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놀라움’이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2014-10-30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정리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번역 : 이택광 (문화평론가ㆍ번역가)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심사위원 맡은 자크 랑시에르와의 대화

-철학자인 당신이 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건 굉장히 예외적인 일이다. 어떤 영화에 대해 판단하고 선별하며 지지하는 것은 대개 영화비평가들의 영역이다. 영화를 심사하는 것은 당신에게 신선한 경험이었나 혹은 곤혹스러운 경험이었나.
=영화를 선별하는 건 영화이론을 공부한 사람이나 비평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영화라는 매체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면모도 있지만 동시에 아마추어리즘 또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철학이란 여행과 비슷하다. 여행을 떠나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듯, 철학 역시 특정 분야에 한정된 학문이 아니라 예술, 영화 등 다양한 분야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부산영화제가 나를 심사위원으로 선택한 건, 내가 영화에 대한 저서를 쓴 이론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길 원해서가 아니었을까.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도 심사위원직을 수락했다.

-영화를 심사하게 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심사위원들과도 객관적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이번 영화제의 심사 기준은 무엇이었나. 어떤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나.
=지금까지 뉴커런츠 부문 열두편의 영화를 심사했는데, 영화를 판단하는 특정 기준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활동적이고 액티브한 장르이기에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객관적 기준을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다만 나는 그 영화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게 만드는, 그 이후를 예측할 수 없게 하는 영화인지를 본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걸 기대하게끔 만드는 영화 말이다. 그런 작품들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놀라게 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색의 시간을 허용하는 작품들을 선호했다면, 어떤 심사위원들은 야심만만하고 액션이 가미된 작품을 선호하기도 했다. 이런 부분에서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우리는 논의 끝에 결국 합의에 도달했다.

<도그빌>

-당신은 여전히 영화가 ‘놀라움의 예술’이라고 생각하나. 요즘 비평가들을 보면 최근에 제작되는 영화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이거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놀라움(surprise)과 충격(shock)은 다르다. 이것은 속도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충격’이 굉장히 스피드하게 나타나는 것이라면, ‘놀라움’은 무언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과 관계가 있다. 느린 페이스로 무언가를 보여주며 도대체 영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게 하는 걸 나는 ‘놀라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벨라 타르의 영화에서처럼 그런 영화들은 우리의 경험을 반복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우리는 천천히 이뤄지는 화면을 통해 낯선 경험을 하게 된다. 최근의 영화들을 보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전개가 매우 느린 새로운 경험을 주는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이 영화들은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기존 극영화의 경계를 허물거나 침범하고 있다고 본다. 최근의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가 그렇다. 나는 이런 작품들이 새로움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하고, 사연들을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보자면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 삶을 연기하는 연기자와도 같다.

-당신의 저서를 보면 유러피안 시네마, 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한 글은 꽤 있으나 아시아영화에 대해 특별하게 언급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올해의 부산에서는 주로 아시아영화를 많이 보았을 텐데, 아시아영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아시아영화는 그들만의 특별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아시아영화만의 독특한 사례는 아니다. 50년대 미국 영화 역시, 당대 유럽의 모더니즘에 영향받은 감독들이 유럽적인 요소들을 미국의 영화산업에 녹여 넣어 또 다른 조합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최근 10년간의 사례로 미루어보았을 때, 아시아영화에서도 이처럼 새로운 조합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아시아영화는 미국이나 프랑스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그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사회의 모순에 대해 굉장히 많이 개입하고 있다는 건 아시아영화의 특징이다. 예술적인 코드와 사회성의 결합, 그게 아시아영화의 특징이 아닐까.

<미스틱 리버>

-최근 프랑스영화들에 대해서는 흥미를 못 느끼나?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최근 프랑스영화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운 게, 내가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좌중 웃음) 프랑스영화는 에릭 로메르의 유산을 많이 갖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프랑스 희극처럼 ‘소피스티케이티드’하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쓸데없고 지리멸렬한 말을 자꾸 늘어놓는 경향들이 있다. 소피스티케이트한 관계, 소피스티케이트한 대사들, 그리고 섹스에 관한 이야기들, 사회의 변화나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사적 문제에 국한되어 있다. 가령, 브누아 자코의 최근작을 보면 꽤 지루한데, 물론 새로운 것도 있지만 젊은 여성이 나오고, 남자를 유혹하고, 숲속에 들어가서 광적인 섹스를 한다든가 하는 이상하고 지루한 영화들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내 생각에 프랑스는 영화를 보호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때도 있다고 본다. 오늘날의 프랑스영화가 그 나쁜 사례이다.

-국내에서는 당신의 <영화 우화>라는 책이 번역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일반 독자들에게 당신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1950∼60년대 프랑스의 영화적 분위기, 영화적 비평은 당신의 영화적 관심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이 시기의 영화들에 대해 글을 남겼는데 구체적으로 당신은 어떻게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나.
=나는 예술에 관한, 영화에 관한 책을 썼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주된 관심은 미학과 정치, 정치와 미학의 관계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영화이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초에 처음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종의 시네필리아로서인데, 시네필리아란 어떤 영화의 이론보다는 영화에의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영화를 독학하고, 잡지에 글을 쓰던 사람들이다. 동시에 이때 프랑스 누벨바그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영화에의 훈련 또한 이런 시네필리아의 분위기에서 형성됐다. 시네필리아 현상은 전통적인 영화의 예술적, 미학적 위계를 무너뜨렸는데, 가령 할리우드영화라든가, 상업영화라든가, 오락영화로 치부되었던 영화들을 재평가했다. 그들은 히치콕, 미넬리, 자크 투르뇌르 같은 감독들, 서부극, 뮤지컬 코미디 등의 영화에서 새로운 영화언어의 발견을 보았다. 그 당시에는 마르크시스트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할리우드영화 따위를 보고 이야기를 하느냐 식의 분위기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태도야말로 기존 예술의 위계를 허물어뜨리는 과정이었다. 내 정치적인 견해에서 보자면 1960년대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흥미로운 건 바로 이런 점이었다. 1968년 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여러 진취적인 좌파들의 정치적 선동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발전되어 나갔다. 대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예술의 위계를 바꾸는 과정이 영화에서 생생히 목격되었다. 그리고 1975년에 흥미롭게도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잡지에서 처음으로 나를 인터뷰했는데, 그 과정에서 영화 자체에 대한 반성, 즉 영화를 돌아보고, 영화의 전통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식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경향이 흘러나왔다. 1970년대에는 수많은 정치영화들이 나왔는데, 나는 그런 영화들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전혀 진보적이지 않다거나 전혀 좌파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영화도 정치적으로 볼 수 있는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미국영화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나는 거기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덕분에 어쨌든 영화에 대한 글을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영화가 순수영화, 순수예술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전통들이 뒤섞인, 이질성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진보냐, 보수냐라는 식의 규정들이 아니라, 다른 의미에서 영화의 정치적 계기가 대중의 참여를 통해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필름 소셜리즘>

-<영화 우화>에 실린 여러 작가들에 대한 글을 흥미롭게 보지만, 어쨌든 당신의 글에 처음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실린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에 대한 글이었다. 방금 정치적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1968년 이래로 고다르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이 시기 크리스 마르케가 주도한 ‘슬론’이라든가 다양한 정치영화 집단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들을 동시대적으로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일단 고다르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한다. 복합적인 것이 서로 꼬여 있다. 고다르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작가지만, 그 당시에 좌파적이라거나 정치적인 예술가라고 받아들여지진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치적인 국면과 만나는 연결지점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고다르 영화가 정치적인 새로움을 주는 지점들이 있었고 정치적으로 새롭게 해석되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영화가 지닌 태도는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기에 고다르 영화의 핵심은 정치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거리화의 효과로, 기존에 있던 것의 경험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부분이 더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고다르는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그 영화를 통해 우리가 정치를 연역해낼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작품이었다. 영화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영화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이 고다르의 영화였다. 그는 자기만의 관점에서 자기만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감독이었다.

-당신의 고다르 영화에 대한 언급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는 상대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것 같다. 고다르는 70년대에 <여기와 저기>라는 작품에서 유럽 작가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뤘다. 최근 작품에서도 이 문제가 언급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럽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좌파 지식인들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팔레스타인에 가서 팔레스타인영화를 찍었지만, 그것은 정치적 영화라기보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식의 작품이었다. 나는 고다르의 팔레스타인영화가 정치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개념을 위해 팔레스타인을 도구화하는 것을 되풀이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화를 찍고 그걸 해석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개념을 사용하는 식이다. 이런 것들이 아이러니한 위치에 있는 고다르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그런 아이러니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정치적이다. 어찌 보면 아티스틱한 테러리즘이라는 생각도 든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무언가를 하고 그게 큰 파장을 일으키는 그런 특성 말이다.

<엘리펀트>

-고다르의 3D영화를 보았나.
=아직 못 봤다. 고다르를 평소에도 만나고 프로젝트도 같이 하고 그랬는데, 나는 칸영화제에 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프랑스에선 영화가 개봉하고는 너무 빨리 내려가다보니(웃음) 아직 못 봤다. 앞으로 보려고 한다.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은 필름과 소셜리즘이 여전히 결합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영화와 소셜리즘의 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가 베르토프의 경우를 보자면, 그의 생각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인간적 활동의 모든 것들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소셜리즘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영화가 단지 예술일 뿐만 아니라 소셜리즘을 표상하고 소셜리즘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유토피아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가 그랬다. 고다르의 경우도 이와 비슷한데, 영화를 밀고 나가는 것처럼 사회주의도 밀고 나가는 거다.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쪽으로 밀고 나가는 거다.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은 거대한 크루즈에서 벌어지는데, 필름 소셜리즘이란 이런 배를 움직여서 가는 것과 같다. 사회주의는 ‘실낙원’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지 모르면서, 어떻게든 계속 배를 몰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가 정박하는 지점이 바로 사회주의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유우님>

-당신의 글에서 흥미롭게 생각했던 것이 최근 영화들의 경향을 ‘윤리적 전환’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와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을 이야기했다. 최근의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당신이 말한 ‘윤리적 전환’의 경향이 여전하다고 생각하나.
=내가 윤리적 전환이라 부른 것은 정치에서도 벌어졌던 것으로, 가령 부시 행정부가 ‘악의 축’이라고 캠페인을 했던 것이다. 이는 동시에 영화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정치적인 접근이 윤리적인 접근으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 내가 예를 들었던 것은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미스틱 리버> 같은 작품들로, 여기에는 공통적인 경향이 있다. 이런 전환은 최근의 정치적인 독해의 상황이 대부분 윤리적인 독해라는 점에서도 그러한데, 대표적인 것이 절대적인 악에 대한 설명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영화 <해무>를 보았는데, 여기서도 절대적인 악에 대한 규정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에 관한 다큐나 극영화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져왔는데, 내 생각에는 감독들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발현이 아니다.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영화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고, 이런 영화들은 이민자들을 다루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보완해주고 우리에게 위로를 제공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과거에 일어났던 나치 캠프나 인종 청소를 계속 되풀이해 보여주고는 있지만 우리가 가진 생각을 보완해주는 식으로 호출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적 독해가 와야 할 자리에 윤리적 전환이 있다. 그런 갈등들을 무마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걸 수월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식의 형태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탄 탱고>

-마지막으로, 만약에 시네마테크에 당신을 초대해 일종의 백지수표를 위임해 10편의 영화를 선택해 상영한다면 어떤 영화들을 추천하겠나.
=생각 좀 해봐야겠다. 아마도 다음에 꼽는다면 이 명단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굳이 꼽자면 로베르 브레송의 <무셰트>(1967),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오유우님>(1951), 로셀리니의 <유럽 51>(1952)을 선택하겠고, 오즈 야스지로도 괜찮은데, 뭘 고를지 모르겠다. 한편을 꼽자면 <동경 이야기>(1953)를, 그리고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도 한편 선택하고 싶은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샤트야지트 레이의 <뮤직 룸>(1959),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1994), 앤서니 만의 <머나먼 서부>(1955), 라울 월시의 <화이트 히트>(1949),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1948),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1954), 프리츠 랑이라면 <엠>(1931)과 <문플리트>(1955)를, 그리고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한편을 꼽고 싶은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10편의 영화를 미조구치의 영화로만 채울 수도 있겠다. (웃음)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