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은 드라마의 시작이자 끝이다. 힘 있는 내러티브는 인물이 장애를 돌파하고 욕망을 쟁취하는 과정을 충실히 따라간다. 하지만 가끔 이야기가 하나씩 조립하여 도달해야 할 결과물을 단 한 장면으로 완성하는 이들이 있다. 전도연이란 배우는 말하자면 내러티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모순의 들끓는 에너지를 담아내는 전가의 보도와 같다. 그가 등장한 장면이 곧 현상, 설명, 설득, 이윽고 결과가 된다. 관객이 목격하는 건 배우의 육체와 짧은 표정이 전부지만 우리는 그 텅 비어버린 표정 안에서 가슴속에 담긴, 영화가 미처 말하지 못한 사연들까지 들여다본다. 어떤 이야기를 만나건 그녀는 이야기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다.
아마도 스스로 원한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배우로서 얻을 수 있는 칭찬은 대부분 들은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영화가 아니라 연기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게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에요. 예전에도 지금도 개인적인 영광을 목표로 한 적은 없어요. 배우 전도연보다는 작품이 먼저 보였으면 하는 바람이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구축했지만 그것이 영화에 독이 된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어디까지나 영화 안에서 설득력 있는 캐릭터로 남고 싶다는 거다. 그런 만큼 배역을 고를 땐 배역의 매력보다는 이야기의 재미, 그 자체가 중요하다. “박흥식 감독님과는 이번이 세 번째지만 감독님 때문에 선택한 건 아니에요. 같은 감독님을 다시 만나도 작품이 다른 만큼 서로 익숙해질 수도 없어요. 오로지 그 작품, 이야기가 좋아서였어요. 절대적인 기준은 항상 시나리오예요. 이야기에 빠져서 선뜻 골랐다가 그 역할의 까다로움을 깨닫고 아차 하는 경우가 많죠. 이번에도 그랬던 것 같아요.”
전도연은 자신의 한계를 늘 넘어왔다. 정확히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로 대중이 쳐놓은 울타리에 붙잡힌 적이 없다. 주변의 기대와 칭찬이 식상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차라리 처음 칸의 여왕이란 표현을 들었을 때가 식상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내 안에서 소화가 됐어요. 갈 때마다 ‘이제 더이상 뭘 보여줄 수 있겠어’가 아니라 그다음 전도연은 무엇을 보여줄까 하는 기대와 지지를 받으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해야 할 게 너무 많고, 못 해본 게 너무 많아서 매 작품을 첫 작품인 것처럼 대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게 되었다”는 그는 <협녀, 칼의 기억>에서 생애 처음 액션과 맹인 연기를 시도했다. “검술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검에 담긴 감정을 보여주는 거라며 무술감독님이 용기를 주셨죠. 처음에는 와이어에 몸이 딸려가지만 어느 순간 새로운 것들을 익혀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하면 되는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고. 몸이 아프긴 했지만 즐거웠어요.” 반면 시각장애인 연기는 절대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가 있어 어려웠다고 한다. 처음 접하는 역할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함부로 도전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설랑이란 역할이 맹인 연기와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협녀, 칼의 기억>에서 전도연은 또 한번 제 한몸 가득 모순을 품는다. 설랑은 대의와 사랑 사이에서 하염없이 나부끼다 끝내 찢어져버리고만 ‘협’(俠)녀다. 그러나 “무협영화지만 멜로영화로 다가왔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설랑의 중심에 놓인 건 사실 복수가 아니라 망가진 사랑, 그럼에도 끝내 놓을 수 없었던 지독한 사랑이다.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너는 내 운명>의 은하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숙부인도, <무뢰한>의 혜경도 결국 사랑을 품었고 세상에 배신당했던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건과 드라마는 중요치 않다. 가혹하게 주어진 결과와 그 부스러기 같은 감정을 품고 번민하는 한 여인이 있을 뿐이다. 매번 형태는 달랐지만 결국, 사랑이다. 전도연이 홀로 받아들이고 삭이고 괴로워하다 쓰러지는 이 지독한 감정은 한 사람이 몸 안에 담을 수 있는 극상의 멜로드라마라 할 만하다. 그래서 ‘멜로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는 단순히 특정 장르의 연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연기를 꿰뚫는 본질을 짚은 찬사처럼 보인다. “멜로와 사랑은 내 모토라 해도 좋아요. 심지어 <피도 눈물도 없이>(2002), <카운트다운>(2011)도 그랬어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고른다 해도 사랑과 멜로가 없을 것 같진 않아요. 아마 죽을 때까지 사랑을 다루지 않은 작품을 선택할 일은 없겠죠.” 누차 털어놓은 것처럼 전도연의 초점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자극하는 이야기에 맺혀 있다. 단 한 장면만으로 스스로 영화가 될 수 있음에도, 몇몇 순간은 그런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음에도, 전도연은 “이야기 속의 인물이 되고 싶지, 인물의 이야기가 되는 걸 바라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것이 칸의 여왕, 멜로의 여왕, 연기의 여왕이 늘 우리의 기대를 넘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