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감았는지 모를 만큼 헝클어진 머리카락, 볼 위까지 듬성듬성 난 수염, 기름으로 반질거리는 얼굴 등 범상치 않은 외모 때문일까. 멀리서 봐도 그가 노숙자 대포 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최민수가 돌아왔다. <조폭 마누라3> 이후 8년 만의 영화 출연이다. 촬영장 근처의 한 식당에서 그와 함께 늦점심을 먹었다.
-배가 많이 고프셨을 것 같아요.
=12시에 밥을 안 주고. 농담이고. 밥 먹고 합시다 얘기 안 나오는 현장이 제일 좋아요.
-그만큼 일에 집중한다는 뜻이니까요.
=네. 예전에는 현장에서 밥 찾아먹는 게 굉장히 힘들었어요. 밥차도 없었고. 경험상 밥때를 챙기는 작품은 대체로 결과가 좋지 않았던 것 같아요. 현장에 도착했을 때 모든 스탭이 잠시 멈추는 순간이 있어요. 배우가 도착했구나 같은 설렘이 느껴지는 현장이 좋은 것 같아요.
-<조폭 마누라3>(2008) 이후 8년 만의 영화 출연입니다. 새로울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없어요. 다만, 스탭들이 다 모르는 얼굴이라…. 연령대가 어려졌어요.
-노숙자는 처음 맡아보는 배역 아닌가요. 도전이었을 것 같습니다.
=도전, 그런 건 아니에요. 살면서 노숙자를 한번도 보지 않았던 게 아니잖아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것처럼 이런 배역, 저런 배역이 있는 거죠.
-아이들 이야기라는 점이 오랜만에 영화 출연을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나요.
=그냥 대본 재미있고, 함께하는 사람들 좋고. 저는 그렇게 까탈스럽지가 않아요. 이번 영화는 모든 게 자연스럽고 편해요. 부자연스러운 걸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게 불편해요.
-머리카락과 수염을 이 정도로 기르신 것도 처음 보는 모습입니다.
=연기를 위해 머리카락도 기르고, 수염도 깎지 않았어요. 말씀대로 이렇게 긴 적이 많진 않았는데…. 세수도, 분장도 안 해요. 촬영이 있는 날에는 세수를 안 하고 와요. 지금 머리카락이 붕 뜬 것도 자고 일어난 그대로예요.
-가끔 시내에서 멋진 오토바이를 타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오늘 타신 낡은 오토바이와 대비되던데요.
=(옆에 있던 삼거리픽쳐스 엄용훈 대표가 “저 낡은 오토바이도 최민수 선배가 타면 다르더라”라고 말하자) 엄용훈 대표가 ‘간지’나면 캐릭터 분석에 실패한 거래요.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싶어요. (웃음)
-엄용훈 대표로부터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이야기가 어떠셨나요.
=좋았어요. 아이들이 모여 이솝 동화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이 오랜만에 모여 어린 시절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어요. 주식이 얼마나 올랐나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죠.
-원작과 달리 시나리오는 한국적으로 각색했더라고요. 원작은 읽어보셨는지요.
=엄용훈 대표와 김성호 감독 두 사람이 말리더라고요. 읽지 말라고. 또 안 읽었던 이유는 원래 작품이 끝나면 원작을 읽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에요.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지내는 모습이 꼭 아버지 같더라고요.
=친구예요, 친구. 특별히 챙겨주고 잘 지내보려는 척을 안 해요. 늘 만나는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지내요.
-지소(이레)가 훔치려는 개 주인 노부인 역을 맡은 김혜자 선생님과 함께 작업하는 건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 이후 처음입니다.
=23년 만인가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만날 때까지는 시간의 흐름을 정말 몰라요. 선생님과 정말 친했나봐요.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어요. 처음에는 둘 다 몇년 만에 만났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런 것 같아요. 추억이 기억보다 마음속에 더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최민수 어록에 실릴 만한 말씀입니다.
=아니, 그건 어록이 아니에요. 마음을 다해서 얘기했어요. 요즘 쓰는 말들은 자극적이에요. 즐거운 말과 심각한 말이 있다면 저는 약간 심각한 쪽이죠. 멋대가리 없는…. 우리 영화도 멋있는 영화 아니에요. 맛있는 영화예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