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폐쇄회로를 벗어나다
홍상수 감독의 네번째 작품 <생활의 발견>이 드디어 공개됐다. 지난 3월4일 첫시사회에서 선보인 <생활의 발견>은 충분히 홍상수적이지만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홍상수는 더이상 출구 없는 미로에 자기를 가둬두지 않고, 자신의 인물들과 세상을 거닐기 시작했다. 이건 홍상수의 새로운 단계다. <생활의 발견> 작품평, 그리고 어느 전작에서보다 감독의 모습이 짙게 배인 주연 김상경에게 홍상수와의 조우기를 들었다. <생활의 발견>은 3월22일 개봉한다. 편집자
개인적인 기억 하나. 1996년, 낯선 감독의 이상한 제목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만났다. 도시인의 추레한 일상을 담은 풍경에 걸맞는, 어딘지 옛날 극장 냄새가 나는 코아아트홀에서. 신나게 웃으며, 가슴 한 구석에 서늘한 바람이 지나간 걸 느끼며 나오니, 찬바람이 거리를 휘감고 있었다. ‘닮지 않았어?’, ‘똑같아.’ 그런 말들을 내뱉으며 반추해본 홍상수의 데뷔작은, 가급적이면 만나고 싶지 않던 우리의, 아니 나의 자화상이었다. 3류의 인생을 살아가는(그게 굳이 나쁘다거나 창피하지는 않은), 질척거리는 일상에서 맴돌고 있는.
홍상수 영화에는 늘 그런 기운이 있었다. ‘지리멸렬하고 파편적인 삶’, 상호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의미없는 우연과 반복, 냉소주의와 멀찍한 시선, 일상으로 쌓아올린 인물들의 두터움, 익숙한 영화적 관습을 근저부터 뒤흔들기 등등. 그것은 해외에서도 찬사를 받는, 홍상수 영화의 브랜드 가치였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에 이르기까지, 홍상수의 영화는 단 한번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영화는 늘 다른 걸음과 표정으로 다가왔다. 한결같으면서도, 어딘가 변한 모습. ‘질보다는 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홍상수의 말은, 그의 영화에서 증명된다. 그의 영화는 전작과 질적으로 다른 명백한 도약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가면, 그 지나온 길의 풍경과 거리만큼이 새롭게 아로새겨진다.
발걸음 가는 대는, 마음 가는 대로
<생활의 발견>은 홍상수 영화의 전작들과 많이 닮아 있으면서, 또 다르다. 전작들은 형식적인 치밀함이 두드러졌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네명의 인물들을 종횡으로 어지럽게 얽어놓으며 파국으로 몰고간다. <강원도의 힘>은 동시간에 벌어지는 상황을 잘게 이어붙이며 지리멸렬한 삶을 관찰한다. <오! 수정>은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두개의 기억으로 재현한다. 얼핏 보기에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일상의 표면을 죽 훑어내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내부에는 의식적인 조립과 부연이 섬세하게 덧대어져 있었다. 형식주의는 아니지만, 인물들의 욕망과 동선은 철저하게 조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활의 발견>에서 인물들은 허허롭게 돌아다닌다. 길을 가다가, 평소에 익숙하던 길에서 벗어나 낯선 길로 접어들었을 때의 자유로움과 낯섬이 배어난다. 목적지를 향해 가다가, 아무 데나 마음 내키는 역에서 그냥 내렸을 때의 한가로움 같은 것.
<생활의 발견>의 경수는 그냥 이리저리 헤매다닌다. 그러다 여자를 만나고, 섹스 혹은 사랑을 하고, 떠나간다. 이 인물은 어딘가에 치우침이나 회한이 없다. 그냥 발 닿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간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토록 자유로운 발걸음은 이전에 없었다. <오! 수정>까지의 인물들은 늘 무언가에 얽매여 있고, 죽음의 그림자에 한발을 들이밀고 있거나,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어했다. 하지만 <생활의 발견>의 경수, 명숙, 선영은 그냥 살아간다. ‘매일매일을 열심히 살기로 했어요’라는 명숙의 말은 농담처럼 울리지만, 치열한 진담이다. 그들은 살아간다. 어리석게 살아가지만, 그것 또한 치열하다.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은 이제 감독의 손으로만 조종되는 인형이 아니다. 홍상수는 더이상 그들을 비상구 없는 미로에서 맴돌게 하는 ‘잔혹한 신’이 아니다.
캐스팅을 거절당한 경수는 충동적으로 선배를 찾아 춘천으로 간다. 그 곳에서 배우인 경수를 좋아한다는 명숙을 만나고, 이런저런 소동을 벌인 뒤 고향인 부산으로 가다가, 옆자리에 앉았던 선영을 쫓아 경주에 내린다. <생활의 발견>은 이 짧은 여행의 기록이다. 에피소드나 기억을 곰곰이 따져볼 필요도 없다.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보이고 모든 것이 드러난다. ‘이전 영화들에서는 구성면에서 인위성이 있었다. 매번 하다보니 다른 걸 해보고 싶어서’ 만들어진 <생활의 발견>은 말 그대로, 행동과 인식의 자연스러움을 따라간다. <생활의 발견>에서 가장 튀는 인물은 명숙이다. 처음 본 남자를 앉혀두고 면전에서 살사를 추고,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경수에게 “우리 어색한 거 깨게 뽀뽀나 할까요?”라고 말을 던지고, 섹스를 하고나서 난데없이 ‘사랑하지 않죠?’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며 토라지는 명숙을 보고 있으면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리다가, 그게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들 주변의 수많은 인물들에서 추출된, 아주 풍성한 인물. 그들은 우리를 닮았고, 우리는 그들을 닮았다. <생활의 발견>의 인물은 한층 더 우리 곁으로 다가앉았다.
“신비, 끝내 모를 것”
<생활의 발견>은 전작과 약간 달리,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트리트먼트만으로 크랭크인을 했다. 현장에 가서 그 순간의 느낌으로 대사와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전작들도 현장에서 상황과 대사를 바꾸기는 했지만, 모든 것을 즉흥적인 직관에 맡긴 것은 <생활의 발견>이 처음이다. 홍상수 감독이 트리트먼트 서문에 붙여둔 메모에는 이런 말들이 있었다.
사람들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해놓고, 놔두고 보면 서로들 서로를 흉내내고 있는 걸 보게 될 것이다. - 에릭 호퍼(1902-1983)
우리 행동의 부조리함은 거의가 다 우리가 흉내내서는 안 될 것- 그게 사람이든 뭐든- 을 흉내내려고 하는 데서 기인한다. - 사무엘 존슨(1709-1784)
그 메모처럼, <생활의 발견>에서 핵심적인 시제(詩題)를 끌어낸다면 ‘모방’(넓은 의미에서의)이다. “아는 사람 중에 술 마시면 몸을 흔드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그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그 사람 하던 걸 내가 하더라. 술 먹으면서 흔들고. 모방이란 것을, 그런 패턴으로 조각들을 이어붙여보면 어떨까. 우연이랄까 이런 것도 그것과 연결되는데 내가 말하는 모방은 넓은 의미다. 아주 하찮은 것. 남자가 춘천에서 오리배를 보고 경주에서 오리배를 또 본다. 한 인간이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요즘 오리배가 유행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여자 두명의 편지에도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라는 똑같은 표현이 나온다. 동시대의 두 여자가 사랑의 표현으로 그런 걸 쓴다는 것도 모방이다. 남자가 ‘사람되기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는 말 따라하는 것도 그렇고. 마지막에 영화의 결말을 맺는 모방은 청평사 설화이야기다. 공주가 밥 가지러 온다고 절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고 기다리던 뱀이 들어가려다가 천둥번개가 치니까 문 앞에서 돌아나온다. 경수가 그 여자 집 앞에 갔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을 것 아닌가. 그 설화가, 내 꼴이 꼭 뱀 같네. 그런 생각을 하고, 그게 굉장히 신비스럽게 다가왔을 것 같다. 그 패턴에 권위를 부여해서 행동을 결정해서 가는 것이다. 그런 것도 모방이다. 설화가 보여주는 이야기 패턴을 자기가 모방한다고 생각한 거다.”
홍상수의 영화는 지금까지, ‘냉소적’ 혹은 ‘비관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맞는 말이다. 홍상수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거운 돌을 굴리고 있다.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은 있지만, 비루한 삶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의 인물들은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오! 수정>의 수정은 약간 다르다. 수정은 비상을 꿈꾼다. 어쩌면 우연이라고 믿는 남자와 달리, 그녀는 모든 것을 ‘의도’대로 끌고 나간다. 신분의 상승을 위해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정의 욕망은, 온갖 계산된 행동은 그러나 추해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누구나 택하는 일상의 거울일 뿐이다. 날개를 꿈꾸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치열하게 원하고 또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의도는, 어쩌면 우연이 아닐까.
“우연이란 신비함과 관계가 있다. 신비주의 이런 게 아니라. 세상에는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들이 결정돼 있다. 끝내 모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게 나한테는 신비다. 자기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분짓고,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 그런 태도를 좋아한다. 그걸 신비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꾸 관찰되는 게 우연이다. 우연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있지 못하지만 사실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자기 능력의 결과라고 믿고 있는 것도 사실은 우연의 조합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가 너그러워졌다, 서글해졌다
홍상수의 영화는 세상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기에는 꽤 삐딱하지만, 비관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다만 방법이 다를 뿐이다. “우리 사람되기 힘들지만”이라는 대사는, 농담이 아니다. 홍상수는 영웅이나, 어떤 역할모델을 거부한다. “미화되고 어떤 모델들을 자꾸 상정해서 보여주고 이런 것이 더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잘됐다고 하는 사람들을 흉내낸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도 우리는 안 된다. 한 개인이 그 상태에 있기까지 엄청나게 많은 조각의 엘리멘터리들이 쌓여서 나아간 건데, 운도 좋아서. 그렇게 멋있어진 사람 자꾸 본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꾸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모델을 보여주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대다수가 그렇지 못하고 끙끙대고 사는 사람들인데. 자꾸 된다고 환상을 갖고 그러는 것보다 자기를 과감하게 인정하게끔 해서 자기만의 꽃을 개화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 기계적인 이데올로기나 통상적으로 수용하는 지혜나 이런 것들이 갖는 편파적인 태도가 있다. 그건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방법론상으로 잘 안 통한다. 그런 것들보다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기의 몸과 마음의 생김새를 인정하고 거기서 새로 시작하게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 <생활의 발견>의 초라하지만 솔직한 사람들이다. 하룻밤에 무슨 사랑이냐고 비웃다가는, 자신도 똑같이 ‘사랑한다’를 남용하고. 잘 나가는 남편을 절대로 버릴 수 없지만, 욕망도 포기할 수는 없고.
<생활의 발견>에서는 ‘난 과정을 믿고 거기에 건다’던 홍상수의 태도가, 한결 너그러워졌다. 이번에는 집요하게 인물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거나 복마전을 헤매게 하지 않는다. 깨달음이나 변신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그저 마라톤 선수처럼 꾸준하게 달려간다. ‘정체성은 물질적’이란 말대로, 인간의 물질성을 침착하게 관찰한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에 공명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준다. 풀어놓고, 본성을 찾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에 나온 배우들이, ‘절정의 연기’를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홍상수는 뼈대 위에 찰흙을 계속 덧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인물을 만든다. 연이은 덧붙임의 과정에서 인물의 풍성함이 살아난다. 대사 하나, 움직임 하나에 집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그 인물들의 일상이 곧 그들이고, 그것이 연기자에게 침투한다. 인물들을 악착같이 몰아붙이던 전작과 달리, 느긋하게 연기자를 방목하는 <생활의 발견>을 보고 나서는 우울하지가 않다. 어쩐지 술잔이라도 기울여야할 것 같은, 과거의 막막함이 누그러들었다.
공간의 의미도 한결 느슨해졌다. 사람들이 놀러가는 곳. 유흥지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춘천과 경주에서, 경수는 여인들에게 작업 들어가는 데 소일한다. 익숙한 공간은,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비틀려서 투영된다. 빨간 조명이 켜진 술집의 쪽방처럼 의미가 탈색된 공간일 뿐이다. 일상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아무리 멀리 가도 도망칠 수 없는 세상. 그곳에서 경수는 회전문을 돌아나오는 뱀처럼, 비를 맞으며 여인의 집 앞에서 돌아선다. 그 설화를 떠올려도, 아마도 경수에게 깨달음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돌아나와서도, 다시 고향인 부산이나 생활의 현장인 서울로 돌아와서도 변함없이 살아왔던 일상을 반복할 것이다. <생활의 발견>은 역사적인 발견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냥 내가 ‘누군가를 모방하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상적인 ‘표면의 영화’다. “진실은 표면에 있으며, 영화는 표면을 담아내는 데 가장 적합한 예술”이란 말처럼.
나는 개인적으로 <오! 수정>을 많이 좋아했고, 하나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홍상수의 인물탐구는 비슷하다. 그건 마치 경찰서의 ‘심문’과 비슷하다. 묻고, 또 묻고, 지칠 때까지 캐물어 원하는 답을 얻어내는 것. 아니 듣지 않아도, 그 과정 자체가 요구하는 답이 이미 존재하는 것. 홍상수의 답은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수정> 이후에는 조금 다른 답을 듣고 싶었다. 변화가 아니라, 걸어온 거리만큼의 다른 풍경을. <생활의 발견>은 같은 듯, 다른 답이다. 인간에 대한 홍상수의 태도는 변함없지만, 눈매가 서글해졌다고나 할까. 외면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한데 어울리고 싶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