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끝나지 않았다
2014-10-30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정리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번역 : 이택광 (문화평론가ㆍ번역가)
사이와 차이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영화비평

영화와 관련해 자신을 철학자라기보다는 시네필 혹은 아마추어라 부르길 원하는 자크 랑시에르가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아 내한했다. 영화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위치에서 영화를 논했던 그가 영화제의 심사를 하는 것은 꽤 예외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는 영화가 전문가들이 아닌 모든 이들에게 속해 있고, 아마추어리즘이 단지 영화를 쾌락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지식의 교차로로서 영화의 이론을 구성하는 위치에 있다고 여긴다.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래머이기도 한 김성욱 영화평론가가 부산을 찾은 자크 랑시에르를 만나 긴 대화를 나눴고, 그중 일부를 이 지면에 옮긴다. 인터뷰에 앞서 소개할 자크 랑시에르의 영화비평에 대한 김성욱 평론가의 글은 시네필리아 혹은 아마추어의 정치학을 말하는 랑시에르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질 들뢰즈 이후 영화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논의를 전개한 철학자는 단연 자크 랑시에르일 것이다. 그가 다뤘던 작가들의 목록만 보더라도 호기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프리츠 랑, 앤서니 만, 로베르 브레송, 로베르토 로셀리니, 앨프리드 히치콕, 크리스 마르케, 장 뤽 고다르, 장 마리 스트라우브, 그리고 최근의 벨라 타르와 페드로 코스타까지. 철학자의 저술이 비평가들을 설레게 만드는 것은 그가 어떤 개념을 영화에 적용해 부연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그가 어떤 작가를, 어떤 작품을 중요하게 논할 때다. 그런 점에서 처음 랑시에르의 영화 글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성녀와 상속녀’라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에 대한 그의 비평을 읽고 나서였다.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에 대한 가장 뛰어난 글이었다. 그가 히치콕의 <의혹>에 나온 그 유명한 우유잔 시퀀스를 분석한 글 또한 히치콕의 서스펜스 기법과 이미지를 흥미롭게 풀어놓은 비평이었다. 말하자면 랑시에르는 철학자라기보다는 탁월한 감식안을 지닌 비평가로서 내게 흥미롭게 다가왔다.

랑시에르에게 영화는 정치학, 미학이 다툼을 벌이는 투기장이다. 그가 ‘우화’라는 표현으로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그러나 이론의 구축보다는 영화의 상이한 감각적 체제를 사고하고 영화 내부의 고유한 긴장을 읽어나가기 위함이다. 이러한 특성은 시네필릭한 열정에서 기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가령, 랑시에르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1950년대 후반 이래로의 영화에 대한 프랑스식 열정과 관련이 깊다.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시기 랑시에르는 지배적인 미학적 정당성을 뒤흔드는 시네필 비평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평가들은 할리우드 영화감독들의 작품을 재평가했다. 독일 예술가의 존엄성(프리츠 랑), 혹은 대중적인 장르산업 영화들의 대변자로서의 뮤지컬(빈센트 미넬리), 웨스턴(라울 월시, 하워드 혹스, 앤서니 만), 멜로드라마(더글러스 서크), 서스펜스(히치콕)까지, 이 시기 비평적 논의는 기성의 평가기준의 위계와 지배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영화는 예술과 대중적 관객을 통합하는 새로운 기획안에 있었고, 영화의 소비자들인 관객은 자신들의 비평적 수단으로 예술과 미학적 판단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랑시에르의 영화에 관한 저술은 그런 50~60년대 프랑스식 영화비평 문화의 유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랑시에르의 영화에 관한 저술을 범주화하거나 하나의 ‘영화론’으로 구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의 글은 일종의 형식비평이나 작가비평처럼 보이는데, 대체로 영화의 구성적 요소들의 조합(몽타주, 프레이밍, 숏, 음향, 빛 등)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랑시에르가 서사적 논리를 전적으로 거부하면서 영화의 매체적 특정성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랑시에르의 영화분석은 두 가지를 혼합한다. 그 하나가 영화산업의 표상적 논리, 즉 내러티브의 논리라면, 다른 하나는 이와 불화하는 영화의 미학적 논리이다. 영화작가의 고유한 미덕은 이런 불화에서 나온다. 앤서니 만, 프리츠 랑, 니콜라스 레이에 관한 글에서 그는 장르와 관습의 지배를 의문투성이로 만들어버리는 위기의 표현을 분석한다. 가령, 앤서니 만의 웨스턴에 대한 글에서 그는 이야기의 중단, 부유의 순간들, 그가 ‘우연이나 운에 인물을 맡기는 수동성의 재치’라고 부르는 순간들, 영웅이 ‘해야 할 일’과 ‘성취하는 일’ 사이의 미묘한 거리에 주목한다. 이는 할리우드의 제작 규범과 장르 규범을 일탈하는 작가의 특성을, 할리우드 장르에 내재한 미세한 흐트러짐과 붕괴를 감지하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렇듯 사이와 차이를 민감하게 감지한다. 그의 영화비평이 특별한 것은 영화와 예술 사이, 영화와 정치학 사이, 영화와 이론 사이를 사유한다는 데에 있다. 나는 그가 고다르처럼 영화, 정치, 예술 사이의 일종의 아름다운 ‘교환’을 시도했다고 생각한다. 거리와 차이에 주목하는 것은 영화를 규율과 단일한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영화는 상이한 감각적 체제의 혼합이다. 이를테면 문학적 상상, 회화의 감각적 보기, 음악적 정서 등의 종합예술이다. 에이젠슈테인에서 고다르에 이르는 영화적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은 그래서, 에이젠슈테인이 에밀 졸라, 찰스 디킨스, 엘 그레코, 조반니 피라네시에게서 영화 몽타주의 모델을 찾은 것이나, 고다르가 렘브란트 회화에 대해 언급한 엘리 포레의 글을 활용해 영화를 만든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체로 철학자들의 영화개입을 사상의 ‘지적 실천’으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다. 나는 랑시에르의 영화비평이 그 반대라 생각한다. 랑시에르는 이미지의 종언이 이야기되고, 표상불가능성과 숭고가 거론되고, 매체의 소진이라는 주장이 떠도는 이 시대에 여전히 이미지의 반박의 역량을 제시하면서 영화를 새롭게 보게 한다. 벨라 타르에 관한 글에서 랑시에르는 그가 ‘세계의 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썼다. 나는 랑시에르의 영화비평이 그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미지의 아름다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세계와 마주해 영화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시학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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