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터너>에는 화가의 유명한 그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여준 뒤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그냥 완성된 그림이 배경에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림은 직접 등장하지 않고 그림처럼 묘사된 화면이 등장할 때도 있다. 수많은 그림 가운데 <미스터 터너>에서 주요한 모티브로 사용된 일곱 작품을 소개한다.
영화는 대략 1830년경부터 시작된다. 터너의 나이 50대 중반일 때다. 따라서 이전의 작품들은 완성된 채 배경으로 제시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여성 자연과학자 섬머빌이 터너의 집을 방문하여 개인 갤러리를 구경할 때다. 이때 강조된 작품이 <눈보라: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군대>(1812)이다. 터너가 30대 중반에 그린 작품으로, 한창 낭만주의의 테마인 ‘숭고’의 미학에 주목할 때다. 여기서도 자연은 무한과 경외의 대상으로 표현돼 있다. 화면의 아래에 한니발의 군대들이 이동하고 있고, 캔버스의 대부분은 눈보라 치는 하늘의 검푸른 색깔로 덮여 있다. 영화에선 터너의 아버지가 이 그림 속에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당신도 한번 찾아보시길).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830년경, 터너는 후원자인 에그레몬트 백작의 저택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풍요로운 조건에 있었다. 여기서 터너는 귀족 여성들 앞에서 그림 솜씨를 자랑하는데, 그 장면은 터너의 그림 <화가와 찬미자들>(1830년경)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그림은 말년의 혁신에 밑바탕이 되는 여러 수채화 가운데 하나다. 밝은 빛이 찬란한 이 그림은 벌써 인상주의보다 더 현대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영화 <미스터 터너>는 화가의 말년의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곧 낭만주의의 대가가 낭만주의의 틀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다. 대표작은 <눈보라>(1842)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터너가 폭풍이 부는 바다에서 배의 돛대에 몸을 묶어 눈보라를 직접 경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마이크 리도 이 그림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던지, 도입부의 오프닝 크레딧에서 번져가는 물감 사이로 떠오르는 그림으로 이것을 택했다.
터너의 이런 변화를 찬미한 대표적인 비평가가 존 러스킨인데, 19세기 중•후반기 영국 미술계를 풍미했던 이 명민한 비평가는 터너의 작품 중 특히 <노예선>(1840)을 좋아했다. 그림은 배에서 죽었거나 죽어가는 노예들이 잔인하게 바다에 버려지는 장면을 담고 있다. 현학적 표현에 뛰어난 이 비평가의 장황한 설명을 듣는 것도 <미스터 터너>의 묘미다(마이크 리는 그를 약간 비아냥대고 있지만).
터너는 동료들과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인 전함 테메레르가 이제 해체되기 위해 마지막 정박지로 예인되는 과정을 본다. 그 배가 바다에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터너의 그림 <전함 테메레르>(1838)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터너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작품이기도 한데, 그림 오른쪽 붉은 황금색의 황혼에 대한 표현은 왜 터너가 ‘일몰의 화가’인지 한눈에 알게 한다. 그래서인지 터너의 그림에는 종종 죽음의 명상이 짙게 드러난다. 그 일몰을 배경으로 예인되고 있는 전함 테메레르는 곧 시대에서 밀려날 터너의 은유이기도 하다. 터너는 여행을 자주 한 화가로도 유명하다. 주로 배를 이용했던 그가 말년에는 기차를 타기도 한다. 새로운 문명에 대한 경외감이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비 증기 속도>(1844)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데, 훗날 모네 등 인상주의자들이 바로 이 그림을 보고 빛과 색채의 유동성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빌린다. 그럼으로써 터너는 인상주의의 선구자로도 평가된다. 그림은 붓을 몇번 휙휙 그은 것 같은데, 전체적으로는 기차의 스피드가 탁월하게 표현돼 있다. 기차의 모습은 전혀 없는데 말이다.
낭만주의의 대가가 다시 낭만주의의 틀을 깨는 혁신은 터너를 사회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사람들은 터너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비아냥대기도 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도 터너의 그림을 보고 한번에 무시해버린다. 아카데미에 전시된 그 그림은 <일출과 바다괴물>(1845년경)이다. 죽기 6년 전 그림이다. 그림은 황금색의 단색화처럼 보일 정도로 단순해 보인다. 제목이 없으면, 여기가 바다인지 어딘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그림의 중앙엔 <노예선>에도 등장했던 큰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두눈만 있는 괴물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21세기의 그림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현대성을 갖고 있다. 터너의 시대를 초월한 혁신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