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많은 부분은 당신에게 내린 저주와의 거래, 당신에게 주어진 별로 좋지 않은 카드와의 거래다. 그 저주는 당신을 괴물로 만들거나 좋은 방식으로 길들이거나 혹은 받아들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지난 8월30일 뇌종양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웨스 크레이븐이 한 말이다. 크레이븐은 어린 시절부터 호러광이었던 여러 감독들과는 달리 근본주의적 종교관을 지닌 침례교도로 성장했다. 크레이븐은 시카고 근교에 있는 위튼 칼리지에서 영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했다. 이 학교는 크레이븐 재학 당시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학생들에게 영화 관람을 금지시켰을 정도로 종교색이 강한 학교다. 이것은 호러영화의 거장이 될 그에게 ‘별로 좋지 않은 카드’였을까. 어쨌든 크레이븐은 그 ‘저주’를 받아들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20대까지 청교도적으로 억압된 삶을 살았던 크레이븐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의 석사 학위와 클라크슨 칼리지에서의 연구 교수 과정을 거쳐 엉뚱하게도 B급 호러영화의 감독이 됐다.
공감의 공포, <나이트메어>
탈주 살인범들에게 인질로 잡혀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된 여성의 부모가 살인범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실행한다는 내용의 데뷔작 <왼편 마지막 집>은 생뚱맞게도 유럽 예술영화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처녀의 샘>을 대략 각색한 영화다. 여기엔 크레이븐의 영화적 뿌리라는 사연이 담겨 있다. 크레이븐이 처음으로 접했던 영화들은 주로 유럽의 예술영화들이었다.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를 향한 그의 존경심은 잘 알려져 있다. 예술적 향취 가득한 원작을 ‘강간 후 복수물’의 원조로 뒤틀어낸 크레이븐의 충격적 방향 전환은 이 영화를 호러 클래식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유명한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1978)나 아예 <왼편 마지막 집>의 가짜 속편을 대놓고 표방한 이탈리아영화 <나이트 트레인 머더스>(1975) 등으로 대표되는 아류작을 생산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영화는 <13일의 금요일>로 이후에 유명해지는 숀 S. 커닝엄이 제작을 맡기도 했다. 1980년대를 상징하는 슬래셔 장르의 두 거목이 1970년대에 이미 합을 맞췄던 것이다. 어쨌든 웨스 크레이븐의 호러 장르에 대한 영향력은 그 시작부터 창대했다. 두 번째 작품 <공포의 휴가길>(1977)은 허셸 고든 루이스의 고전 <2000 매니악>과 스코틀랜드의 전설인 소니 빈 무리 이야기를 적당히 버무려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여행객들이 사막의 외딴곳에서 살인마 일가를 만나 살해당하는 내용을 지닌 이 영화는 롭 좀비의 연출 데뷔작 <살인마 가족>(2003)이나 <데드 캠프>(2003)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고 2006년에는 <힐즈 아이즈>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첫 작품과 두 번째 작품에서 이미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장르적 법칙을 파고든 셈이다. 웨스 크레이븐은 그때부터 예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숀 S. 커닝엄이 <13일의 금요일> 시리즈로 1980년대식 슬래셔 장르의 전형을 마련한 직후, 웨스 크레이븐은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나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의 레더페이스도 도달하지 못했던 길로 자신이 창조한 살인마를 보냈다. 제이슨 부히즈가 소년 소녀들을 난도질한 이후로 슬래셔 장르는 더이상 갈 곳을 잃은 듯 보였으나, 크레이븐의 <나이트메어>는 살인마와 피해자들을 모두 몽환의 세계로 이끌어 장르 자체를 구원하기에 이르렀다. 해마다 핼러윈에 개봉하는 신체 절단물들을 이제 더이상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1980년대의 젊은 관객은 고유한 장르적 특성을 자신들의 생활 속에 녹여낸 <나이트메어>에 공감했다. 바로 그 ‘공감’이라는 단어는 해당 영화의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수단이었다. ‘절대로 잠들지 말라’는 주인공 낸시의 대사는 관객이 관람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불을 끄고 잠들기 직전에야 비로소 거대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 대사가 자신들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웨스 크레이븐은 <나이트메어>의 성공으로 뉴라인 시네마라는 거대한 브랜드를 부흥시켰지만 거기 머물진 않았다. 시리즈화되던 <나이트메어>를 떠나 그의 방랑이 시작됐다. VTC라는 변방 영화사에서 70만달러짜리 <공포의 휴가길2>(1984)를 연출하며 저예산영화로 돌아왔다. 그 후 크레이븐은 꾸준히 호러의 서브 장르를 탐구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물을 구현했던 <컴퓨터 인간>(1986)을 지나 <악령의 관>(1988)을 통해서는 부두교와 오컬트의 세계를 탐구했다. 전기화된 악령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영혼의 목걸이>(1989)는 물론 어린이의 공포를 활용한 <공포의 계단>(1991)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호러의 경향을 바꾼 <스크림>
웨스 크레이븐은 거의 해마다 작품을 양산해왔지만 이번엔 3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한 끝에 자신의 프랜차이즈 <나이트메어>로 돌아왔다. 1994년에 발표한 <나이트메어7: 뉴 나이트메어>는 자신이 탄생시킨 후 방치하다시피했던 시리즈의 혁신이었다. 이 영화는 ‘나이트메어’라는 전설을 창조한 이들이 겪는 공포, 일종의 ‘메타 호러’였다. 하지만 이 야심찬 실험은 <나이트메어> 시리즈 중 가장 적은 매출을 올리며 대중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연이어 발표한 <브루클린의 뱀파이어>마저 실패하며 크레이븐의 시대는 저무는 듯했다. 그러나 역전 만루 홈런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스크림> 시리즈다.
수많은 슬래셔영화의 살인마 가면들이 핼러윈 코스튬 이외에 어떤 가치도 지니지 못할 무렵, 케빈 윌리엄슨의 데뷔 시나리오는 지금까지 할리우드의 난도질 영화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법칙을 집대성해 뒤틀었다. 웨스 크레이븐은 <나이트메어>에 이어 다시 한번 호러의 경향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스크림> 시리즈가 등장한 이후 할리우드는 물론, 호러의 변두리였던 한국에서도 <찍히면 죽는다> <해변으로 가다> 등 ‘한국형 <스크림>’을 표방한 영화들이 양산됐다. <스크림>(1996) 1편은 한국에 ‘스포일러’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유행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PC통신망에서 수입도 되지 않은 이 영화의 반전을 누설하는 일들이 벌어졌고, 그런 행위를 비난하는 반작용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스크림> 시리즈 이후 웨스 크레이븐은 1999년, 호러를 벗어나 음악영화 <뮤직 오브 하트>를 연출하기도 했고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 <나이트 플라이트>(2005)로 5년 만에 감독 의자에 다시 앉기도 했다. 3D 호러 <마이 소울 투 테이크>(2010)를 거쳐 2011년 다시 한번 <스크림 4G>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때, 크레이븐은 우리 나이로 73살이었다. <스크림> 시리즈는 귀환을 한 셈이지만 크레이븐은 언제나 필드에 있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웨스 크레이븐은 자신의 말처럼,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좋지 않은 카드’라는 저주를 받아들여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 인물이다. 고색창연한 장르를 재료로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냈고, 자신이 만든 괴물을 꿈속에서 현실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떠나며 심상치 않은 유산도 남겼다. 바로 M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시리즈 버전의 <스크림>이다. 첫 시즌의 마지막 방송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9월1일 방송됐다. 크레이븐이 제작을 맡았던 이 TV시리즈는 이미 시즌2의 제작이 확정돼 있다. 아마도 2016년, 크레이븐의 1주기에는 수많은 호러 팬들이 <스크림> 시즌2의 파이널편을 함께 보며 공포의 제왕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