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슬랩스틱 코미디를 응용해 나만의 방식으로 액션을 디자인했다”
2015-08-11
글 : 김성훈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류승완 감독

-<베를린>과 <베테랑>은 제작과정부터 결과의 온도까지 상당히 다른 영화다. <베를린>으로부터 정말 멀리 왔는데, 어쩌면 <베를린>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베테랑>이 태어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두 영화의 거리차는) 딱 겨울의 베를린과 봄의 서울만큼의 거리다. <베테랑>이 만들어진 데에는 <부당거래>와 <베를린> 연작에 대한 반작용이 있었다. 시스템에 무너지는 개인들, 패배하는 인물들, 그게 너무 안쓰러웠다. 내가 응원하는 인물들이 승리했으면 좋겠다, 밝은 곳으로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쌓여 있던 차였다. <베를린>을 만들면서 제일 당혹스러웠던 건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베를린에 갔는데 여전히 모르겠다 싶은 부분이 있었다는 거였다. 필사적으로 찍었지만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세대가 반공 교육을 받은 내 세대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내가 아는 세계, 거기서 편하게 즐기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제작 초기엔 영화 오프닝에 나오는 중고차 절도단을 추적하는 광역수사대의 이야기를 해보려 했다. 정말 심플하게, <분노의 질주>처럼.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건 또 너무 힘들 것 같더라. (웃음) <부당거래> 때 취재하면서 만났던 형사들의 이야기, 그 끈을 놓치기 싫었는데, 형사들과 싸워야 할 적을 생각하다가 지금과 같은 이야기의 원형이 떠올랐다. 좀더 질문에 충실한 답을 하자면, 데뷔작 때부터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어온 것 같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들고 나서 당대 최고의 여자 스타를 데려다 필름누아르를 만들고 싶어 <피도 눈물도 없이>를 만들고, 어른들의 얘기를 만들고 나니 내가 좀더 어린 시절에 즐겼던 경쾌한 무술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만들고,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어진 것들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자 거리에 나가 자유분방하게 영화를 찍자 해서 <주먹이 운다>를 만들고, 그러고 나니 내가 원하던 장르영화의 끝으로 가고 싶어서 <짝패>를 만들었다. <부당거래>를 하고 나니 내가 살고 있는 답답한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어 <베를린>으로 활동무대를 옮겼고, 이번에 다시 컴백홈했다. 의식한 건 아닌데 계속 전 영화의 반작용으로 다음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중고차 절도단 이야기로 한국판 <분노의 질주>를 만들었어도 흥미로웠겠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벤츠 S클래스 주변에서 인물들이 싸울 때 어떻게든 그 차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웃음) 그런데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선 1억원짜리 BMW 15대를 부쉈다더라. 우리는 포드 머스탱 중고차 2대로 카체이스 장면을 찍었는데. 마지막엔 머스탱이 피를 계속 흘려서(엔진오일이 새서) 흘린 오일 받아다 엔진에 부으면서 ‘조금만 더 생명을 이어줘’ 그랬다. 촬영 끝나고 두대 중 한대는 구부러진 거 펴서 팔았고. 이런 현실적 여건도 여건이지만, 내가 만약 올해 그런 영화를 만들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같은 영화랑 어떻게 대결을 하나. (웃음) 그래도 나름 명동 카체이스 장면을 ‘돌파’하는 액션으로 간 건 주효했던 것 같다. 장소 헌팅할 때 중요하게 생각한 게 실재하는 곳에서 찍어야 한다는 거였다. 조태오의 동선, 서도철의 동선을 서울 사는 사람들은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태오의 사무실이 강북에 있는 건 중요하다. 신진물산은 신흥재벌이 아니라 삼대째 대물림해온 기업이니까. 그런 것들을 자세히 묘사하려 했다. 일일이 현장을 다니면서 스턴트 동선을 만들었다. 이건 <감시자들>(2013)의 영향이 크다. <감시자들> 보고선 ‘저렇게 서울이 잘 보이게끔 영화를 찍다니’ 싶었다. 갈수록 책상에서 머리로 영화 만드는 게 잘 안 된다.

-후반작업 중이던 올해 초, 1980년대 형사영화의 느낌으로 이야기를 풀어야겠다는 얘길 했다.

=심플한 대결 구도의 측면에서 80년대 형사영화들을 떠올렸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훨씬 이전에, 순수하게 영화를 좋아했던 시절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이 80년대 장르영화다. 70년대 장르영화들은 그 후 시간이 지나 비디오로 봤다. 내게 형사영화의 원형은 <더티 해리>(1971), <프렌치 커넥션>(1971), <블리트>(1968)가 아니라 <비버리 힐스 캅>(1984), <리쎌웨폰>(1987), 좀더 지나서 <다이하드>(1988)다. 거기에 너무나 막강하게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모두 명확하고 뚜렷한 적과 단순하게 대결하는 구도의 영화들이다.

-<베테랑>은 당신의 9편의 영화 중 가장 보편적이고 타점 높은 코미디를 구사하는 오락영화다. 예전의 B급 코미디와 감성은 찾아볼 수 없는데, 처음부터 쾌감에 집중하는 오락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세워두었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이야기일수록 쉽고 재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 태도의 변화일 수 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좋은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를 쉽고 재밌게 풀어주는 선생님이 아닌가. <베테랑>을 만들면서 나름 세운 전략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고, 유머를 폭넓게 구사하고, 사람들이 집중해서 볼 수 있게 만들자는 거였다. 예전 영화들은 오락적이려고 노력은 했으나 실력 부족으로 취향을 심하게 탔다. (웃음)

-<베테랑>은 정의와 불의가 분명한 세계를 그린다. “대기업 회장 라인을 경찰이 건드린 역사는 없다”는 대사도 있듯이, 정의가 승리하는 세계에 대한 판타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경찰, 검찰, 재벌의 커넥션을 씁쓸하게 보여준 <부당거래>와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 판타지는 모두가 응원할 만한 판타지이니까. 그리고 <베테랑>은 이야기의 구조보다 인물이 중요한 영화였다. 서도철과 같은 인물들이 판타지한 인물은 아니다. 휴머니즘을 가진 전문가 집단은 모두 서도철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경기도 의정부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간판시공업자가 자신의 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을 구한 적이 있다. 이건 약간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세계와도 비슷한데. (웃음) 또 주진우 기자처럼 자기가 당할 피해를 알면서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 사회가 돌아간다고 본다. 한편으로 <베테랑>은 굉장히 보수적인 영화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가족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 총경(천호진)도 그전까지는 광역수사대 팀원들의 수사에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우리 식구 건드렸다고 하자 움직인다. 물론 각자의 정의는 다를 수 있다. 조태오에게도 나름의 경제 정의가 있으니. 하지만 상식이 있는 세상에서, 사람을 때리면 안 되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된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정의다. 그러한 기본적 정의에 충실한 보수적인 가치관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예전에 내가 열광했던 영화들의 세계처럼. 그러니까 ‘사부를 죽인 원수에게 꼭 복수하겠어’ 하고 다짐하는 성룡 영화의 주인공을 볼 때, 이야기의 귀결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제발 저 인물이 딴짓하지 말고 빨리 무술을 연마해야 할 텐데’ 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지 않나. (웃음) 정리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캐릭터가 남는 영화였으면 했다. 그래서 영화의 메인 크레딧을 엔딩으로 옮기면서 감독과 아티스트의 이름보다 배우들의 이름이 먼저 나오게끔 했다. 그건 배우들에 대한 나의 헌정이다.

-주진우 기자 얘기를 했지만, 서도철을 보고 있으면 그뿐만 아니라 실제 황정민 배우와 당신의 모습을 반반씩 섞어놓은 것 같다.

=황정민이란 배우를 두고 쓴 캐릭터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댄싱퀸>(2012)이 아니었다면 이름을 황정민으로 갔을 수도 있다. (웃음) 그 사람이 하는 욕, 버럭 하는 모습,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서는 그만의 오지랖까지 너무도 잘 아니까. 거기에 황정민과도 친하고 나와도 친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형사가 있는데, 이 친구도 누가 곤경에 처했다고 하면 자기 일처럼 나서는 캐릭터다. 아끼고 아껴서 명품 신발 하나 사서 대기업 임원들 만날 때나 전국구 깡패 보스 만날 때 꿀리지 않으려고 신고 나간다. 그러면서 애들 교육 걱정, 전셋값 걱정하고. 푸시업 잔뜩 해서 쫄티 입고 다니면서 ‘갑바 운동만 너무 했나’ 이러는 캐릭터. 하여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섞여 있는 것 같다. 김혜리 기자는 <베테랑>이 나와 제일 닮은 영화 같다고도 하더라. 실제로 만나보면 내가 <베를린> 같진 않으니까. (웃음)

-관객이 조태오를 보고 특정 재벌을 연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없었나.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 누구라고 할 수 없게 종합체, 완전체로 만들었다. 다양한 인성이 조태오 안에 녹아들어가게끔. 분명한 건 조태오란 인물의 완성은 배우 유아인이 했다는 거다. 나는 내 영화에 등장한 악당 캐릭터들을 좋아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정재영, <짝패>의 이범수, <부당거래>와 <베를린>의 류승범…. 사실 앞서 함께한 배우들과 유아인은 결이 좀 다르지 않나. 그런데 유아인은 전략적으로 조태오를 완전히 자기화해버렸다. <다크 나이트>(2008) 이후 모든 배우들의 악역의 기준은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였는데, <베테랑>에서 유아인은 그런 스테레오타입의 연기를 하지 않는다. 나는 조태오가 만들어진 괴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 상무를 비롯해 그를 둘러싼 시스템이 조태오의 잘못을 계속해서 덮어줬기 때문에 조태오는 인격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거다. 어떤 사안을 결정할 준비나 능력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막대한 능력이 주어졌을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그간 목격해왔다. 조태오처럼 미성숙한 친구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벌어지는 일도 마찬가지다. 조태오는 부모 잘 만난 애가 아니라 부모 잘못 만난 애다. 그런 조태오를 유아인은 자기 스타일대로 연기했다. 너무 해맑게 웃으니까 정말 짜증나지 않나. (웃음)

-<베테랑>을 준비하면서 폭력적이지 않은 액션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다. 액션 시퀀스의 경우 슬랩스틱 코미디가 가미된 액션에서 강도 높은 액션으로 점차 격렬해진다.

=내가 성룡 영화를 좋아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좋아한 성룡 스타일의 액션은 선보인 적이 없더라.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류승범이 깡패들과 싸우는 고깃집 장면 정도가 전부였다. 액션에 대한 큰 그림은 이런 거였다. 폭력적이지 않을 것, 어려서 내가 열광했던 성룡 영화나 버스터 키튼의 영화처럼 영화적 쾌감을 줄 것, 어떤 극적인 순간에도 유머를 놓치지 않을 것. 또 내가 <톰과 제리>의 팬이다. 나이 들어서 다시 보면 진짜 살벌한데, 톰과 제리의 체이스 장면이라든지, 80년대 인기 코미디 코너였던 ‘변방의 북소리’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응용해 나만의 방식으로 액션을 디자인하려 했다. 카체이스 장면은 끝까지 고민이 많았다. 원래는 훨씬 더 긴 구간을 정교하게 질주하는 거였는데, 이상하게 이 영화는 영화 속 장소가 강북의 어디면 실제로 강북의 어디에서 찍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진이 그것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명동 일대에서 차량 통제하고 촬영하는 건 힘들다고 했는데, 그럴수록 나도 오기가 생겨서 ‘다른 동선 다 포기했는데 이것까지 못하게 하면 나 영화 안 찍어’ 이러면서 조태오 컨셉으로 막 드러눕고 그랬다. (웃음)

-카체이스 장면에서 유아인이 탄 차가 포드 머스탱이다. 조태오의 재력을 생각하면 그리 고가의 차가 아니다. <블리트>에서 스티브 매퀸이 탄 차종이 머스탱인데, <블리트>는 지난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기획전 ‘류승완이 사랑한 형사영화’에서 직접 소개한 적 있는 영화다.

=맞다. <블리트>에서 블리트(스티브 매퀸)가 타는 차가 포드 머스탱이다. 그 클래식한 모델을 못 찾아서 최근 모델을 쓴 건데, 사실 예산 문제도 있었다. 그런데 조태오 사무실에 다크 나이트 텀블러를 소품으로 배치해둔 것처럼, 조태오는 자기 취향이 분명한 인물이라는 설정을 가져갔다. 조태오라면 머스탱처럼 취향을 타는 스피드카를 탈 수 있겠다 싶었다.

-명동 한복판, 서도철과 조태오의 심각한 일대일 대결 장면에서 마동석이 등장해 큰 웃음을 안긴다. 시나리오에 없던 대사 같은데.

=시나리오엔 운동복 사내의 등장이라고만 돼 있었다. 마동석 선배가 현장에 와서 대사 하나 쳐도 되냐고 하더라. 오는 길에 아트박스를 봤다면서 자기가 짜온 플랜을 설명하는 거다. (웃음) 제작진은 부랴부랴 근처 아트박스 사장님한테 영화에 상표를 사용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약 상표를 사용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올리브영’이라 해야 하는데, ‘올리브영’ 은 영 입에 안 붙잖아. (웃음) 우리 영화에 이처럼 배우들이 살린 장면들이 정말 많다. 후반부 파출소 장면에서 고규필의 대사도, “여보 나야,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어. 애는 안 보채?”가 원래 대사인데 “여보 나야,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어. 왜 욕을 해” 그러고. (웃음) 배우들이 알아서 영화 속 캐릭터로 살아주니까 내가 특별히 할 게 없었다. 스탭과 배우들의 앙상블은 지금까지 영화하면서 역대 최고였던 것 같다. <부당거래>만큼 좋았다.

-<폴리스 스토리>처럼 <베테랑>도 시리즈로 만들 생각은 없나.

=마음이야 물론 있다. 그런데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흥행을 한 뒤에나 생각할 문제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연출가로서의 야심도 야심이지만 그보다는 황정민이란 배우를 위해서 속편을 만들고 싶다. 예를 들면 <리쎌웨폰> 시리즈에는 <비버리 힐스 캅>이나 <다이하드> 시리즈와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 <리쎌웨폰>은 멜 깁슨과 대니 글로브 그리고 리처드 도너 감독이 1편부터 4편까지 함께 완결한 영화다. 4편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1편부터 함께한 그들의 사진이 쭉 뜬다. 그 감동이 대단하다. <베테랑>을 시리즈로 만들게 된다면 그런 순간을 만들고 싶다. 황정민의 <베테랑>이기도 하고, 류승완의 <베테랑>이기도 하고, 만드는 사람 모두의 <베테랑>이 된다면 좋겠다.

-차기작은 <군함도>인가.

=<군함도>는 너무 일찍 언론에 보도됐다. 아직 촬영 대본이 나오지도 않은 상태다. 현재 몇개의 프로젝트를 보고 있다. <베를린> 속편 시나리오도 진행 중이고, <베테랑> 2편도 있고, <군함도>도 있다. 그중에 좋은 스크립트가 먼저 완성되는 작품을 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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