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맨>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던 지난 6월의 어느 날, 인터넷은 <앤트맨> 티저 포스터를 패러디한 포스터로 들썩였다. “노 쉴드, 노 해머, 노 프로블럼”(No Shield, No Hammer, No Problem)이라는 태그라인 아래 개미만큼 작은 앤트맨을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등 어벤져스의 삼인방과 직접 비교한 오리지널은 블랙위도우의 가슴과 엉덩이에 몰래 올라탄 ‘능력자’ 앤트맨으로 패러디되며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포스터는 그동안 누구도 소리내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고 동시에 답을 내놓았다. 아이언맨의 아머슈트를, 토르의 망치를,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그리고 도도하고 차가운 블랙위도우를 이길 수 있는 슈퍼히어로는 누구인가? 마블이 그 질문에 내놓은 대답이 바로 <앤트맨>이다. 덩치만 크고 갑옷과 무기 덕분에 존재감만 사나운 어벤져스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작아서 더 강한 슈퍼히어로가 9월3일 한국 관객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
좀도둑질을 해 감옥에 갔던 스콧 랭(폴 러드)이 출소한다. 좀 모자란 듯한 친구 루이스(마이클 페냐)가 마중을 나와서는 기막힌 건수가 있다며 꾀지만, 스콧은 단칼에 거절한다. 앞으로는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과자인 스콧의 새 출발은 번번이 좌절된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해고당한 스콧은 불나방이 불을 향해 날아들 듯 루이스를 찾아가고 마지막 한탕을 계획한다. 결전의 밤, 어렵게 침입해 갖은 고생을 하고 뜯어낸 금고에서 그들은 기대하던 보물 대신 낡은 슈트를 발견한다. 황당하긴 하지만 어쨌든 스콧은 슈트를 챙겨온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스콧이 슈트를 갖게 하기 위해 원조 ‘앤트맨’ 행크 핌(마이클 더글러스)이 짠 각본이었다. 행크는 앤트맨의 기술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콧에게 접근했고, 스콧을 앤트맨으로 훈련시켜 그 비밀기술을 훔쳐내려는 계획을 짠다. 행크가 쉴드에게조차 비밀로 남기려고 했던 앤트맨은 특별히 고안된 슈트와 화학약품의 도움으로 사이즈가 작아지지만 반대로 힘은 세지며, 필요에 따라 원래의 사이즈로 돌아오는 편리한(!) 능력의 슈퍼히어로다. 개미만 한 크기로 작아지기 때문에 앤트맨이라고 불리지만, 각종 개미들과 교감하고 개미군단과 함께 움직이는 능력이야말로 앤트맨의 이름에 어울리는 슈퍼파워다.
슈퍼히어로 아닌 인간의 세상을 무대로…
굳이 비교하자면 <앤트맨>은 2014년 여름, 혜성처럼 등장해 극장가에 돌풍을 몰고왔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견줄 수 있겠다. 가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으면서 의리로 똘똘 뭉쳐서 적군을 물리치는 팀워크가 그렇고, 잘난 구석은 없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닮았다.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중에서 드물게 처음부터 끝까지 가벼운 톤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도 두 영화는 비슷하다. 대의 앞에서 고뇌하는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달리 스콧의 고뇌는 인간적이며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 덕분에 선망의 순간보다는 마음 따뜻해지는 순간이 더 많다. 스콧이 앤트맨이 되려고 하는 이유도 떨어져 지내는 딸에게 인정받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고, 행크가 앤트맨 기술을 비밀로 지키려는 이유도 인류의 안전에 앞서 딸의 안전을 걱정해서다.
하지만 <앤트맨>이 지금까지의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들과 눈에 띄게 구분되는 점은 영화의 장르에 있다. 다른 영화들이 슈퍼히어로의 탄생과 그에 대적하는 상대들과의 대결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면, <앤트맨>은 슈퍼히어로의 탄생과 성장이라는 플롯 외에도 하이스트 무비의 플롯으로 긴장을 더한다. 원조 앤트맨이지만 앤트맨의 핵심 기술을 행크 인더스트리에 둔 채로 쫓겨난 행크는, 한때 자신의 수제자였지만, 딸인 호프(에반젤린 릴리)와 손잡고 자신을 배신한 대런 크로스/옐로재킷(코리 스톨)으로부터 그 기술을 다시 훔쳐내려고 한다. 그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처음부터 스콧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이렇게 슈퍼히어로물의 플롯과 하이스트 무비의 플롯이 겹쳐지다보니, 영화 속에서 스콧은 <오션스 일레븐>의 대니 오션과 같은 좀도둑이지만, <미션 임파서블> 속 에단 헌트처럼 작전을 수행한다. 관객이 <앤트맨>을 보면서 이 영화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기시감으로 인해 영화가 지루해지거나 뻔해지지 않는 것은 <앤트맨>의 미덕이며, 조화로운 캐스팅이 일궈내는 앙상블이다. 특히, 이토록 복잡한 중에 어벤져스와의 연결을 잊지 않은 마블도 영리하다. 늦깎이로 데뷔하는 멤버인 만큼 앤트맨의 존재는 기존 멤버들과의 연결고리를 억지스럽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LA타임스>의 영화평론가 케네스 투란이 “마블의 분열된 퍼스낼리티에 대한 증거”라고 지적한 것처럼 <앤트맨>은 마블 안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있다. 우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2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앤트맨을 뒤늦게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데뷔가 늦어진 만큼 먼저 진행된 이야기들, 캐릭터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이야기의 전면적인 수정이 필요했고, 덕분에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인간의 세상을 무대로 펼쳐지게 됐다. 원작 코믹스에서 <앤트맨>은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였기 때문에 이같은 지각 등장이 의아할 법도 하지만, 사실 <앤트맨>이 마블에서 둥지를 튼 것은 2000년이다. 무려 14년 동안 제작을 준비해온 셈이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뜨거운 녀석들>의 에드거 라이트 감독이 각본을 썼으며 테스트 촬영까지 마쳤으나 2014년 “창작에서의 견해 차”를 이유로 프로젝트를 떠났고, <브링 잇 온>의 페이턴 리드 감독이 메가폰을 넘겨받은 뒤 <앤트맨>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만나요
감독직은 떠났으나 14년간 공들인 덕분에, 에드거 라이트는 크레딧의 각본가 타이틀을 얻었다. 그래서인지 <앤트맨>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한 톤을 유지한다. 진지한 순간에 기어이 김새는 한마디를 던지는 식이다. 그중에서도 관객이 두고두고 기억하며 웃을 수 있는 장면은 마이클 페냐가 연기한 루이스의 “기막힌 건수” 몽타주와, 앤트맨과 옐로재킷이 스콧의 딸 캐시의 방에서 벌이는 마지막 대결 장면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임에도 불구하고 한껏 작아진 스케일 덕분에 아이들이 장난감 놀이를 하듯 벌어지는 격전은 슈퍼히어로 장르 역사상 가장 자기반영적인 장면으로 회자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블의 돌연변이 <앤트맨>의 박스오피스 성적은 성공적이었을까? 결론을 말하자면, <어벤져스> 시리즈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처럼 블록버스터급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개봉 첫주 5722만달러의 흥행수입으로 출발해, 개봉 한달을 넘긴 지금, 미국 내에서 1억5754만달러, 해외에서 1억7890만달러를 벌어들여, 마블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아직 속편 제작을 말하기에는 이를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로 시작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3기에서도 다시 앤트맨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앤트맨>의 쿠키 영상은?
모든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가 그러하듯 <앤트맨>에도 히든 영상이 있다. 크레딧 중간과 끝에 한번씩 나오는 두개의 히든 영상은 한편은 앤트맨의 컴백을, 또 한편은 새로운 슈퍼히어로의 등장을 예고한다. 특히 두 번째 영상은, <앤트맨>에서 에반젤린 릴리가 연기한 호프 반 다인 캐릭터를 다른 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실제로 에반젤린 릴리는 마블 스튜디오와 <앤트맨> 외에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계약에 사인을 했다고 알려졌다. 마블 스튜디오의 CEO이자 프로듀서인 케빈 파이기는 앤트우먼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했지만, 에반젤린 릴리가 연기한 호프 캐릭터에 대해서는 여러 계획을 세워놓았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릴리가 연기할 가장 유력한 캐릭터는 원조 앤트맨과 듀오로 활동했던 와스프(Wasp, 말벌을 의미하며 미 육군항공대 여성조종사를 일컫기도 함)로, 와스프는 행크 핌의 아내이며 코믹스에서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인 재닛 반 다인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다. 스탠 리와 잭 커비가 함께 작업한 <Tales to Astonish> 44권에서 처음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