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이 발동하면 일단 전진할 것. 한번 뛰어든 취재는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말 것. 제보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호할 것. 밝혀낸 진실은 세상에 알릴 것. <제보자>에서 박해일이 연기한 윤민철은 이 명령어에 충실한 시사 방송 프로그램 PD다. 뚝심 있는 저널리스트라는 얘기다. 이장환(이경영) 박사와 함께 줄기세포 연구를 해온 연구원 심민호(유연석) 팀장으로부터 “줄기세포는 하나도 없다”라는 제보를 받았을 때 증거가 없음에도 앞뒤 돌아보지 않고 취재에 뛰어든 것도 그래서다. 윤민철 캐릭터에 어떤 배우가 어울릴까 떠올렸을 때, 임순례 감독은 “박해일 외엔 다른 배우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밝혔다.
강산이 한번하고도 반이나 더 바뀌었다. 데뷔작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이후 박해일이 임순례 감독과 <제보자>로 재회한 건 무려 14년 만이다. 임순례 감독이 극단 동숭무대 연극 <청춘예찬>을 보고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고등학생 성우 역에 박해일을 캐스팅한 건 익히 알려진 일화다. 임 감독은 “(박)해일씨가 주연이 아니었던 까닭에 일대일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다른 아역배우를 챙기며 악기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책임감 있다고 느꼈다”고 신인 시절 박해일을 떠올렸다. <제보자>로 다시 만나기까지 박해일과 임순례 감독은 사석에서 한번도 만난 적 없지만,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쌓은 신뢰는 두터웠다. <제보자> 제작 발표회에서 박해일이 “시나리오도 읽지 않고 임순례 감독님 차기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임순례 감독님과 다시 작업하는 게 반가웠다. 실제로 감독님과 통화하면서 출연 제의를 받았다. 시나리오도 한번에 쭉 읽혔고. 디테일한 부분은 두 번째로 생각하기로 하고 고른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한때 대한민국을 경악시킨 줄기세포 조작 스캔들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때 그 사건을 상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감독만 믿고 출연을 결정하기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그것도 장고에 장고를 거듭해 작품을 고르기로 유명한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말이다. “부담감이 컸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 진짜 언론인의 모습을 어떻게 그릴 건지 등 많은 이야기를 감독님과 나눴다.”
임순례 감독의 제보에 따르면 촬영 전 박해일은 언론인의 옷을 입기 위해 많은 공부를 했다. 매일 신문과 뉴스를 챙겨본 건 물론이고 생명공학 용어, 줄기세포 실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제작사가 초청한 대학교수의 강의도 들었다. 또 탐사보도 전문 방송 프로그램의 취재 현장도 따라나섰다. “승합차를 타고 취재를 갔는데 기자들이 거의 반형사더라. (웃음) 새벽에 취재 현장에 가서 작전을 짜고, 수시로 형사와 통화를 하고, 취재원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과정이 꽤 긴장감이 넘쳤다.” 하지만 박해일은 기자처럼 보일 만큼만 흡수했다. 보통 직장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도 함께 보여주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호흡이 느렸다면 언론인의 설정을 자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언론인이라는 전문적인 모습과 직장인의 고충, 두 가지를 보여주는 게 중요했다. 감독님도 대단한 직업이 아니라 진실을 추구하는 게 직업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셨다. 그래서 전문인으로서 크게 가져가야 할 설정만 챙긴 채 윤민철이라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탔다.” 준비가 충분했다고 스스로 깨달았을 때 박해일은 임순례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촬영에 들어가도 될 것 같아요. 진실을 끈질지게 추적하는 진짜 언론인의 모습을 한번 보여주자고요.”
진실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질주하는 윤민철처럼 최근 박해일 역시 쉴 틈 없이 달리고 있다. 지난 6월 극장 개봉했던 전작 <경주>는 “촬영 전, 장률 감독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실제 성격이 이야기와 캐릭터에 반영돼 신선한 경험”이었다. 차기작은 얼마 전 촬영이 끝난 <나의 독재자>(감독 이해준). 박해일과 설경구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사실만으로 촬영 전부터 충무로에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나보다 (설)경구 형이 김일성으로 분장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웃음)” 충분히 많은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보여줄 것이 더 많아 매번 더 기다려지는 배우, 그게 박해일의 저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