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세계는 넓고 한국 애니는 뻗어간다
2015-09-04
글 : 송경원
북미에서 장편으로 제작되는 <쟈니 익스프레스>를 계기로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타진하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불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편애니메이션의 활력과 눈부신 결과물들을 보면 그리 낙담할 일만도 아닌 듯하다. 국내 모션그래픽 전문업체 모팩앤알프레드가 제작한 단편 <쟈니 익스프레스>(감독 우경민)는 북미 유명 스튜디오 일루미네이션에 의해 장편 극장판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놀라운 성취임에 분명하다. <쟈니 익스프레스>를 계기로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의 잠재력과 성과를 짧게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재기발랄한 단편애니메이션들의 색다른 즐거움! 아직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우주택배기사 쟈니가 고객의 물건을 배송하기 위해 작은 행성에 착륙한다. 한데 주위를 둘러봐도 물건을 받을 이가 보이지 않는다. 쟈니는 마이크로 안경을 써야 보일 정도로 작은 물건을 두고 어디로 배송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같은 시각, 평화롭던 행성에 재난이 일어난다. 갑자기 찾아온 거대 생명체로 인해 행성이 초토화되기 일보 직전이다. 택배기사가 한발 내디딜 때마다 도시의 절반이 날아가고 마시다 버린 캔 음료가 데굴데굴 굴러 도시를 집어삼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우주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서투른 택배기사 쟈니가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쟈니 익스프레스>는 한마디로 ‘잘 만든’ 단편애니메이션이다. 영상 비주얼이나 장면의 완성도는 물론이거니와 5분 내외의 단편애니메이션이 추구해야 할 미덕을 충실히 갖추고 있다. 발상을 뒤집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반전의 플롯,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운 캐릭터, 터지는 개그 센스 등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다. 무엇보다 이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있다. 짧고 강한 농담 같은 이 작품을 보면 우리가 흔히 봤던 픽사나 디즈니의 인상적인 단편애니메이션들이 떠오른다. 아마도 픽사 단편 모음집에서 이 작품을 봤다면 ‘역시’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 감독의 첫 단편 연출작이란 사실 자체가 하나의 반전처럼 느껴진다.

<쟈니 익스프레스>는 2014년 5월,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면서 선풍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포스팅 5일 만에 200만뷰를 돌파했고, 1천만뷰 공유에는 채 한달이 걸리지 않았다. 1년이 지났을 무렵 전세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기발하고 깔끔한 단편애니메이션의 장편 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미니언즈> 홍보차 한국을 방문한 일루미네이션의 크리스 멜라단드리 회장이 <쟈니 익스프레스>의 장편 극장판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멜라단드리 회장은 “반항적인 코믹함이 단번에 나를 사로 잡았다”며 장편화 결정 이유를 밝혔다. 더욱 놀라운 건 <쟈니 익스프레스>라는 브랜드와 캐릭터만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을 만든 우경민 감독을 발탁해 직접 시나리오 개발 중이라는 점이다. 이전까지 아무 경험도 없는 한국의 신인 단편영화 감독을 전격 발탁한 파격적인 프로젝트다. 그간 할리우드의 메이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능력 있는 신인감독을 발탁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지만 이번처럼 단편을 그대로 장편화하는 경우, 게다가 단편 감독에게 그대로 장편화를 맡기는 경우는 처음이라 해도 무방하다. <쟈니 익스프레스>의 가능성과 완성도를 감안한다고 해도 이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엔 비교적 신생 스튜디오인 일루미네이션의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도 한몫했음이 분명하지만 이를 이끌어낸 <쟈니 익스프레스>의 개성과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의 질적 향상에 먼저 주목하고 싶다.

<쟈니 익스프레스>가 장편이 될 수 있었던 까닭

굳이 한국 애니메이션에 국한하지 않아도 단편애니메이션이 장편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단순히 완성도나 자본의 문제는 아니다. 애초에 작가주의적 성향을 짙게 드러내는 단편과 보편타당한 감성을 기반으로 하는 장편은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단편을 장편 제작을 위한 전 단계로 인식하기 쉽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단편과 장편은 성격도 목적도 다른 별개의 장르에 가깝다.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2013)를 연출한 장형윤 감독은 “단편 감독들은 대체로 개인적인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한 창의적인 시도에 힘을 쏟는다. 때문에 개성 있는 단편일수록 장편 아이템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픽사의 단편들은 애초에 장편화할 아이템으로 기획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영화제 등을 통해 소개되는 대다수 단편은 실험적인 요소를 더 중시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간 빼어난 단편을 선보이며 이름을 알린 감독들이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직접 설립해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리이야기>(2002)의 이성강 감독, <돼지의 왕>(2011)의 연상호 감독, <무림일검의 사생활>(2007)의 장형윤 감독 모두 그런 경우다.

우경민 감독의 <쟈니 익스프레스>가 종전의 단편애니메이션과 구별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쟈니 익스프레스>는 보편타당한 재미를 선사하는 잘 정돈된 작품이다. 달리 말해 픽사가 전략적으로 제작하는 단편애니메이션처럼 장편화할 수 있는 캐릭터와 유쾌한 정서,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우경민 감독의 경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광고와 게임 CG 등에 기반한 모션 그래픽 전문업체 알프레드 이미지웍스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출발한 우경민 감독은 자기만의 작품을 연출하고 싶어 퇴사까지 결심했다고 한다. 다행히 가능성을 알아본 회사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쟈니 익스프레스>를 만들게 되었고, 그 결과 제작단계부터 캐릭터를 활용한 시리즈물까지 염두에 둔 애니메이션이 탄생했다. 요컨대 <쟈니 익스프레스>는 단지 감독의 개성에 기댄 작품이 아니라 3D애니메이션 기술을 기반으로 하여 보편타당한 정서를 공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확장된 프로젝트라는 말이다.

올해 1월, 시각적인 특수효과(VFX)에 기반한 영상 콘텐츠 제작 강화에 힘쓰며 외연을 확장 중인 모팩스튜디오는 <쟈니 익스프레스>로 좋은 기회를 잡은 알프레드 이미지웍스와 합병을 결정했다. 콘텐츠와 기술력의 확보라는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정이었다. 이로써 현재 시나리오 개발 단계인 <쟈니 익스프레스>가 실제 제작에 들어갈 경우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셈이다. 두 회사의 합병에 <쟈니 익스프레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쟈니 익스프레스>는 일루미네이션 이외에도 여러 북미 대형 스튜디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모팩앤알프레드의 장성호 대표는 <쟈니 익스프레스>에 대해 “어디서나 어필할 수 있는 글로벌한 정서가 강점이다. 국내 단편은 높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작품이 대다수이다. 그럴 경우 콘텐츠 개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데, 지역적인 정서를 넘어선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 우경민 감독의 놀라운 장점이다”라고 평했다. “기존 상업애니메이션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없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해 끌고 나가는 힘이 작품의 몰입도를 높인 작품”이라는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최유진 사무국장의 평가 역시 이 점을 정확히 짚고 있다. 즉, “단편애니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며 한국 단편의 가능성과 저력을 보여준” <쟈니 익스프레스>의 사례는 이른바 기획된 보편성을 지닌 단편애니메이션이 글로벌한 장편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의 수준은 어느새 이만큼 올라와 있다.

그럼에도 <쟈니 익스프레스>의 사례를 섣불리 보편화하긴 이르다. 현재 결과만 놓고 볼 때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은 중흥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4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정다희 감독의 <의자 위의 남자>, 2014년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정유미 감독의 <연애놀이> 등 이른바 4대 애니메이션영화제(안시, 오타와, 히로시마, 자그레브)에서 한국 작품의 수상 소식이 잇달아 들려오고 있다. 비단 수상 실적뿐만 아니라 출품작의 질과 양 어디 하나 뒤지지 않는다. 1년에 한두편도 나오기 어려운, 나온다 해도 성적이 아쉽기만 한 장편 극장판 애니메이션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하지만 이처럼 수준 높은 단편애니메이션들이 국내에서 활발하게 소비되거나 특정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가, 묻는다면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다. 애초에 단편애니메이션 자체가 시장성을 논할 장르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작품이 쏟아지고, 이렇게 좋은 작가들이 양성될 수 있었던 것은 90년대 중반부터 국내 단편애니메이션이 제작, 배급, 상영될 수 있는 꽤 괜찮은 환경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해외시장 키우고, 안정적인 시장을 만들어야

국내 단편애니는 1995년 디지털 작업이 보편화되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필름작업과 달리 상대적으로 손쉽게 작업할 수 있었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며 작가군도 급격히 늘었다. 2000년 초 우후죽순 생겨난 여러 대학 애니메이션학과도 이같은 분위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최유진 사무국장은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 가능한 장르로 자리잡으며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단편애니 활성화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말한다. 90년대 중반부터 성장을 시작한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은 단편에서 장편으로 이어지는 경우, TV시리즈로 진출하는 경우, 혹은 꾸준히 단편에 매진하는 작가군까지 세 갈래로 다변화되었다. 비록 단편에서 바로 장편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는 않지만 “단절의 역사가 계속되었던 장편애니메이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건 단편에서 자신의 스타일과 이미지 실험을 충분히 다진 감독들의 예술적 다양성” 덕분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네이버 TV 캐스트, 유투브 등 온라인 플랫폼의 활성화는 관객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쟈니 익스프레스> 같은 이례적인 경우가 가능했던 것도 풍성한 목소리, 다양한 방식의 단편애니메이션이 꾸준히 제작, 유통되는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형윤 감독은 “2D가 직관적이라면 3D는 공학적이다. 캐릭터에 기반한 3D단편은 확장성이 풍부해 장편화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다. 2D단편애니메이션의 장편화는 드문 경우지만 <쟈니 익스프레스>를 보면 3D단편의 경우엔 더 좋은 기회들이 주어질 수도 있겠다고 낙관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CG와 VFX 기반의 모팩앤알프레드가 콘텐츠 개발에 힘을 쏟는 것도 이러한 가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성호 대표는 “중국 등 해외 시장 공략을 경유하여 궁극적으로는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쟈니 익스프레스>가 독특한 사례임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엔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의 다채로운 목소리가 있었다. 현재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은 다양한 목소리와 함께 개성 넘치는 작가들의 재능을 꽃피우고 있다. 다만 열매를 맺어 다음 세대의 씨앗으로 이어지기엔 아직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단편애니메이션의 중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다면 이제는 다음을 모색할 단계다. 모두가 <쟈니 익스프레스>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같은 제작의 통로가 하나라도 더 생기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이다. 활발한 단편애니메이션 제작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상업적인 성공과 시장 조성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아직 전무하기 때문이다. <쟈니 익스프레스> 장편 프로젝트가 바깥으로부터 시장의 외연을 넓히는 좋은 사례로 거듭나길 간절히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경민 감독 <쟈니 익스프레스>(2014)

우주에서 가장 빠른 택배회사의 게으른 택배기사 쟈니가 집 한채 크기도 안 되는 행성에 택배 배달을 가서 벌어지는 해프닝. 픽사의 단편마냥 안정감 있는 플롯과 높은 완성도가 특징이다. 익숙한 장르 요소를 십분 활용해 기발한 반전의 재미를 제공한다. 긴장을 조절하는 호흡, 빵 터지는 웃음의 리듬감은 웬만한 할리우드영화 못지않다.

<아빠가 필요해>

장형윤 감독 <아빠가 필요해>(2005)

제11회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히로시마상 수상작.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의 장형윤 감독이 두 번째 장편으로 제작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늑대가 어느 날 6살 소녀 영희의 아빠가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 동화적 상상력과 푸근한 구성 가운데 번뜩이는 풍자가 살아 있다. 10분이란 상영시간이 무색할 만큼 꽉찬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가족과 행복의 의미를 되새기는 깊은 울림의 동화.

<애프터눈 클래스>

오서로 감독 <애프터눈 클래스>(2015)

2015년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스페셜 멘션,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SICAF)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화제작. 오후 수업시간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눈꺼풀, 잠들면 안 된다고 발버둥쳐보지만 이미 꿈과 현실은 뒤섞이기 시작한다. 누구나 한번쯤 경험했을 순간을 소재로 꿈과 환상의 경계를 참신하게 표현했다. 기발한 착상이 곧 훌륭한 이야기가 되는 대표적인 사례. 단편애니만의 즐거움과 미덕이 듬뿍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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