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작가들의 정원
2015-09-08
글 : 이주현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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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아시아 감독 100선, 오즈 야스지로, 허우샤오시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오즈 야스지로

아시아 감독 100선, 1~10위 감독 리스트

1위 오즈 야스지로(일본) 2위 허우샤오시엔(대만) 3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4위 구로사와 아키라(일본) 5위 샤트야지트 레이(인도) 6위 왕가위(홍콩) 6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타이) 8위 지아장커(중국) 8위 미조구치 겐지(일본) 8위 에드워드 양(대만)

예술(가)에 순위를 매기는 것은 분명 불편한 일이다. 예술은 기록이나 점수로 환산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시아 감독 100선’을 영화인들이 ‘사랑’한 감독들의 리스트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아시아영화 100선’에 1위로 이름을 올린 <동경 이야기>의 오즈 야스지로가 영화인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은 행복한 감독이 되었다. 오즈 야스지로는 가장 일본적인 영화로 세계를 매혹시킨 감독이다. 결혼과 가족은 오즈 영화의 오랜 테마였고, 섬세하고 정갈한 미장센과 다다미숏은 오즈 영화의 인장이라 할 수 있다. 데뷔작 <참회의 칼>부터 유작 <꽁치의 맛>까지 총 55편의 영화를 남기며 그는 국경과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감독이 되었다. <동경 이야기>와 함께 <만춘> <태어나기는 했지만> <부초> <안녕하세요> 이상 5편의 오즈 영화가 100선에 포함됐다. 오즈 탄생 100주년 기념작으로 <카페 뤼미에르>를 만들기도 한 대만 감독 허우샤오시엔이 2위다. 자전적 성장영화인 초기 걸작 <동년왕사>를 비롯해, 대만의 역사적 아픔과 가족사의 비극을 교차한 <비정성시>로 허우샤오시엔은 대만 뉴웨이브의 기수로 주목받았다. 올해는 자신의 첫 무협영화 <섭은낭>으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귀환을 알렸다. <비정성시> <동년왕사> <희몽인생> <해상화>가 이번 100선에 포함됐다. 허우샤오시엔보다 한표 적게 받은 3위는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형식적 실험을 보여준 <클로즈업>, 199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체리 향기>, ‘이란 북부 3부작’ 혹은 ‘지그재그 3부작’으로 불리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그리고 롱테이크, 비전문 배우의 고용,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나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영화의 총정리 같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 등이 그의 대표작.

4위는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함께 과거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손꼽히는 구로사와 아키라다. 오락적인 동시에 미학적이고 성찰적인 영화인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는 그를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스티븐 스필버그, 페데리코 펠리니, 기타노 다케시 등 거장들이 존경한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아푸 3부작>인 <길의 노래> <아파라지토> <아푸의 세계>를 통해 인도영화를 세계에 알린 인도영화의 아버지 샤트야지트 레이가 5위, <열혈남아> <동사서독>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 감각적인 영상 언어에 주목한 홍콩의 왕가위, 2000년대 들어 세계영화계가 주목하고 있는 타이의 시네아스트인 <친애하는 당신> <열대병> <엉클 분미>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공동 6위를 차지했다. <소무> <스틸 라이프> 등 현대 중국 사회의 민낯을 카메라에 담아온 지아장커, 장 뤽 고다르가 가장 좋아한 감독으로도 유명한 <오하루의 일생> <우게쓰 이야기>의 미조구치 겐지, 허우샤오시엔과 함께 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하나 그리고 둘>의 에드워드 양이 공동 8위다.

한국 감독으로는 김기덕, 임권택, 이창동, 홍상수, 김기영, 봉준호, 박찬욱, 신상옥의 이름이 아시아 감독 100선에 포함됐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유일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말레이시아의 야스민 아흐메드는 유일한 여성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의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는 1972년생으로 106명(공동순위 포함)의 감독 중 가장 젊다.

1위

<동경 이야기> Tokyo Story

오즈 야스지로 / 일본 / 1953년

한줄 추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깊고 진한 풍미가 느껴지는, 삶에 대한 통찰과 달관.

<동경 이야기>는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설문조사를 비롯해 영화인들이 뽑은 ‘영화사에 가장 중요한 영화’로 가장 빈번하게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순위는 늘 상향 조정되어 왔다는 것이다. 영화연구가 도널드 리치는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공통적 특질로 ‘하나의 테마, 약간의 스토리, 소수의 패턴… 불변의 카메라, 이동하지 않는 카메라, 영화적 구두법의 한정된 사용’을 꼽는다. 이는 오즈 영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양가적인 결과를 낳았던 형식적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오즈의 영화는 비슷한 패턴의 스토리 구조와 늘 겹치는 배우들 그리고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듯 보이는 고정된 위치의 카메라워크로 인해 ‘단조롭다’라고 폄하되기도 했다. 그가 동시대나 그 이후 세대의 일본 감독들에 비해 자국 내에서나 서구 영화이론가들에게 뒤늦게 주목받은 이유도 일부분은 이에 기인한다. 하지만 또 다른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 영화에 대한 저평가에 내포된 ‘부정성’이야말로 현대 영화 관객이 비판해야 할 ‘사상적 과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작품의 정적인 원리에 종속되는 일 없이 오직 필름의 운동으로 보는 사람’만이 오즈 영화의 내러티브나 형식적 단순함이나 반복이 아닌 영화 내부의 요소들이 단순한 대립을 넘어 융합으로 향해가는 운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1953년작인 <동경 이야기>는 이와 같은 오즈 영화의 특징을 매우 잘 보여주는(오즈의 모든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작품이다. 그의 모든 영화들은 그의 대표작인 동시에 다른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한 보충물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없는 정서와 감각을 내포하고 있다. 오즈의 영화 세계는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리좀’식(중심과 주변이라는 권력적 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중심점을 기반으로 무한 확장될 수 있는) 구조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즈는 이 영화의 각본을 자신의 오랜 파트너인 노다 고고와 공동으로 집필했고, 영화의 주요한 배경이 되는 도쿄와 오노미치를 오가며 로케이션 장소를 섭외했다. 촬영 역시 오즈와 10여편의 작품을 함께한 아쓰타 유우하루가 맡았다. 류 치슈, 스기무라 하루오, 하라 세쓰코 등이 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딸, 며느리가 되어 다시 만났다.

이 작품은 시골에 사는 노부부가 도쿄에 사는 장성한 자식 내외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사는 성공한 자식들은 삶의 무게에 치여 부모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하고, 오히려 죽은 아들의 며느리가 예의를 갖춰 그들을 모신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노모는 죽음을 맞고, 자식들은 장례를 치르고 떠난다. 자칫 ‘효/불효’라는 이분적 가치 구도와 쉽게 접합될 수도 있었던 이 이야기는 오즈라는 렌즈를 통과하면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잡힌 통찰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특히 오즈 영화의 뮤즈이자 그의 죽음과 함께 연기 활동을 접은 하라 세쓰코가 연기한 노리코(죽은 둘째아들의 처)와 시아버지의 마지막 대화는 고정된 관념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잔잔한 욕망을 진솔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폭로한다. 오즈는 노부부의 여정을 통해 ‘노년’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하는 삶의 양식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 대한 오즈의 고요하지만 통렬한 통찰은 시간을 건너 <동경가족>(2012)으로 재탄생되었고, 바다를 건너 독일에서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로 환생하기도 했다.

공동 12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Spring, Summer, Fall, Winter… and Spring

김기덕 / 한국 / 2003년

한줄 추천 감정의 절실함으로 관념적 추상성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

영화가 시작하면 속세일 리 없는 신비로운 공간이 물 위로 드러난다. 담 없는 절문, 벽 없는 방문, 호수 가운데 뜬 암자 등은 공간을 구도적으로 해석한 경우다. 영화는 이렇게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는 마음의 공간을 그려낸다. 거대한 섭리의 차안(此岸)에서 번뇌와 욕망은 나날의 개인을 옥죈다. 출생, 성장, 고난, 죽음으로 순환되는 삶의 과정은 마치 사계절이 돌아가듯 영겁의 시간을 이어간다. 추상적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경험할 법한 감정의 진정성이 절절하게 전달되기에 영화는 진부한 종교 알레고리를 넘어설 수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김기덕의 영화 경력에서도 초기작의 야생성이 미학적•주제적으로 발전된 전환점에 놓인 작품이다. 대사를 줄이고 시적인 정서로 주제를 호소하고 있다는 점도 후기작으로 이어질 주된 특징이다. 긷고 또 길어도 마르지 않을 김기덕 영화의 깊은 우물과 같은 근원적 작품이 될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적 장식성이 과잉되지 않았고, 내러티브도 사계절을 통해 치밀하게 맞물려 있다. 김기덕 감독이 각본, 연출, 편집, 출연 등 1인4역을 해냈다.

공동 12위

<하나 그리고 둘> A One and a Two

에드워드 양 / 일본, 대만 / 2000년

한줄 추천 복잡다단한 일상적 삶의 이면을 투시하는 에드워드 양 최후의 원숙한 시선.

결혼식으로 시작해 장례식으로 끝나는 영화는 할머니가 쓰러진 후 한 중산층 가족이 경험하는 삶의 동요를 따라간다. 손녀 틴틴은 자신의 불찰로 할머니가 쓰러진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직장인인 사위 NJ는 우연히 첫사랑을 만나 청춘의 감정에 설레지만, 새로운 사랑도 새로운 사업도 안 풀린다. 처남은 겉으론 행복해 보이지만, 우울감에 충동적으로 자살시도를 한다. 딸은 어머니가 쓰러지자 여성으로서의 삶에 회의를 느껴 안식을 위해 산으로 떠난다. 영화는 이웃집 치정 살해사건과 할머니의 죽음을 정점으로 전환을 이룬다. 제자리로 돌아온 구성원 각각은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삶을 받아들인다. “우린 세상의 진실의 반밖에 볼 수 없다.” 어린 양양의 말을 듣고 아버지는 아이에게 카메라를 사주게 된다. 작품은 미해결의 난제로 가득한 삶 속에서 우리는 절반의 진실밖에 볼 수 없음을 설파한다. 무용한 공간,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찍은 양양의 사진을 통해 에드워드 양은 자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존재론을 설파하고 있는지 모른다. 좁은 관계성 안에 대만 근현대사의 욕망의 충돌을 펼쳐내는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공동 15위

<체리 향기> A Taste of Cherry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 이란 / 1998년

한줄 추천 인생의 무게에 짓눌린 슬픈 영혼을 절망의 늪에서 건져올리는 따스하고 상큼한 위로.

1997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영화는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는 차를 몰고 인력시장을 비롯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살 이후 자신의 시신을 흙으로 덮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군인, 신학생, 자연사 박물관의 박제사 등이 차례로 그의 차에 오른다. 자살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삶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살하려는 남자가 누구이며, 왜 죽음을 택하려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차창 밖 풍경이나 차에 올라탄 세 인물이 그를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공들여 보여준다. 아들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마지막 승객은 자살하려다 체리를 들고 돌아왔던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를 설득한다. ‘체리맛을 포기하고 싶어요?’ 영화는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민족, 국가, 종교 같은 거창한 관념들이 아니라 체리맛과 같이 사소하고 것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영화의 말미에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실재- 영화 <체리 향기>의 메이킹 필름- 는 삶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그 어떤 설명적 대사나 감동적인 연기보다 더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4위

<아푸 3부작> The Apu Trilogy

샤트야지트 레이 / 인도 / 1955년

한줄 추천 인생의 비의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영화적 마술이 담긴 작품.

인도 사실주의 영화의 거장 샤트야지트 레이 감독은 ‘아푸’라는 소년의 출생부터 성장과정, 그리고 아버지가 되기까지의 긴 시간을 3부작으로 담아냈다. <길의 노래>(1955), <아파라지토>(1956), <아푸의 세계>(1959)로 구성된 3부작은 인도 예술영화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할리우드를 제외하고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인도는 오랜 영화 역사를 갖고 있지만 흥겨운 춤과 노래가 곁들여지는 마살라 무비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문학과 예술을 공부한 샤트야지트 레이 감독은 상업미술계에서 일하다 자비를 들여 <길의 노래>를 만들 계획을 한다. 영화광이었긴 하나 영화제작 경험이 없던 샤트야지트 레이 감독은 벵골 출신 작가 비부티부산 반디요파디에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길의 노래> 제작에 착수한 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하게 된다. 그렇게 탄생된 샤트야지트 레이 감독의 위대한 데뷔작 <길의 노래>는 인도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영화 지평을 넓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다.

<길의 노래>에서 아푸는 벵골 지방 시골에 사는 천진난만한 소년이다. 아버지는 늘 집을 비우고 엄마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허덕이지만 아푸는 밝게 자란다. 하지만 아푸 가족은 혹독한 가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아푸 누나가 병으로 죽게 된다.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린 아푸 가족은 폐허로 변한 집에서 초라한 이삿짐을 싸서 도시로 향한다. <아파라지토>(불굴의 인간)에서 아푸 아버지는 바라나시 강가에서 경전을 읽어주는 일을 하고 가족의 생활은 전보다 나아진 듯 보인다. 그러나 잠깐의 평온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깨지고, 아푸와 엄마는 할 수 없이 시골로 다시 이사를 가게 된다.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게 된 아푸는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고 콜카타로 유학을 떠난다. 아푸가 배움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엄마는 늙고 쇠약해진다. <아푸의 세계>에서 아푸는 돈 때문에 대학을 중퇴하고 작가가 되기 위해 가난을 견디며 생활한다. 오로지 문학에만 정진하던 아푸는 우연한 계기로 친구 동생과 결혼하여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하게 된다. 아푸의 아내는 출산을 위해 친정에 가고 아푸는 아내가 돌아올 날만 기다린다. 하지만 역시 전작들처럼 아푸의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

<아푸 3부작>은 아푸라는 한 남자의 인생사를 따라가고 있지만 작품마다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색깔을 띠지만 저변을 관통하는 세계관은 하나로 통합된다. 샤트야지트 레이 감독은 자연과 인간을 아주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지만 감상이나 미화는 철저하게 배제시킨다. 그렇다고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폄하하지도 않는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자신의 도리를 다하려고 애쓰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 점차 물질적이고 서구화, 현대화되는 사회, <아푸 3부작>에는 계속 이 세 가지 요소가 등장하지만 조화나 합일을 이루지는 않는다.

<아푸 3부작>에는 행운과 불운이 늘 교차한다. 기쁨 뒤에는 슬픔이, 성공 다음에는 좌절이 기다리고 있다. 비정한 자연과 생로병사의 고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이 3부작이 놀라운 점은 여기에 숨겨진 비의를 설명하지 않지만 화면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가 해석 불가능한 비의 ‘그 자체’를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공동 18위

<우게쓰 이야기> Ugetsu Monogatari

미조구치 겐지 / 일본 / 1953년

한줄 추천 전설을 따라가니 현실이 보이고, 행복을 좇다보니 비극을 맞게 되는 삶의 아이러니를 마술적으로 빚어낸 장인의 솜씨.

미조구치 겐지의 1953년 작품으로, 우에다 아키나리의 동명 소설 중 일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내를 버리고 떠난 두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미조구치 겐지가 시종일관 관심을 갖고 재현한 가부장적 봉건사회에서 희생되는 전통적 여성상을 흥미롭게 재현했다. 귀신, 도예 장인(匠人), 사무라이 등 일본의 전통적인 소재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서구의 합리적인 이성과 대비되는 신비스러운 동양적 분위기를 구현했다. 여기에는 1950년대 구로사와 아키라를 선두로 일본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서구영화계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자국 내 영화계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미조구치 겐지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이 영화로 그는 <오하루의 일생>(1952)의 뒤를 이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산쇼다유>(1954)로 3년 연속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론가들이 열광했던 이 영화의 형식미학적 절정은 미조구치 겐지 스스로 ‘서양회화에서 벗어나 일본화에 접근’함으로써 이룩했다는 독특한 ‘시퀀스숏’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대상에게 거리를 두고 부감숏으로 촬영된 롱테이크를 통해 폭력적인 삶 속에 던져진 주인공의 몸부림이 두루마리 그림을 열 듯 스르륵 펼쳐진다.

공동 18위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아쉬가르 파라디 / 이란 / 2011년

한줄 추천 이란 중산층의 소극을 통해 보여주는 구체적 현실, 더 나아가 보편적 질문에 도달.

별거 중인 부부 씨민과 나데르의 법정공방을 통해 이란 사회의 계급, 성차별, 종교 등의 첨예한 문제를 엮어내는 한편, 그것을 이란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고 거짓과 위선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확장시킨 수작. 2011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인 최우수작품상과 남녀주연상을 모두 휩쓸었다. 딸의 교육 문제, 이민에 대한 시각 차이, 치매 걸린 아버지 부양 문제 등 부부가 겪는 혼란 속에는 이란 남녀가 처한 환경, 중산층 가정의 디테일한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소동극의 중심에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던 간병인 라지에가 아버지의 손을 침대에 묶고 외출을 하고 아버지가 곤란을 겪게 되며, 격분한 나데르가 임신한 라지에를 밀치는 바람에 그녀의 아이가 유산된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겪는 첨예한 대립이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며,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이 123분간의 러닝타임을 촘촘하게 채운다. 이란을 대표하는 차세대 감독으로 주목받은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으로 대변되는 선배 감독들의 단조로운 스타일과 절연을 선언, 이란영화의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다.

공동 30위

<친애하는 당신> Blissfully Yours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 타이 / 2001년

한줄 추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세계로 입문하는 첫 관문이자, 새로운 영화 언어를 경험하기 위한 교과서.

낯선 영화 언어로 구축된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도 느닷없게 느껴질 수 있다. 롱테이크로 잡은 첫 장면의 의미는 상당히 시간이 지나야 파악할 수 있다. 무려 45분 정도가 지나서야 영화 제목이 나오는데, 이 지점을 지나면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남녀주인공 민과 룽은 타이와 미얀마의 국경지대 정글에 들어서면서 진정한 연인의 면모를 보인다. 미얀마인 불법체류자인 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신비롭고 은밀한 숲으로 룽을 이끈다. 공교롭게도 이날 민의 고용주 온도 애인과 밀회를 위해 숲을 찾는다. 민, 룽, 온 세 사람은 기묘한 삼각구도로 오후 시간을 보내게 된다.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정글은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위라세타쿤의 두 번째 작품이자 첫 극영화인 <친애하는 당신>은 타이의 자연과 전설, 인간의 원초적 욕망, 타이의 역사적 궤적과 상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합하는 신호탄을 알린 영화다. 이 첫 단추는 <징후와 세기>(2004), <열대병>(2006) 등을 지나 <엉클 분미>(2010)에서 일단락되고 위라세타쿤 감독의 세계는 다음장으로 넘어간다.

5위

<비정성시> A City of Sadness

허우샤오시엔 / 대만 / 1989년

한줄 추천 비극적 산문의 역사를 관조적 시로 엮어낸 수작

<비정성시>는 비극적인 대만 근대사를 한 가족의 수난과 엮어낸 수작이다. ‘카메라를 든 역사가’를 자청했던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를 필두로 <희몽인생>(1993), <호남호녀>(1995)를 통해 대만의 역사와 개인의 경험을 굽어본 바 있다. 영화는 51년간의 식민지배가 종식되었던 1945년에서 시작해 국민당 정부가 수립되던 1949년까지의 시간을 경유한다. 임씨네 가족엔 네 형제가 있다. 첫째 문웅과 셋째 문량은 장사치로 상하이 조직과 알력다툼을 하게 된다. 지식인 출신인 둘째 문상은 실종된 후 소식이 없다. 막내 문청은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사진사로 책읽기를 좋아한다. 영화는 막내인 문청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그에게는 지식인 친구인 관영이 있는데, 그를 통해 문청은 청년들의 반정부운동을 멀리서 지켜보게 된다. 관영의 여동생 관미는 문청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문청의 가족과 친구들의 경험은 2시간40여분의 긴 러닝타임 동안 광대하게 펼쳐진다. 둘째는 친일 부역 이력으로 헌병에게 잡혀갔다온 후 미쳐버린다. 둘째는 유서를 통해 가족에게 사망을 알린다. 장남은 시비에 휘말려 살해되고 만다. 관영과 반정부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은 비운의 근대사 속에서 처연한 최후를 맞이한다. 문청은 관미와 결혼해 새 가족을 이루지만 광포한 역사는 이들의 행복을 비켜가지 않았다.

중간중간 자막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무성영화적 특징, 극도의 롱숏과 롱테이크는 <비정성시>의 가장 두드러지는 미학적 형식이다. 문청이 관미와 주고받는 필담, 친구와 주고받는 시, 가치를 위해 죽어간 자들의 유서 등은 관련 장면 이후에 자막으로 제시된다. 관객은 앞선 장면에서 대사 없이 그들의 정서를 추측하고 이어지는 자막을 통해 이들의 감정을 시적으로 확인한다. 감독은 대상을 멀리 두고 촬영하여 무심한 듯 흐르는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있는데 특히 문청의 집 안과 관미가 근무하는 병원의 롱테이크가 인상적이다. 식사 장면에는 늘 노래와 연주가 동반되어, 비애 속에서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생활의 의연함을 보여준다. 관미가 근무하는 병원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라디오를 통해 대만 근대사의 현장이 중계되기도 하고 2•28사건과 같은 실제 사건과 관련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엄격히 통제된 영화 형식을 통해 감독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감을 교묘히 활용하였다. 고정된 카메라는 주로 가족 공간에 주목하는데, 거실 바깥에서 벌어지는 학살, 광기, 정치적 탄압 등의 실제 사건은 실내 장면을 통해서만 암시될 뿐이다. 처참한 근대사의 경험과 모순될 정도로 카메라는 무심한 대자연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포착하기도 한다. 이러한 완강한 거리감 속에서 인물의 경험에 침잠해가다 보면 서서히 깊은 비애감에 젖어들게 된다. 개인적 경험에 있어서는 탐미적 센티멘털리즘을, 공동체의 경험에 있어서는 극도의 절제감을 견지하였다. 영화는 거대한 역사를 굽어보지만 기이하게도 산문적이라기보다는 시적으로 충만한 관람의 경험을 제공한다. 거장의 솜씨다.

공동 37위

<애정만세> Vive L’Amour

차이밍량 / 대만 / 1994년

한줄 추천 세기말, 현대인의 고독을 그려내며 등장한 대만 뉴웨이브의 새로운 기수, 차이밍량. 그가 파편화된 개인의 외로움에 보내는 담담한 시선은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위로다.

<애정만세>는 신인감독이었던 차이밍량에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기며 대만 뉴웨이브 2세대의 서막을 연 작품이다. 말레이시아 출신이자 성소수자인 차이밍량은 급속한 근대화를 통해 고도성장한 대만을 배경으로 현대인들의 소통 부재를 그려낸다. 부동산 업자 메이(양귀매), 묘지를 판매하는 시아오강(이강생), 거리에서 옷을 파는 아정은(진소영), 세 인물은 서로 연결된 동시에 단절되어 있다. 시아오강과 아정은은 메이가 파는 텅 빈 집에 숨어살다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여기서 집은 거주하는 곳이 아닌 물질적 지표인 동시에 서로를 소외시키는 기이한 공간이 된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대만인을 응시하는 차이밍량의 영화는 천편일률 상업영화의 대안을 제시한다. 롱테이크와 적은 컷 수, 절제된 대사 등은 차이밍량이 단절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현대인의 소외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해 관객까지 고독 속에 동참시켜온 차이밍량의 세계는 이후 <하류>(1997), <안녕, 용문객잔>(2003), <흔들리는 구름>(2005)으로 꾸준히 이어진다. 자본에 굴복하지 않고 “관객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다”는 차이밍량의 세계를 싹 틔운 씨앗 같은 영화다.

공동 37위

<부운> Floating Clouds

나루세 미키오 / 일본 / 1955년

한줄 추천 근대적 멜로드라마의 정수. 이성과 합리를 비웃는 정념의 세계란 바로 이런 것!

여성 중심 멜로드라마로 일가를 이룬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대표작이자 가장 대중적인 작품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여성 작가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여러 차례 영화화했는데 <부운>도 그중 한 작품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페르소나와 같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여주인공 유키코 역을 맡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차이나에서 만난 공무원 도미오카와 유키코의 파란만장한 연애사가 펼쳐지는 영화다. 유부남이었던 도미오카는 유키코에게 귀국하면 결혼하자고 약속하지만 허망한 맹서일 뿐이었다. 유키코는 도미오카의 집까지 찾아가서 사랑을 확인하려 들지만 그의 열정은 이미 식어버린 상태다. 도미오카의 변심을 확인한 유키코는 사이비 교주가 된 사촌오빠와 동거를 하기도 하지만 매번 도미오카 때문에 가던 길을 되돌아온다. 나루세 미키오의 다른 여주인공들처럼 유키코도 자신의 상황과 상대의 진면목을 정확히 알고 있다. 도미오카는 현실 도피적이고 유약한 남자다. 유키코는 그럼에도 도미오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엇나간 지긋지긋한 사랑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공동 48위

<철서구> West of Tracks

왕빙 / 중국 / 2003년

한줄 추천 형식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21세기의 시네아스트. 봤어도 인식하지 못한 것들을 영화가 어떻게 보이도록 만드는지 궁금하다면.

현재 중국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 왕빙이다. 산업적인 외연의 성장은 감독과 작가 사이의 장벽을 더욱 두텁게 만들 뿐이지만 그 와중에 왕빙만큼은 다큐멘터리의 최전선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중국의 현재를 담아내고 있다. 그는 독자적인 스타일과 작업 방식을 통해 영화가 온전히 작가 1인의 결과물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집단 작업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지자 왕빙은 한발 더 나아가 다큐멘터리의 시간마저 해방시켜버렸다. 무려 9시간45분에 달하는 <철서구>는 그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녹> <폐허> <철로> 3부작으로 구성된 <철서구>는 각기 노동이라는 행위, 폐허라는 공간, 그 사이를 버티고 선 사람들의 상실을 다룬다. 3년 가까이 중국 센양의 티에시 지구에 머물며 점차 폐허로 변해가는 것들과 시간에 마모되어 사라져가는 것들을 말 그대로 고스란히 담았다. 고정관념을 깨고 소위 말하는 ‘쓸모없는 것들’의 시간을 응시하며 잊혀져가는 것들의 존재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장대한 상영시간을 견딜 수만 있다면 어떤 영화보다 진한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 China Film Archive

공동 8위

<작은 마을의 봄> Spring in a Small Town

페이무 / 중국 / 1948년

한줄 추천 뒤늦은 가치 평가만큼이나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작품이다. 시대를 앞선 절제된 형식과 미학을 갖춘 페이무 감독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번 ‘아시아영화 100’에서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은 페이무의 <작은 마을의 봄>이다. 그간 영화평론가들이 아니라 중국 감독들 사이에서 회자되어온 ‘필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영화는 1946년 전쟁이 끝난 후 중국 남쪽의 한 작은 마을. 폐허가 된 집에서 살아가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다. 아내 주유웬과 남편 다이리옌은 명목상 부부관계를 이어나갈 뿐이다. 유웬은 아픈 남편을 피해 약과 찬거리를 사러 가는 시간이 하루 중 유일한 해방의 시간이다. 대화가 없던 부부에게 어느 날 젊은 의사 장지첸이 찾아온다. 리옌에겐 8년 전 헤어진 절친한 죽마고우이자, 유웬에겐 결혼 전 지첸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진 옛 연인이다. 친구와 아내와의 관계를 모르는 리옌은 여동생 슈와 지첸을 맺어주려 하지만, 정작 유웬과 지첸은 과거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되살아나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리옌이 두 사람을 맺어주려 자살을 기도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지첸이 마을을 떠나고 부부가 그를 전송하면서 위기와 불안이 잠식된다.

<작은 마을의 봄>에서 옛 애인을 향한 유웬의 방황은 사랑이라는 강렬한 동기보다는 지친 현재의 삶에 대한 반기에 가깝다. 페이무 감독은 전쟁 후 자국 내에 깃든 불안한 사회상을 한 부부의 내면에 깃든 혼란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군데군데 부서져 스러져가는 담벼락을 중심으로 한 낡은 집은 인물들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데, 한정된 공간에서 유웬을 중심으로 남편, 옛 애인, 시누이, 하인이라는 다섯 인물이 펼치는 긴장감은 이 영화의 백미다. 영화에서 내레이션의 사용도 독특함을 더한다. 변모하는 유웬의 심리에 따라 내레이션의 비중이나 시점을 자유롭게 운용함으로써 극을 전반적으로 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리듬감을 살려준다(이 내레이션은 2002년 티엔주앙주앙 감독이 리메이크한 동명의 작품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는데, 두 영화의 분위기를 확연하게 달리 만들어주는 장치다).

중국영화사에서 탁월한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입각한 당시 분위기에서 볼 때 이 영화가 처한 운명은 쉽지 않았다. 작품이 제작되던 1948년은 마오쩌둥의 집권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전통적 서사 구조에서 벗어난 <작은 마을의 봄>은 정제된 형식과 세련미를 갖춘 영화라는 호평 이전에 불륜이라는 퇴폐적인 소재에 대한 지적과 시대의 고민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더 크게 받았다. 이렇게 영화 자체로 인정받기보다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던 시절 페이무는 영화 본연의 예술성과 가치에 주목한 감독이었고, 그 때문이었을까, <도시의 밤>(1932)으로 데뷔한 이래 생전 20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평단의 외면을 받은 비운의 감독이다. 자국뿐만 아니라 해외 평단의 반응에서도 소외되었다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독일 영화연구자 슈테판 크라머는 중국영화사를 개괄한 <중국영화사>에서도 <작은 마을의 봄>은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고, 일본 비평가 후지이 쇼조가 중국영화사를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한 <현대중국, 영화로 가다> 같은 비평서에서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작은 마을의 봄>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 대만과 홍콩 평론계의 재조명을 통해서였다. 2005년 중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홍콩금상장협회와 홍콩영화평론학회가 실시한 100편의 대표적인 중국영화 집계에서 1위에 선정된 것(2위부터 5위까지가 <영웅본색> <아비정전> <황토지> <비정성시>였다). 뒤늦게 조명받은 <작은 마을의 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공동 66위

<붉은 살의> Intentions of Murder

이마무라 쇼헤이 / 일본 / 1964년

한줄 추천 모진 수난 속에서 기이한 생명력으로 번득이는 하층민 여성의 야생성.

사다코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묵묵히 일하지만 식모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는다. 어느 날 강도가 침입해 그녀를 결박하고 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다코는 자살을 결심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강간범은 스토커처럼 사다코의 주위를 맴돌고, 주위에 알려질 것이 두려운 사다코는 자기가 죽을 게 아니라 강간범을 죽여버리자고 작정한다. 영화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 강간범은 사다코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병으로 죽게 된다. 우연찮게 사다코를 미행하던 남편의 불륜녀도 사다코가 탄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죽어버린다. 자살 실패 후 태연히 돌아와 밥을 먹는 장면이나 허벅지에 누에를 올려두고 흥분하는 장면 등에서 사다코가 의식의 검열 없이 본연의 생명력에 충실한 여성임이 인상적으로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였던 주인공이 영화가 진행되며 점점 주위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가다 종국에 가서는 가장 강자가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일본곤충기>(1963)에 이어 <붉은 살의>에서 하층민 여성의 거친 삶과 강인한 생명력을 통해 가부장적 일본 사회의 대안을 모색해왔다. 범죄와 치정이 난무한 세계 속에 살고 있지만 일상은 위선적일 정도로 소시민적 평온함에 싸여 있는 근대 일본을 냉철하게 해부해온 작가의식의 발로였다.

공동 66위

<휴일> Holiday

이만희 / 대한민국 / 1968년

한줄 추천 매서운 겨울바람이 갈 곳 없는 청춘들을 더욱 외롭게 만드는 차가운 정서는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만희의 1968년작. 제작 당시 어두운 이야기 때문에 검열을 통과하지 못해 개봉되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다. 2005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굴해 상영하면서 세상에 다시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휴일>은 빈털터리 남자 허욱(신성일)의 한겨울 어느 일요일을 그린 이야기다. 허욱과 그의 연인 지연(전지연)은 아이 셋을 낳아 2층 빨간 양옥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현실은 임신 6개월째인 지연의 임신 중절 수술비는커녕 커피 한잔 마실 여유가 없다. 허욱은 임신 중절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친구들을 차례로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카메라는 정처없이 떠도는 허욱의 무기력한 주말 하루를 건조하게 담아낸다. 특히, 자신의 무능력, 여자친구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친구의 돈과 시계를 훔쳤다가 잡혀 얻어맞은 상처 등 여러 감정을 복잡하게 오가는 가운데, 허욱이 여자친구와의 행복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영화의 마지막 전차 시퀀스는 무척 쓸쓸하고 애절하다.

공동 66위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왕가위 / 홍콩 / 1994년

한줄 추천 왕정문의 <몽중인>과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으로 청춘의 열병을 앓았던 이들에게.

왕가위는 자신의 영화를 이렇게 비유한 적 있다. <해피 투게더>는 마지막 술잔을 털어넣고 추는 탱고 같고, <화양연화>는 뜨거운 중국 차 한잔을 마시는 것과 같고, <2046>은 이내 빠져들고야 마는 아편 같고, <중경삼림>은 콜라처럼 상쾌한 영화 같다고. <열혈남아> <아비정전>에 이은 왕가위의 세 번째 영화 <중경삼림>은 외로움을 그림자처럼 지고 사는 도시 남녀의 이야기에 콜라의 청량감을 더한 작품이다. 영화는 두개의 러브 스토리를 병렬시킨다. 만우절에 농담 같은 이별을 한 경찰 233(금성무)과 선글라스와 레인코트를 늘 입고 다니는, 마약 밀매 중개를 하는 여자(임청하)가 첫 번째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패스트푸드점 가게에서 언제나 똑같은 샐러드를 사가는 경찰 663(양조위)과 그를 짝사랑하는 패스트푸드 가게 알바생 페이(왕정문)가 두 번째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 치기어린 행동을 일삼는 캐릭터들의 매력은 영화 전반의 분위기로 이어지는데, <중경삼림>은 미완의 사랑을 이야기해온 왕가위의 영화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문학, 음악 등에 정통한 왕가위의 신선한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

공동 10위

<하녀> The Housemaid

김기영 / 한국 / 1960년

한줄 추천 창작과 비평 양면에서, 예나 지금이나 한국영화계를 지배해온 것은 사실주의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이 ‘마성의 표현주의’라고 부른 김기영의 영화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왜 유현목의 <오발탄>이 아니라 김기영의 <하녀>인가?’라고 묻는 것은 ‘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이 아니고 히치콕의 <현기증>인가?’라고 묻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이번 ‘아시아영화 100’에 버티고 선 김기영이라는 이름은, 지난 한국영화 역사의 흐름과 방향 그리고 미학에 관한 전면적인 재설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만으로도 이 순위는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변화다. 더욱이 김기영이 새롭게 주목받게 된 계기 또한 199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가지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차기작을 준비하던 김기영은 회고전을 가진 다음해 1998년 2월25일 아내와 함께 화재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하녀>(1960)는 김기영이 반공영화 <죽엄의 상자>(1955)로 데뷔한 뒤, <양산도>(1955)를 지나 배우 김지미를 발굴한 <황혼열차>(1957) 등을 만든 다음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7번째 영화 <10대의 반항>(1959)을 거쳐 그 특유의 독창적인 표현주의 세계로 전환하는 기점이 됐다. 위험한 여자가 내러티브의 중심에 놓인 파격적인 상황 설정과 비일상적인 대사, 그가 직접 설계한 연극적인 프로덕션 디자인과 조명, 그리고 그 무대를 가득 채운 뒤틀린 욕망과 성적 억압 등은 단숨에 그의 스타일과 미학을 규정하는 그 모든 것이 됐다.

<하녀>를 대략 10년 주기로 각각 시대에 맞게 변주한 <화녀>(1971)와 <화녀82>(1982)까지 3부작이라고 한다면, 역시 실화로부터 출발한 <충녀>(1972)와 그를 리메이크한 <육식동물>(1984), 그리고 이만희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1975)과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9) 등 줄곧 그는 여성주인공을 내세워 부르주아 가정의 위기와 변화하는 시대상을 담아냈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그러한 인간 욕망에 대한 탐구를 두고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나온다”는 김기영의 말을 인용하며 ‘검은 피의 미학’이라 규정했다. 한국영화에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뒤늦은 애정고백을 바치는 후배 감독들이 속속 등장했다. 박찬욱 감독은 자신을 영화감독의 길로 이끈 영화 중 하나로 <화녀82>를 꼽았으며, 봉준호 감독은 대학 시절 황학동 시장을 뒤져 VHS비디오로 출시된 그의 영화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고 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두 한국 감독의 서로 다른 작품들에서, 도무지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돌발적인 에너지와 엇박자의 리듬 등 김기영 영화의 흔적을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결정적으로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이끄는 세계영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영상자료원이 2008년 복원한 <하녀>가 그해 칸영화제에 특별초청되고,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한 <하녀>(2010)가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면서 그 ‘재발견’의 기운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렇게 김기영의 영화는 여전히 회자되며 그 영향 관계의 계보를 더 넓혀가고 있다. 의식과 잠재의식 사이에서 피어나는 원초적 본능과 광기, 그를 자기본위의 에고이즘 아래서 바라보는 초현실적 표현주의, 그리고 외화 쿼터나 검열 등 시대의 조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동료 감독들에 비해 과작(寡作)이었던, 더불어 자신의 창작 시나리오를 영화화할 때 더욱 빛났던 고집스런 작가정신이야말로 그를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특별하고 독창적인 감독으로 만들었다.

공동 66위

<일로 일로> Ilo Ilo

앤서니 첸 / 싱가포르 / 2013년

한줄 추천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다시 쓴 아시아영화의 새로운 지형도.

<일로 일로>는 싱가포르 출신 감독 앤서니 첸의 첫 번째 장편영화로,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었던 필리핀 가정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담은 자전적인 작품이다. 이야기는 10살 소년 자러와 소년의 집에 고용된 필리핀 가정부를 중심으로, 이들이 어떻게 각자의 빈자리를 서로의 온기로 채우며 각별한 인연을 쌓아가는지에 대해 큰 동요 없이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엮어가며 진행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잔잔한 과정에서 앤서니 첸이 보여주는 것은 1990년대 말, 싱가포르를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급속한 경제 성장의 후폭풍처럼 찾아온 금융 위기가 만들어낸 전례 없는 균열들이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아빠, 회사에서 해고될까 전전긍긍하는 엄마,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향을 버리고 타지에서 ‘노예’처럼 일해야 하는 테레사, 여기에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복권에 매달리는 자러까지, 경제 위기는 모두의 삶을 부지불식간에 잠식해버린다. 등장인물들과의 적절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한 채 일상의 작은 사건들을 통찰력 있게 관찰해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이 떠오른다. 2013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다.

공동 66위

<해상화> Flowers of Shanghai

허우샤오시엔 / 대만 / 1998년

한줄 추천 영화의 아름다움은 미학적 모험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여전한 가르침.

허우샤오시엔의 14번째 영화 <해상화> 앞에 붙는 수식어는 언제나 ‘롱테이크’였다. 실제로 130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에 숏은 놀랍게도 39개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해상화>가 대만 출신인 허우샤오시엔이 중국을 배경으로 만든 첫 번째 영화라는 점이다. 이 영화는 1894년 출간된 한방칭의 소설 <해상화열전>을 원작으로 하며 19세기 상하이 유곽의 여인들과 손님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해상화>의 새로움은 이 낯선 매혹을 바라보는 허우샤오시엔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해상화>에서 그는 <비정성시>의 대만 가족의 식탁을 19세기 중국 유곽의 술상으로 옮겨온다. 전자의 롱테이크가 ‘대만의 역사’라면, 후자의 롱테이크는 중국의 시간을 바라보는 허우샤오시엔의 예의에 가깝다. 한 인터뷰에서 허우샤오시엔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해상화>에 담은 수백년 전의 중국은 내가 읽었던 모든 책들로부터 상상하고 이해한 중국이다. 이렇게 내가 상상한 중국은 아마도 진짜 중국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공동 66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The Day a Pig Fell into the Well

홍상수 / 한국 / 1996년

한줄 추천 홍상수가 직접 쓴 ‘홍상수 영화 비밀 해설서’. 데뷔작 다시 보기의 즐거움.

1996년 데뷔한 홍상수의 영화들을 아마도 시간 순서에 따라 차례로 보아온 관객이 있을 것이고, 그 중간 어디쯤부터 시작해 거슬러 올라간 관객이 있을 것이다. 그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전자의 관객에겐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작을 동시대에 목격하는 행운의 순간을, 후자의 관객에겐 의뭉스럽기만 한 ‘홍상수 영화의 비밀’의 ‘날것’에 가까운 원형들을 찾을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구효서의 소설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했지만 영화에서 소설의 흔적은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복과 차이’, 그리고 그 구조 사이를 비집고 나온 ‘감정’들을 경험하는 것이 홍상수 영화 보기의 쾌감이라지만, 이 영화의 매혹은 오히려 다섯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도를 정교하게 엮어낸 ‘우연’과 ‘필연’의 놀라운 균형감에서 비롯된다. 소설가 효성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영화는 나머지 네 인물들과 연이어 바통을 주고받듯 연쇄적으로 진행되는데, 그 연결고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우연과 필연의 반복이다. ‘우연’을 홍상수만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감독은 많지 않다. 그러니 이 영화는 말하자면 홍상수가 벌이는 ‘우연의 실험’의 출발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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