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낯선 이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아방가르드영화를 논하는 데 있어 켄 제이콥스의 존재는 역사 그 자체라 해도 좋을 만큼 거대하다. 60년대 언더그라운드영화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켄 제이콥스는 이후 영화 매체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형태의 퍼포먼스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시지각에 깃든 환영성을 바탕으로 관객의 체험영역을 확장해나가는 그의 작업은 매체의 경계는 물론 우리의 감각까지 넘나들며 보는 이들을 매혹한다. 어느새 여든이 훌쩍 넘은 그가 대표적인 퍼포먼스 중 하나인 <신경환등기>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켄 제이콥스의 발자취를 다시 정리해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좀더 정교하고 명확한 언어로 그의 작업을 표현하고자 켄 제이콥스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김지훈 중앙대학교 교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영화미디어학자로서 확장영화와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활동을 이어온 김지훈 교수는 마침 준비 중인 책에서도 켄 제이콥스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글은 전문가의 깊고 정교한 분석을 좀더 쉬운 버전으로 풀어낸 짧은 가이드다. 비언어적인 것을 언어로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읽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켄 제이콥스의 공연처럼 말이다.
지난 10월30일 문래예술공장 2층 박스시어터에서는 기이한 공연이 펼쳐졌다. 무한한 어둠 속, 곧 깜빡이는 불빛과 함께 무정형의 형상이 화면에 영사되기 시작했다. 형상은 일정 간격을 두고 변모하면서 지상과 천상,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여러 현상들을 환기시켰다. 행성의 분화구, 은하계의 성단, 생명체의 세포, 덤불로 가려진 지형, 태풍의 눈, 파도와 닮았으면서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이미지들이었다. 그 이미지들은 오직 공연장 그 안에, 영사기들의 불빛이 깜빡이는 동안에만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었다.
이 이미지들의 환영적인 힘은 단지 그것들이 추상과 형상을 넘나들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깜빡이는 불빛 사이로 솟아나는 그 이미지들은 관람자의 눈에 잡힐 듯 생생히 다가오면서도 관람자의 시선을 화면 안으로 끌어당겼다. 돌출과 몰입, 바로 3차원 입체영상에서의 미적 경험이다. 깜빡이는 불빛은 여기서 또 다른 역설을 불러일으킨다. 깜빡임과 더불어 관람자는 이 3차원의 체험이 본래 2차원적인 이미지에서 발생하는 환영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 깜빡임은 다채롭게 변모하는 이미지에 유령적인 생생함을 불어넣기도 한다. 2차원과 3차원 모두를 환기시키면서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미지의 경험, 영화 이미지의 환영적 본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매혹을 마술적으로 강화하는 독특한 영사 시스템의 역량. 이 두 신기한 역설들의 드라마를 펼친 공연의 주인공은 미국 아방가르드영화의 흐름들을 주도하면서 반세기 동안 영화의 본성을 탐구해온 올해 83살의 감독 켄 제이콥스였다.
뉴욕 언더그라운드에서 습득영상으로
193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제이콥스는 뉴욕현대미술관의 시네마데크와 시네마16(Cinema16: 아모스 보겔이 뉴욕에 설립하여 1947년부터 63년까지 운영되었던 영화클럽)에서 1920년대 프랑스 아방가르드영화, 네오리얼리즘영화 등을 섭렵하며 스크린의 세계에 입문했다. 영화제작으로 뛰어들기 전 제이콥스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한스 호프만의 지도로 회화를 공부했다. 호프만은 자연에서 지각되는 3차원적 깊이감과 운동감을 회화의 2차원적 평면에 구현하는 ‘밀고 당기기’(Push and Pull: 회화의 표면에 입체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기법을 말함)의 방법론을 고안했는데, 이는 제이콥스의 영화와 영사 퍼포먼스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1955년 단편 <오차드 거리>(Orchard Street)를 제작하며 영화에 입문한 제이콥스는 주류영화의 이미지와 내러티브는 물론 당대의 성적, 문화적 위계에도 도전하는 기이하고도 불온한 작품들을 제작함으로써 60년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번성에 기여했다. 이 시기를 함께한 제이콥스의 친구들은 퀴어 실험영화 감독이자 배우인 밥 플라이슈너, 그리고 복장도착과 마약, 드랙 쇼 등을 생생하게 묘사한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문제작 <불타는 피조물들>(Flaming Creatures, 1963)의 감독인 잭 스미스였다. 요나스 메카스가 <영화일지>에서 “보들레르적 영화의 걸작”이라 일컬은 <황금빛 코브라>(Blonde Cobra, 1959∼63)는 플라이슈너가 촬영한 퀴어 하위문화에 대한 미완성 필름과 스미스가 녹음한 사운드를 재편집한 작품이다. 극단적 클로즈업과 불안정한 카메라 앵글, 이미지 없이 사운드만이 흐르는 무지 화면의 과감한 활용으로 관습적인 영화의 시각 체계를 전복한다. 애덤스 시트니가 <시각영화>에서 “부정성과 실패의 미학”으로 평가했던 제이콥스의 언더그라운드 영화작업은 <소멸하는 별빛> (Star Spangled to Death, 1956∼60, 2001∼2004)에서 서사시적인 정점에 도달한다. 스미스와 그 친구들의 성적 퍼포먼스와 기이한 즉흥적 행동들을 촬영한 필름을 뉴스릴, 교육영화, 광고영화 등 다양한 값싼 프린트들과 콜라주한 이 작품은 기술적 완성도를 거부하고 일상의 버려진 잔여들을 재활용하는 아방가르드영화의 한 경향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동시에 당시에 출현하기 시작한 해프닝(Happening) 예술마저도 포용한 대작이다. 주류의 가치들을 거부하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하위문화 주체들의 생생한 모습은 미국의 이상을 조롱하는 정치적 논평이기도 했다.
아방가르드영화의 역사에서 제이콥스의 이름을 뚜렷이 새긴 대표작은 습득영상(found footage) 영화제작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는 <톰, 톰, 피리꾼의 아들>(Tom, Tom, the Piper’s Son, 1969∼71)이다. 습득영상 영화제작이란 카메라로 새롭게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영상을 취하여 여러 특수효과들로 조작하거나 이를 다른 영상과 연결시켜 그 영상 자체를 탐구하는 실천을 말한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1905년 빌리 비처가 제작한 10분 길이의 동명의 영화 필름을 여러 가지 기법들로 탐색한다. 고정 카메라로 촬영된 7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원작 영화는 부산한 시장 거리에서 일어나는 소매치기 소동에 대한 코미디로, 초기 영화의 특성상 클로즈업과 같은 카메라 위치 변화가 없기 때문에 다양한 디테일들이 프레임 안에 충만하다. 제이콥스는 표준적인 영화상영에서는 관객이 이 많은 디테일들을 식별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고, 반투명 스크린을 설치하여 원래 영화의 필름을 영사하고 이를 다양한 크기로 촬영하는 재촬영(rephotographing) 기법을 적용했다. 또한 영사를 감속시키거나 일시정지시켜 원래 영화의 디테일들을 시간적으로 연장하고 공간적으로 확대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 결과 관객은 원래 영화를 구성했으나 표준적인 영화상영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던 풍부한 디테일들을 보게 된다. 인물들의 표정과 제스처는 그 디테일들의 일부일 뿐이다. 여기에는 또한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는 영화의 지표적 본성(제이콥스는 원래 영화에 기록된 디테일들에 대해 “오래전에 죽은 자들의 생생한 행위들에 대한 영화적 기록, 유령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영화를 이루는 물질적 구성요소인 필름 표면의 질감, 그리고 움직이는 이미지로서의 영화를 형성하지만 표준적인 영사기법에서는 은폐되는 필름스트립(즉 영화의 운동은 무수히 많은 정지사진들의 기계적 재생에서 비롯된다는 점)이 있다. 이 모든 디테일들은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이 습득된 영상에 대한 분석에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분석은 습득영상 영화제작을 이끄는 한 축에 불과하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서 관객은 10분간의 영상이 다채롭게 반복되면서 120분으로 연장되는 상황을 목격한다. 제이콥스는 습득영상 영화제작을 뒷받침하는 바로 이 분석과 해체-재창조의 팽팽한 균형을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서 성취한다.
신경시스템/신경환등기
1960년대 중반부터 제이콥스는 극장 기반의 영화 바깥으로 영화적 실험과 탐구의 영토를 확장했다. 1965년 “유령극장”(Apparition Theater)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그의 영사 퍼포먼스는 영화의 이 전 역사를 이루는 그림자놀이(shadow play)에 대한 실험을 거쳐 자신이 고안한 영사방식인 ‘신경시스템’(Nervous System: 2000년대 이후에는 ‘신경환등기’(Nervous Magic Lantern)라는 이름으로 불린다)으로 귀결되었다. 이번 문래예술공장 공연에도 적용된 신경시스템(신경환등기)의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두대의 영사기가 있다. 각각의 영사기는 필름을 프레임 단위로 보여주거나 개별 프레임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다. 제이콥스는 이 영사기에 두개의 같은 프린트를 걸지만 영사속도를 미세하게 서로 엇나가게 조정한다. 아울러 영사기 사이에 특별히 제작된 셔터를 끼워놓고 두개의 프레임을 서로 분리시키거나 이들을 다양한 지속시간으로 중첩시킨다(따라서 단 두개의 프레임이 영사시간에 따라 무한히 연장될 수 있는데 이에 착안하여 제이콥스는 ‘영원주의’(eternalism)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영사장치는 두개의 프레임을 빠른 속도로 교체하면서 깜빡임 효과, 그리고 흡사하지만 서로 다른 두개의 인상이 관람자의 눈에 겹쳐 보이는 잔상 효과를 만든다. 바로 이 잔상 효과에서 3차원의 입체감, 즉 화면상의 형상이 관람자의 눈을 향해 돌출하거나 관람자의 시각이 그 형상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느끼게 된다.
제이콥스는 자신이 개발한 이 신경시스템 퍼포먼스에 대해 파라시네마(paracinema)라는 이름을 붙였다. 파라시네마란 표준적인 영화장치와 일치하지 않는 재료와 기법들을 활용해서 영화 이미지와 영화적 경험을 창조하는 대안적인 영화적 실천을 가리킨다. 파라시네마 실천은 표준적인 영화와 나란히 놓이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가장 중요한 점(그리고 제이콥스 스스로가 여러 번 강조한 점)은 신경환등기 영사 시스템에는 표준적인 단채널 영상을 구성하는 매체인 필름 릴이나 비디오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필름 프린트를 정사진이나 그림 프린트, 심지어 무정형적인 형상이 그려진 플라스틱 판으로 대체해도 깜빡이는 3차원의 환영을 생산하고 변주할 수 있다. 표준적인 영화 이미지가 카메라에 기록된 ‘과거’ 현실의 흔적으로 규정되고 그 흔적이 필름스트립에 기록되는 ‘지속’적인 것이라면, 신경환등기 퍼포먼스의 이미지는 오직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그 ‘현재’에 ‘일회적’으로만 존재한다(즉 영사기가 멈추면 이 이미지는 사라진다). 표준적인 영화 상영에서 영사기의 작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된다면, 신경환등기 퍼포먼스의 영사방식은 제이콥스의 셔터 조작에 따라 영사 시간 동안 즉흥적으로 바뀔 수 있다. 이 모든 차이들을 드러내고 영화를 회화 및 퍼포먼스와 혼합시킴으로써, 파라시네마는 표준적인 영화를 초과하고 영화의 경계를 넓히는 일종의 확장영화(expanded cinema)가 된다.
그러나 파라시네마가 영화 바깥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제이콥스는 신경시스템을 통해 영화 바깥에서 영화 이미지와 영화매체, 영화적 경험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제이콥스는 자신의 퍼포먼 스들에서 초기 영화의 필름 프린트들을 원재료로 종종 취했는데, 이는 초기 영화에 기록된 과거의 흔적들을 공연장의 생생한 환영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경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2차원과 3차원의 역설적 공존은 바로 영화적 경험의 본성인 운동과 깊이의 환영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서 영화학자 조너선 월리의 견해를 따른다면, 파라시네마는 필름의 물질성으로 영화매체를 규정했던 아방가르드영화의 주요 전제로부터 벗어나면서도 여전히 영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영화적 실천이다.
디지털 제이콥스, 그리고 무한과 역설의 영화
1999년 이후 제이콥스는 자신이 오랫동안 발전시킨 기법과 관심사를 디지털 편집의 영역으로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그가 디지털로 만든 작품들은 무려 50편 이상에 이르고, 그 장르 또한 자신이 필름으로 제작했던 모든 장르들인 습득영상 영화, 일기영화를 포괄한다. 그는 디지털 기술을 포용함으로써 필름 기반 작업들과 신경시스템 퍼포먼스를 계승하는 동시에 갱신해 왔다.
<범죄 현장으로의 귀환>(Return of the Scene of the Crime, 2008)과 <아나글리프 톰>(Anaglyph Tom: Tom with Puffy Cheeks, 2008)에서 제이콥스는 자신이 필름 기반으로 적용했던 기법들인 정지, 감속, 확대는 물론 디지털 편집 소프트웨어로 만들어진 다양한 그래픽 효과들(분할화면, 화면중첩, 크로마키 등)을 적용하여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원작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의 디테일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동시에 그 디테일들을 다채로운 회화적 형상으로 변형시킨다. 분석과 해체-재창조라는 습득영상 영화제작의 두축이 필름을 벗어나 디지털의 세계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초기 영화를 넘어서 영화의 발명을 이끈 기술적, 사회문화적 기원들에 대한 제이콥스의 관심 또한 디지털 편집의 영역으로 연장되었다. 2007년 제작된 <자본주의: 노예제>(Capitalism: Slavery)와 <자본주의: 아동노동>(Capitalism: Child Labor)에서 제이콥스는 자신이 신경시스템 퍼포먼스를 통해 정립한 영원주의 기법을 편집소프트웨어의 언어로 번역하고 이를 19세기의 입체사진을 탐구하는 데 활용했다. <자본주의: 아동노동>은 산업혁명 시기의 한 공장에서 행해진 아동노동의 현장을 포착한 입체사진을 복제하여 깜빡임 효과를 발생시키고 3차원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초과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무기력한 표정과 앙상한 신체가 유령적인 생생함과 압도적인 깊이감으로 재생된다. 발터 베냐민이 “보들레르의 몇 가지 경험에 대하여”에서 제시했던 통찰, 즉 공장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산업사회의 기계적 충격의 경험이 영화 이미지에서는 수용의 조건이 된다는 통찰이 관람자의 경험으로 육화된다.
1989년의 인터뷰에서 제이콥스는 자신의 감속 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그것은 감속이라기보다는 확장, 시간의 확대다. 어떤 것도 실제로 감속되지 않았다. 두개의 프레임 안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있다. 나는 그 프레임들에 의해 한정된 시간을 결코 소진하지 않았다.” 제이콥스는 극장과 극장 바깥의 퍼포먼스를 왕복하고,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면서도 영화 이미지와 영화적 경험에 대한 자신의 탐구를 결코 소진하지 않았다. 그는 한편의 영화는 물론 그 영화를 이루는 두개의 프레임들 사이에 영화적 실험과 탐구의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입증해왔다. 영화와 파라시네마를 넘나드는 그의 작업들은 영화의 형태와 영화매체의 경계를 넓히면서도 필름 프레임들 사이의 공간에 있는 풍부한 역설들을 경험하게끔 한다. 2차원과 3차원, 정지와 운동, 평면과 깊이, 형상과 추상의 역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