지언정 욕망 안에서 평등하다. 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학교라는 제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십대 소년들이 주인공이 되자 이송희일의 세계를 이루던 구도는 보다 복잡해진다. 용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로부터 인정을 받고, 기웅은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익히며 일진이 된다. 성적과 힘, 집안 배경 등 모든 측면에서 우위를 점한 성진은 학급 안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 그런데 기웅에 대한 용주의 마음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부터 위태롭게 유지되던 이들의 위상은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다. 성진은 기웅이 자신의 무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기웅을 찾아가 “너 없으니까 불안해”라고 고백한다. 용주와 기웅의 관계를 성진에게 폭로하며 유일한 친구 용주를 배신한 기택은 왜 그랬냐는 용주의 물음에 “네가 먼저 배신했잖아”라고 외친다. 폭력적이고 위악적이며 비관적인 이들을 지배하는 건 불안감과 배신감이며 이 감정의 근원은 모호하다. 성진은 권력이 아니라 실은 기웅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말하고 있으며, 기택은 기웅과 용주의 비밀스러운 관계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아직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혼란스럽지만 학교는 이런 혼란함을 제대로 느껴볼 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기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용주의 마음을 거부하면서도 이상하게도 그를 염려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유령처럼 그의 곁에 머무르는 기웅의 감정은 끝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용주에 대한 마음은 사랑인가, 우정인가. 아니, 이 소년들에게 두 감정은 무 자르듯 구분될 수 있는가. <야간비행>은 이들의 행동이나 감정의 모호한 지점을 특정하게 호명하지 않고 어떤 잠재성의 영역으로 펼쳐둔다. 그리고 그 잠재성의 영역을 억압적인 잣대로 규정하려는 학교제도와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틈도 없이 괴물이 되어가는 소년들의 비극을 응시한다. 유일하게 용주만이 투명하다. 자신을 외면하는 기웅 앞에서 “또 누군가 찾겠지. 친구가 없으면 이 세상은 끝이잖아. 넌 죽어도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는 상처를 입고 분노로 내지르는 소년들 속에서 상처를 입고도 자신의 감정만큼은 소중히 품는 자다. 과하다 싶을 만큼 순수하고 솔직하다. 그가 기웅에게 과감한 고백을 하고 처참하게 맞은 다음, 감정을 일그러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표정으로 돌아볼 때, 그 맨 얼굴의 감정은 기웅의 폭력을 압도한다. 하지만 결국 그의 투명함도 집단적인 폭력의 제물이 되고 만다. 늘 친구처럼 아들을 이해해주던 엄마조차 그의 곁에 등장하지 않는다.

풍경과 호흡하는 소년들

다리 밑에서 들리는 기차 소리, 노을 지는 강변의 풍경, 그림자로 비친 나뭇잎의 흔들림, 철거를 앞둔 낡은 게이바, 초라하고 쓸쓸한 골목길, 그 속에서 함께 달리고 말없이 앉아서 한곳을 쳐다보는 소년들. 이송희일의 세계에서 외로운 인물들은 언제나 길 위의 풍경과 호흡한다. 일탈과 안식의 시간이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고독과 자유의 시간이자, 말 없이도 마음이 보이는 시간이자, 학교라는 획일적인 시간과 싸우는 멈춰진 시간으로서의 풍경이 거기 존재한다. <야간비행>에서 그 풍경들은 마치 영화 속 용주가 찍은 과거 행복했던 때의 사진들처럼 사라질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풍경이며, 그런 맥락에서 향수의 정취를 머금고 있고 거기 흐르는 음악과 공기는 종종 감상에 젖어 있지만 영화는 그걸 감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그 정도의 낭만도 허락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묻는 것도 같다.

“세상이 이렇게 병신 같으면 엔딩이라도 웃어야 되는 거 아냐?” 같은 반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은 기택이 용주에게 하는 말이다. 기택의 좌절된 기대는 어쩌면 <야간비행>을 보는 내내 우리가 가진 기대인지 모른다. 주인공들이 연루된 극단의 사태를 보여준 다음, 몇년 뒤로 무책임하게 이행해버리는 일련의 성장기 영화들과 달리, <야간비행>은 체념도, 타협도, 안정도 아직은 불가능한, 가장 아프고 막막한 현재의 그 순간에 멈춰 선다. 벼랑 끝에서 더는 갈 곳 없이, 단둘이 남겨져 외로움으로 연대하는 용주와 기웅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우리는 비로소 웃게 될까. 이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CCTV 속 그 가여운 아이와 달리 이 가혹한 세상에서 어찌되었든 살아남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위대한 해피엔딩이라고 말해야 할까. 이제 그들을 기다리는 건 <후회하지 않아>와 <탈주>의 시간이지 않느냐고 감독에게 슬프게 따져 물어야 할까. <야간비행>은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이 소년들의 외로운 눈물에 함께 흐느껴야 할 때라고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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