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제임스 에이지(James Agee)라는 이름이 생소하다면 이런 설명이 강렬할 것 같다. 미국 문단의 제임스 딘.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미남이었고, 반항적 성향이었던 데다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떴다는 점에서, 미국의 문화비평가 드와이트 맥도널드는 자신의 친구였던 에이지를 ‘문단의 제임스 딘’(Literary James Dean)이라 칭했다. 에이지는 미국의 저널리즘 글쓰기와 영화 비평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다. 국내에는 그의 책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최근 그의 자전적 소설이자 유작인 <가족의 죽음>(A Death in the Family)이 출판됐다. 조금은 어쩌면 많이도 뒤늦은 만남이다(1961년 <만장>(輓章)이란 제목으로 <가족의 죽음>이 출간된 적 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디지털로만 열람 가능하다). 그의 대표작으로 얘기되는 르포르타주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Let Us Now Praise Famous Men)와 그의 아름다운 영화 비평들은 아직 원서로만 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제임스 에이지가 미국 문화계에 끼친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는 시인이며 소설가였고, 저널리스트였으며 각본가였다. 그의 특별함은 다재다능함에 있지 않다. 모든 분야에서 탁월했다는 데 그의 진가가 있다. 에이지는 1909년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에서 태어났다. 여섯살 때 아버지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데, 이 일은 그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다. 소설 <가족의 죽음>은 바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기억 복원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금욕적 성공회 교단이 운영하는 기숙학교 세인트 앤드루스쿨과 명문 사립학교 필립 엑세터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뒤 1928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한다. 하버드대학의 문예지 <하버드 애드버킷>의 회장까지 맡았던 에이지는 졸업 후 경제지 <포천>에 글을 기고한다. 1934년에는 그의 첫 번째 시집 <나에게 항해를 허락하라>(Permit Me Voyage)가 세상에 나왔고, 1936년엔 <포천>의 의뢰를 받아 다큐멘터리 사진가 워커 에반스와 함께 앨라배마주 밀즈힐을 6주간 여행하며 소작농 가족의 생활상을 담은 르포 작업에 착수한다. 그즈음 에이지는 <포천>의 이름난 기자였지만, <포천>은 에이지의 원고가 잡지의 성향과 맞지 않다는 판단에 게재를 거부한다. <포천>이 걷어찬 글과 사진은 바로 에이지와 에반스의 역작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가 되어 1939년 세상에 나온다.
저널리스트 제임스 에이지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는 첫 페이지부터 주석도 없이 워커 에반스의 흑백 사진들을 불쑥 제시한다. 백인 소작농의 건조한 얼굴, 흙과 바람과 가난과 씨름하며 생긴 주름, 때묻고 해어진 옷, 나무판자로 만든 생활공간, 그 구석구석이 담긴 사진들이 목차와 서문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이 사진들은 앞으로 전개될 에이지의 글에 대한 강력한 예고편이자 본편이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고, 1936년은 뉴딜정책으로 경제의 빨간불을 끄려던 루스벨트가 재선에 도전하려던 때였다. “앨라배마 전체에 불이 꺼져 있다. 모든 잎사귀가 흠뻑 젖고 거미줄은 무거워졌다. 길이 있으나 아무도 그 길을 사용하지 않고, 밭이 있으나 아무도 그 밭에서 일하지 않는다. 사람도 짐승도. 쟁기 손잡이는 젖어 있고, 레일과 철차(轍叉)와 침목 사이의 잡초들. 저 멀리 다른 철로를 달리는 기차의 황급함과 목쉰 슬픔조차 들리지 않는다. 작은 마을과 군청 소재지들. 침침한 불빛이 비추는 무거운 나뭇잎들 사이로 정교하게 톱질된 하얀 집들.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흐릿한 광물성 불빛에 감싸인 채 너무도 새침하고 공허하게 무방비 상태로 별빛을 받으며 서 있어서 백인 지주를 조롱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의 이같은 묘사를 두고,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받은 로버트 콜스는 <하버드 문학 강의: 문학의 사회적 성찰>에 이렇게 쓴다.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를 읽고 있으면, 에이지가 마치 오페라 속에서 길고 열정적인 오라토리오를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무대에 선 그리스와 로마 시인들의 수사적 표현이 가득한 긴 담화를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책에 사용된 언어에 주목하자. 그것은 남부 시골 출신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풍부하고 매력적이고 복잡한 언어이다.” 에이지는 숨막히게 시적인 문장들로 미국의 현실을 관찰하고 고발했다. 에이지의 언어는 결코 무르지 않았다. 그는 책임자(이를테면 대통령)의 책임을 강경하게 묻는 저널리스트였다.
흥미롭게도, 경작지를 잃고 농장 노동자가 된 가족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린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도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와 같은 해인 1939년에 출판됐다. 존 포드가 이후 영화로도 만든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출판되자마자 반향을 일으켰지만 에이지의 책은 당시 겨우 1천부만 팔렸다. 그러나 그가 앨라배마주에 머물렀던 때로부터 30년 뒤인 1960년대,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는 복간되면서 의식 있는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된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들의 참정권 획득을 위해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평화 행진을 이끌었던 1965년,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의 가방 속에도 <이제 훌륭한 사람들을 찬양하자>가 필수 지참서처럼 들어 있었다고 한다. 술과 우울증을 달고 살았지만 가난에 허덕이진 않았던 에이지가 불운한 작가의 대표주자가 된 것은 이처럼 생전에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한 탓이 크다.
영화평론가 제임스 에이지 ‘코미디의 위대한 시대’
1940년대의 제임스 에이지는 영화 비평에 더 집중한다. 1941년부터 1948년까지, <타임>과 <네이션>에 수많은 영화 리뷰와 칼럼을 썼다. 에이지의 영화 비평은 ‘영화광의 영화 비평’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에이지는 어려서부터 영화를 사랑했다. 영화를 일회성의 오락으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 사람들은 영화 비평을 전문성이 크게 요구되는 일로 인식하지 않았다. 영화를 예술로 옹호하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시인 위스턴 휴 오든은 “뛰어난 위트와 절묘한 묘사”가 결합된 에이지의 글쓰기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노라 고백한 바 있는데, 통찰과 위트가 넘실대는 에이지의 영화 비평은 이후 미국의 영화 비평을 이끄는 걸출한 이름들인 매니 파버, 앤드루 새리스, 폴린 카엘, 로저 에버트, 리처드 시켈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1949년 <라이프>에 실린 ‘코미디의 위대한 시대’(Comedy’s Greatest Era)는 제임스 에이지가 어째서 미국의 위대한 영화평론가인지 알게 해주는 사료이며, 무성영화 시대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해럴드 로이드, 해리 랭던을 향한 에이지의 뜨거운 헌사다. 이 글은 유성영화가 스크린에서 무성영화를 밀어낸 지 20년이 지났을 즈음 발표된다. 위대한 희극배우 버스터 키튼의 커리어조차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에이지는 버스터 키튼을 “가장 깊이 침묵한 무성의 무성 코미디언”이라 했다). 저널리즘적 규명과 시적 절찬 사이를 오가는 글이라 평가받는 ‘코미디의 위대한 시대’에서 에이지는 웃음을 네 가지로 분류하며 코미디의 작동 원리와 반응 원리를 분석하기도 한다. “(웃음에는) 킥킥거림(the titter), 슬픈 웃음(the yowl), 껄껄댐(the bellylaugh), 폭소(the boffo)가 있다. 킥킥은 그냥 킥킥이다. 슬픈 웃음은 킥킥거림이 사라진 웃음이다. 기뻐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껄껄대는 게 뭔지 알 테다. 폭소는 죽여주는 웃음이다. 이상적으로 좋은 개그, 완벽하게 만들어진 개그는 (웃음의) 희생자를 정확히 각도를 재서 세운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세운다. 그런 다음 사다리를 흔든다. 그만하라는 신음 소리를 낼 때까지 사다리를 휘두른다. 그러다 짧게나마 회복의 시간을 만난 희생자는 짓궂은 간지럼을 태운 코미디언의 채찍질을 한번 더 느끼고 싶어진다. 새로운 사다리 위에서.” 코미디가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된 장르인지, 코미디 배우들이 얼마나 영리한 존재인지 에이지는 일찍이 꿰뚫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과의 관계도 ‘코미디의 위대한 시대’를 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에이지와 채플린은 1940년대 중반부터 돈독한 우정을 유지해왔다. 현실화되지는 못했지만 에이지는 채플린을 위해 <트램프의 신세계>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채플린의 <살인광 시대>(1947)가 대중과 평단 양쪽에서 차가운 외면을 당했을 때에도 에이지는 이 영화가 왜 걸작인지 장면별로 길고 상세한 분석글을 써 <네이션>에 실었다. 채플린이 자본주의를 냉소하고 전쟁 영웅을 조롱했다는 주장이 나오자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기 원치 않았던 다수의 평자들은 함구했다. 하지만 에이지는 용감하게 채플린을 옹호했던 것이다.
소설가 제임스 에이지 <가족의 죽음>
존 휴스턴의 <아프리카의 여왕>(1951), 찰스 로턴의 <사냥꾼의 밤>(1955)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사이, 에이지는 <가족의 죽음> 집필 작업에 꾸준히 매달렸다. <가족의 죽음>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함께 보러 가는 루퍼스(제임스 에이지의 가운데 이름)와 아버지 제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제 힘으로 중산층 가정을 일군 강인하고 따뜻했던 아버지가 포드를 몰고 이른 새벽 집을 나선다. 위독하다는 할아버지를 뵈러 집을 떠난 아버지는 그러나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자동차 사고로 이제 루퍼스는 “반쪽짜리 고아”가 된다. <가족의 죽음>은 신앙심이 남달랐던 어머니, 루퍼스와 루퍼스보다 두살 어린 여동생 그리고 외가 식구들이 비극 앞에서 취하는 태도와 심리를 공들여 묘사한다. “루퍼스는 계속 아빠를, 아빠의 고요를, 아빠의 힘을, 아빠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았다. (…) 사람이 저렇게 오래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다는 게 이상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빠가 다시는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미동도 하지 않는 아빠가 이상하지 않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 이렇게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다정함을 지니면서도 그 핵심은 본질적으로 나머지 모든 것에 이질적이었고, 조각처럼 누워 있는 아빠 외의 아무것도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루퍼스는, 부끄럽지만, 고귀한 그 손을 만지고 싶었다.” <가족의 죽음>에는 인물들이 이별의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여러 번, 길게 등장한다. 에이지는 그럴 때마다 인물들이 여한 없이 이별의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도록 길게 이별 장면을 묘사한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아는 독자는 이 인사를 제대로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제임스 에이지의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가족의 죽음>이 품은 애상과 우울엔 그래서 온기가 감돈다.
제임스 에이지는 <가족의 죽음>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1955년 5월16일, 주치의를 만나러 가는 길에 뉴욕의 택시 안에서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예고 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사후 2년 뒤, <가족의 죽음>은 완고를 앞둔 미완의 원고인 채로 출판됐고,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게 된다. 제임스 에이지는 홀연 떠났지만, 사람들은 이제 위대한 작가를 오래도록 찬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