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디지털은 이미 하나의 언어다”
2015-11-19
인터뷰 : 김지훈 (중앙대학교 교수)
정리 : 송경원
사진 : 백종헌
켄 제이콥스 인터뷰

켄 제이콥스가 10월28일부터 30일까지 열린 국제 사운드아트 워크숍 문래레조넌스 2015에서 마련한 공연과 강연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미국 실험영화의 역사라 불리는 거장이자 동시대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아방가르드 영화작가인 그를 만날 드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적지 않은 그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직접 만나본 그는 권위 있는 대가가 아니라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았다. 오랜 반려자이자 예술세계의 동지 플로 제이콥스와 나란히 걷는 그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내 두눈에 현기와 활력 어린 광채가 맴돌기 시작했다. 숱한 평론가와 이론가들이 수십번 분석하고 이야기한 내용일지 모르지만,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남다르다. 켄 제이콥스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중앙대학교 공연영상창작학부 김지훈 교수가 인터뷰어를 맡아 그가 지향해온 가치와 작품의 의미를 전한다.

-<신경환등기> 퍼포먼스는 처음이지만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인 걸로 알고 있다. 지금 다시 바라본 한국은 어떤 모습인가.

=매우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방금도 나가서 거리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왔다. 80년대 이후 서울은 많은 변화를 겪은 도시다. 높은 건물이 들어섰고 스카이라인이 화려해졌다. 그러나 내 관심사는 도시 전체의 빌딩 전경이 아니다. 그것은 정돈되어 있지만 종종 무덤처럼 느껴진다. 반면 시장은 혼란스러워도 역동적이고 아름답다. 그곳에는 삶이 담겨 있는 움직임이 있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에서 선보인 디테일들, 그 역동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1960년대 후반 뉴욕에서의 <유령극장> 이후 <신경체계> <신경환등기>에 이르기까지 표준적인 필름이나 비디오를 활용하지 않은 프로젝션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관객이 당신의 퍼포먼스에서 어떤 경험을 하기 바라나.

=<신경환등기> 퍼포먼스는 영화적 형식과 형상들에 대한 실험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표준적인 영화에 활용되는 필름은 물론 비디오마저 활용하지 않는 형태의 공연을 한다는 거다. 오직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하여 관객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적 현실이 공연의 핵심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공연장에 있다는 것도 퍼포먼스의 일부인 셈이다. 잭 스미스와 함께했던 연극적인 것들과 즉흥적 해프닝에 대한 경험, 관람자를 직접적으로 자극했던 1960년대 영화적 작업들 또한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필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표현 방식이 필요했다. 중요한 건 관습적인 필름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시각적인 경험을 구현하는 것이다. 필름이냐, 디지털이냐 하는 문제와는 다르다. 이 퍼포먼스는 디지털 영화제작이 구현할 수 없는 시청각적 경험을 담고 있다.

-한스 호프만에게서 회화를 공부하다가 영화를 시작했고 잭슨 폴록의 중요성도 언급한 적이 있다. 왜 영화를 만들게 되었으며, 회화의 어떤 측면을 영화로 연장시키고자 했는가.

=한스 호프만에게서 평면성과 깊이와의 관계에 대한 것들을 배웠다. 그에 따르면 회화는 평면적이지만 깊이를 재현하고자 할 때 둘 사이에 공간적 모순이 발생한다. 말하자면 나는 한스 호프만에게 평면적인 표현이지만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시각적 현상의 중요성을 배웠다. 큐비즘과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도 이러한 현상에 대한 탐구를 발견할 수 있다. 내 영화 작업과 퍼포먼스들은 그런 관심의 연장선에 있다.

-최근까지 당신은 3D에 대해 여러 실험을 진행했다. <아바타>(2009)의 성공 이후 영화산업이 진행해온 3D영화로의 이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단 나도 <아바타> 같은 영화들을 좋아한다. 다만 내 작업과는 방향이 다르다. 영화는 실제 같은 환영을 준다. 2차원적인 매체지만 그 안에서 3차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표준적인 3D영화들은 기술적인 방식으로 3D효과를 구현하지만 내 관심사는 거기에 있지 않다. 나는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한 변화들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말하자면 육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 영화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을 때만 체험할 수 있는 실재의 환영들 말이다. 사실 3D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시지각 활동에 비춰볼 때 오히려 2차원이 낯선 것이다. 2차원적인 표현, 표면에서 그 안에 들어 있는 3차원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흥분되는 경험이다.

-당신은 50년 이상 아방가르드영화의 다양한 흐름들 속에서 작업해왔다. 처음에는 잭 스미스와 더불어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이끌었고, <톰, 톰, 피리꾼의 아들>은 습득영상영화의 대표작이자 70년대 비평가들이 구조영화의 모범적 사례로 언급된다. 자신의 비표준적인 필름 퍼포먼스를 ‘파라시네마’(paracinema)라는 용어로 지칭한 바 있는데, 스스로 이 다양한 영화적 실천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여러 번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내 작업이 구조영화로 분류되는 것을 강하게 거부해왔다. 그러나 파라시네마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파라시네마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영화장치와 병렬적으로 놓인 실천이다. 하지만 표준적인 영화장치를 전형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작하거나 그것 바깥의 다른 재료와 기법들을 활용한 영화적 탐구이자 실험이다. 가령 영화를 그림자놀이라고 본다면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놀이로 돌아갈 수도 있다. 원시시대 동굴에서 시작됐던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그림자와 빛을 활용해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한 친구는 파라시네마가 표준적인 의학치료와 대안치료의 관계와 유사한지 물어본 적이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 표준영화와 나란히 등가적으로 존재하는 영화적 형식들이다.

-<톰, 톰, 피리꾼의 아들>과 그 리메이크 작품들은 초기 영화는 물론 영화의 기원을 형성하는 19세기 입체사진을 일종의 미디어 고고학적 입장에서 탐구한다.

=60년대 후반 세인트 존스 대학과 뉴욕 빙햄튼 주립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면서 초기 영화를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관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초기 영화들은 여러 형태로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가령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4)은 관객의 의사와 관계없이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는 이후 히틀러의 나치즘에도 영향을 줬다. 같은 맥락에서 내 작업도 초기 영화는 물론이고 다양한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할리우드 대중영화임에도 예술로 다가온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들,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탐욕>(1924),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1920년대 유럽 아방가르드영화 등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신경환등기> 퍼포먼스를 위해 존 존, J. G. 털웰, 아키 온다 등 여러 현대 음악가들과 작업해왔다.

=음악가마다 각자의 색깔이 있다. 그들의 참여로 공연의 색깔이 바뀌고 개성이 살아난다. 음악이 지닌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그들과의 작업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공통점을 찾는다면 나는 즉흥성이 강한 음악과 사운드를 선호한다.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이행이 실험영화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필름 순수주의자가 아니다. 필름과 디지털 사이에 지울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건 분명하지만 필름의 가능성은 제한될지언정 소진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디지털의 가능성 또한 제한이 없다. 디지털은 이미 하나의 언어이며, 거기엔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정신과 가능성이 있다.

켄 제이콥스 감독과 플로 제이콥스 여사

켄 제이콥스 감독은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자연스럽게 부인에게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생활은 물론 작업을 할 때도 늘 함께였다는 켄 제이콥스의 설명을 굳이 보태지 않더라도 충분했다. 서로 마주보는 한장의 사진에 두 사람이 함께해온 세월이 녹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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