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터뷰는 <야간비행>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이송희일 감독이 <야간비행>을 만든 건 한 CCTV 영상 때문이다. 학교 폭력 때문에 고통받은 고등학생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살하기 직전 찍힌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이송희일 감독은 “몇년 전 그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동안 많이 아팠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베를린국제영화제(상영시간 141분), 전주국제영화제(상영시간 130분) 상영이 끝난 뒤 편집을 더 했다고 들었다.
=주인공 두 사람을 주로 쫓아갔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여러 인물들의 삶을 모자이크처럼 담아내고 싶었다. 처음에는 신 수가 총 106개인데 3시간이 훌쩍 넘었다. 절대 악도, 절대 선도 없는 이야기임에도 주인공 두 사람 위주로 편집을 하고, 주변 인물 분량을 가지치다보니 주변 인물이 단면적으로 묘사된 건 아쉽다.
-영화 제목이 생텍쥐페리의 동명 소설을 떠오르게 한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8부작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다. 제목이 <야간비행>이었고, 주인공이 파일럿이었다. 그가 야간비행을 하면서 드라마가 끝난다. (웃음) 생텍쥐페리가 쓴 소설 <남방우편기>나 <야간비행>의 정서를 좋아해서 드라마 대사에 소설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드라마의 프리퀄로 극장용 영화를 먼저 찍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들었고, 학교 폭력을 소재로 한 지금의 이야기를 썼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 까닭에 김일권 프로듀서와 제목을 놓고 고민을 했는데 제목을 고치는 대신 시나리오 내용을 추가했다. ‘야간비행’이라는 이름의 폐업한 바를 용주의 아지트로 설정한 것이다. 밤은 세상의 비밀을 속삭이는 순간이고, 사랑이든 슬픔이든 숨겨진 사연이 기지개를 켜는 시간이니 그 정서를 담고 싶었다.
-기웅(이재준)과 용주(곽시양)가 자전거 여행을 가는 시퀀스를 기준으로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눈다면, 영화의 전반부는 용주의 자전거를 훔쳐간 기웅과 자전거를 찾으려는 용주의 숨바꼭질을 그린다. 전반부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이유가 뭔가.
=두 친구를 잇는 장치로 자전거를 이야기에 여러 용도로 사용하고 싶었다. 두 사람이 원래 친구였다는 정보를 알려주기 위한 목적도 있고, 일진 기웅과 모범생 용주의 멜로 라인을 만들 수 있기도 하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까닭에 지금껏 영화에 자전거를 많이 등장시켰다. 어쨌거나 이야기가 후반부에 밝혀지는 미스터리 구조라 처음부터 많은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둘은 왜 저럴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싶었다.
-인물 정보가 많은 용주와 달리 기웅은 말수가 적어 그가 왜 엄마와 단둘이 사는지 같은 사연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기웅은 한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자녀에게 힌트를 얻어 만든 캐릭터다. 그 아이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쌍용자동차 노동자라는 이유로 말이다. 삶의 공동체가 안정되지 못한 여느 노동자들이 그렇듯이 기웅의 가족 역시 해체된 가정이다.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수다쟁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하게 하기 위해 말수가 적은 친구로 설정했다.
-기웅, 용주, 기택(최준하)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반장 성진(김창환)도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는 학교 폭력과 왕따 문제를 피해자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바라보지 않나. 기웅처럼 왕따를 당했다가 가해자가 된 친구도 있다. 성진처럼 공부를 잘하는데 아이들을 괴롭히는 친구도 있다. 자료 조사를 하면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사실 성진은 콤플렉스도 많은 데다가 엄마와의 갈등이 있는 친구인데 기웅과 용주 위주로 편집을 하다보니 그의 사연이 많이 잘렸고, 그게 아쉽다. 시나리오 초고가 나온 뒤 연출팀과 회의를 했는데 이런 얘기가 나왔다. 폐쇄된 공간 안에 결핍들이 모이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군대든, 학교든 피해자가 가해가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건 결국 시스템 문제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다.
-영화 속 어른들은 하나같이 무책임하고 아이들에게 성적만을 강요한다. 단, 용주 엄마 한 사람을 제외하고. 용주 엄마가 포장마차에서 용주에게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아들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지 마라”라고 말하는 시퀀스가 인상적이었다. 감독이 용주 엄마를 대신해 청소년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장마차 시퀀스에서 용주 엄마가 춤추는 장면도 있었다. 편집에서 잘렸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출품하기 전, 40분짜리 편집본을 보내준 뒤 영화가 길어 좀 잘랐다고 말하니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첫마디가 그 포장마차 신 잘라냈냐는 것이었다. (웃음) 용주 엄마는 내 분신이다. 그의 시선이 되어 이 영화를 찍었다.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쿨하게 자신의 삶은 또 챙기고.
-기웅이 학교로 쳐들어가는 영화의 후반부 시퀀스는 절박했다. 그 장면에서는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 관건은 무엇이었나.
=그 신을 찍기 위해 발터 베냐민의 신적 폭력 개념을 다시 읽었다. 대체 기웅이, 우리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져주고 싶었다. 기웅을 영웅으로 만드는 이야기가 아니잖나.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야기잖나. 스탭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신을 얼마나 잘 찍는가에 따라 영화의 성패가 갈린다는 사실 말이다.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는 계속 생긴다.
-시퀀스가 끝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음악은 이야기를 환기시켜주는 동시에 불안한 미래를 계속 암시한다.
=이탈리아 출신인 세르히오 알타무라의 <드래곤 플라이>라는 제목의 곡이다. 감정적으로 치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곡한 곡으로,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많이 들었다. 보통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음악을 먼저 결정한다. 폴더를 만들어 이야기 정서에 어울리는 곡을 차곡차곡 넣는다. 촬영할 때도 그 음악을 계속 들었다. <드래곤 플라이>는 세르히오 알타무라에게 편지를 써 공짜로 영화에 수록할 수 있었다.
-용주가 기웅에게 하는 대사, “친구가 없으면 이 세상은 끝이잖아”가 꽤 울림이 컸다. 영화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너무 문어체스럽고 감독의 자의식이 툭 튀어나온 느낌이 있어 연출부 안에서도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던 대사다. (웃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기웅이 떠나는 용주를 붙잡으며 하는 대사, “너 가지마. 우리 계속 친구하자”와 조응하기도 하고. 결국 그 한마디인 것 같다. 친구들끼리 손잡고, 팔짱 끼는 게 가장 큰 위로가 아닌가 싶다. 그게 작은 연대이기도 하고.
-주로 청춘과 청소년을 다룬 이야기를 해왔다. 머리가 희끗한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어린 친구 얘기만 한 건 아니지만 청춘의 아픔을 주로 그려왔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언제까지 퀴어 멜로를 할 생각인지 같은 얘기도 들었다. 나는 게이이기 전에 영화 딴따라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다음 영화는 약간 나이 든 사람 이야기다. 멜로영화이자 상업영화. 지금 폴더를 만들어 음악과 메모를 넣고 있다. <야간비행>은 나의 일부가 끝나는 영화 같은 느낌이다.
-개봉이 코앞이다. 어떤가.
=처음 개봉을 하는 건 아니니까…. 똑같은 것 같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관객을 만나야 하니까. 어떻게 영화를 볼지 긴장되기도 하고, 의미가 제대로 전달됐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교차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