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사도>가 텍스트로 온전하게 전달되기를”
2015-09-24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이준익 감독 인터뷰

-사도세자 이야기를 풀되 영조, 사도, 정조 삼대의 이야기로 영화화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가 궁금하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 처음에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조철현 작가가 묻더라. ‘정조가 영화, 문화, 학계에서 재론될 때마다 사도는 늘 정조를 이야기하기 위한 대상으로서만 말해왔다. 온전히 사도를 주체로 그린 적이 있었나.’ 그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인간은 개인의 내면만이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증명돼야 한다. 아버지 영조로 인해 생긴 원인과 결과,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사도와 영조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설명해보고 싶었다. 헤겔의 변증법적 정반합(正反合)을 적용시키려는 의지도 있었다. 영조로부터 시작됐으니 그가 정, 그 반작용인 사도가 반, 정조가 합이다. 영조가 업을 쌓았으니 사도가 덕을 베풀고 정조가 그 복을 받는 거다.

-사도를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건 왜인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는 인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해뒀다. 그런데 내러티브의 세계라는 건 객관적인 정보와 사료를 놓고 여러 관점 중 하나를 선택해 대중적인 드라마로 만드는 일이다. 주체적인 사도의 모습을 통해 현대적인 드라마투르기를 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도이기 때문에 시작했다기보다는 영화적 내러티브에 접근해보려는 방법론적 시도로써 사도의 이야기를 가져왔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상처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그 상처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말해온 <소원> 바로 다음 작품이 <사도>라는 점도 짚고 싶다.

=사실 <사도>의 토대가 된 게 <소원>이다. <소원>은 나의 ‘은퇴 망동’ 사건 이후의 작품이다. (웃음) 밤에 자려고 이불 덮고 누우면 낯이 벌게질 정도로 내 오만함, 치졸함, 옹졸함에 대해 반성하게 됐다. 그런 시간을 통해 개선의 가능성을 알게 됐고 그때 <소원>을 찍었다. 조금이라도 더 진실한 태도로 작품에 접근했다. 이전의 내게는 없던 태도인데 그런 마음이 <사도>로 이어지길 바란 것 같다. <사도>도 그렇지만 <소원>도 소원(이레)이 사고를 당했다는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나머지는 다 사연이다. 이때 영화를 끌고가는 건 퍼스펙티브(perspective)의 이동이고. 소원에게서 아빠 동훈(설경구)의 관점으로 갔다가 다시 소원으로, 마지막에는 코코몽 인형 탈을 쓴 아빠에게로 관점이 이동한다. 이 구조를 <사도>에서는 보다 복합적으로 구성해봤다.

-복합적 구성 즉, 뒤주에 갇힌 사도를 현재 시점에 두고 과거의 영조와 사도, 그 주변 인물들로 플래시백하는 방법을 취했다.

=일단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8일을 각각 8개의 시퀀스로 만들었다. 또 매 시퀀스 안에 과거 이야기로의 플래시백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한 과거, 현재의 이동으로서의 플래시백이 아니라 관점과 시점이 움직이는 퍼스펙티브의 이동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비동시성의 동시성’(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개념이다. 서로 다른 시대에 존재했을 사회적 요소들이 동시대에 공존한다는 의미다)이 보이리라 기대했다.

-관점과 이야기의 시제가 계속해서 바뀐다는 건 관객에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좇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주기도 한다.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관객은 사도의 감정으로 달려가고 싶을 테니까. 그럼에도 관객에게 커다란 혼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건 이 영화가 사도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는 단 하나의 사건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영조와 사도의 갈등을 그릴 때 당쟁이라는 거대한 콘텍스트(context)를 극의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부자간의 인정투쟁에 보다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무엇에 더 치중한 이야기이다, 어떤 내용은 있는데 어떤 내용은 없다, 라는 식의 구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영조가 뒤주에 사도를 가둔 것을 포함한 그의 선택은 당쟁에 기댄 바가 클 것이다. 시나리오에는 노론과 소론간의 갈등뿐 아니라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해야 한다는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와 관련된 내용도 있다. 상업적으로 불리하다고 해서 그 부분을 뺐는데 그게 제일 아깝다. 만인소 때문에 이 영화를 찍었는데. 하하. 상업영화를 만든다는 것의 현실이라 불만스럽지는 않다. 다만 아쉽다는 얘기다. 그래도 마지막에 혜경궁이 장성한 아들 정조와 함께 사도의 무덤 앞에 가서 “이 여편네를 용서하소서. 환갑이 되어서야 허연 머리를 이고 지아비 앞에 왔사옵니다. 이 떳떳한 아드님을 보소서”라고 말하잖나. 이 말 속에 사도에 대한 혜경궁의 죄책감이 깃들어 있다. 또 비극을 정화해서 승화시키려는 혜경궁의 의지까지도 반영된 셈이다.

-“저는 더이상 임금 노릇 못합니다”와 같은 영조의 대사에서는 멀지 않은 과거의 현실 정치에 대한 기시감마저 든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유사성이 보일 수밖에 없다. 영화적 의도와 현실 정치의 의도가 같을 수 있을까. 해석하기 나름이다. 다만 정황상 역사는 반복이라 말하겠다. 권력의 속성은 민주국가나 왕권제나 크게 다르지 않다. 신분제하에서의 왕도 나는 역할론의 입장에서 보니까. <사도>가 (현재의 정치적) 콘텍스트에 지배받게 되는 건 싫다. 텍스트로 온전하게 전달되길 바란다.

-“연기 대통령”이라고 칭한 바 있는 송강호가 영조 역을 맡았다. 처음 같이 작업을 해본 것인데 그 현장이 어땠을지 무척 궁금하다.

=감독의 상찬이 필요 없는 배우다. 특히 사도가 뒤주에 갇힌 지 일곱쨋날에 영조와 사도가 대화를 주고받는 환상 신이 있다. 거의 9분에 가까운 롱 신이다. 그 신 초반에는 송강호가 입으로 대사를 치고, 중간에는 말을 하지 않고 내레이션으로 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대사를 친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송강호가 흔들림 없이 그걸 다 해내더라. 사도세자의 죽음이라는 너무 뻔한 이야기에 새로움을 부여하고자 한 내게 이 장면이 승부처였다. 그가 가진 감정의 칠정이 한꺼번에 다 드러나는데 보는 내가 다 경이로웠다.

-사도 역의 유아인을 두고는 “야수적 본능이 탁월하다”고 말했다.

=본성과 현재의 자신에 충실한 배우다. 즉자적으로 자신의 내면과 소통할 줄도 안다. 특히 사도가 활궁터에서 어린 정조와 함께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그게 이들 부자가 단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유일한 신이다. 내가 불안해서 사도의 행동 하나하나를 배우 앞에서 시연해 보였다. 그런데 유아인이 현장에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걸 해내더라. 지금 봐도 그 장면, 정말 좋다.

-테이크를 몇번씩 가지 않고 웬만해서는 첫 테이크에 오케이를 내는 걸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빠르게 현장 진행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첫 촬영부터 원 테이크 오케이다. (웃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에 진실이 있다고 본다. 첫 테이크만큼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연기가 나온다. 배우가 연기 준비를 한다는 건 의식의 영역이다. 의식 안에서 상상하고 연습하고 그걸 또 의식화하고. 하지만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그 순간은 매직 타임이다. 의식했던 모든 것이 무의식과 만나며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연기에 몰입하는 거다. 배우의 의식이 무의식보다 더 커졌을 때 관객은 그걸 알아챈다. 그래서 첫 테이크가 좋다. “컷, 오케이!” 사이에 마를 두지 않는다.

-기술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사도>에서 가장 오래 찍은 장면은 무엇인가.

=마지막에 영조가 뒤주에 있는 사도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여덟 테이크를 갔다. 송강호는 첫 테이크가 좋다고 했는데 되레 내가 불안해서 더 갔다. 근데 결국 송강호가 옳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 둥둥거리는 북소리와 경 읽는 소리가 극의 분위기를 단박에 고조시킨다. 이후에도 이 음악은 배경음악처럼 사도세자를 따라붙는다.

=옥추경, 망자해원경, 부모은중경, 조상경이라는 경들이 섞여 있다. 박수무당이 북을 치며 부르는 건 도교의 옥추경이다. 귀신의 뼈를 녹일 정도로 강력한 염불이다. 또 계곡에서 기생이 부른 곡은 <회심곡>이다. 그리고 작가들이 시나리오 쓸 때부터 자주 들었던 건 피아솔라의 <오블리비언>. ‘망각’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비극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건 결국 망각하기 때문 아닌가. 그걸 써볼까 했는데 너무 비싸서 못 샀다. 대신 생황과 첼로 등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해서 마지막 정조의 춤사위 장면에 넣었다. 그 곡을 녹음하러 송강호와 함께 체코 프라하에 갔는데, 영상 위로 입혀진 음악을 들으니 눈물이 주르륵 나더라. 송강호도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그만큼 극에 깊이 몰입했던 거다.

-평소에도 역사물로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그 애정은 어디에서 오는 건가.

=서양 제국의 역사에 비해 우리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에 대한 나의 아쉬움과 화가 있다. 씨네월드 시절 해외로 영화 수입하러 많이 다닌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그것 때문에 빚도 많이 졌고. 그때 알았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적 스토리에 대해서 정말 모른다는 걸. 당연하다. 보여준 게 없잖나.

-촬영을 끝내고 12월 개봉을 목표로 하는 <동주>도 일제강점기의 실존 인물 윤동주가 주인공이다.

=윤동주의 시, 그의 삶과 죽음은 모두 한국인의 공동의 자산이다. 그런 분을 어쭙잖은 일개 감독이 영화화한다는 건 아주 오만한 행동이다. 하지만 현재의 내가 부끄럽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 그려보려 한다. 그게 나의 의지다.

-다음 작품도 시대물이라고 들었다.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다. 최석환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동주> 끝나고 해주겠다. 그보다 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도 있으니 그때 얘기하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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