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친애하는 캣니스 에버딘에게 바칩니다
2015-12-01
글 : 송경원
<헝거게임> 시리즈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

캣니스 에버딘은 집으로 돌아갔다. 2012년 환호와 우려 속에 첫발을 디뎠던 <헝거게임>은 일상으로 돌아간 캣니스의 모습을 마침표로 선택했다.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헝거게임>은 “그래서 소녀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고 말하는 동화가 아니다. 혁명의 완수와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캣니스가 살아갈 세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건 지난 4년간 <헝거게임>에 매번 놀라고 열광해온 팬들의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은 끝나고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더이상 <헝거게임>이 없는 세계가 앞으로 우리에게 뭘 보여줄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제껏 4편의 영화에서 캣니스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며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헝거게임>에 대한 기대는 대부분 원작 소설로부터 출발했다. <해리 포터>와 <트와일라잇> 등 인기 프랜차이즈가 막 끝난 지점에서 출발한 <헝거게임>의 과제는 ‘새로운 시리즈를 안착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당연히 앞선 프랜차이즈 방식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었고 2300만부 이상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답게 원작 팬들의 기대치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결과는 알다시피 성공적이다. 단지 22억달러에 달하는 수익 때문만은 아니다. <헝거게임>은 영어덜트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이 원작에 기대지 않고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지를 증명한 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운신의 폭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이 지점에서 <헝거게임>은 매번 거짓말처럼 관객과 평단의 기대를 배신했다. 정확히는 매번 예상치 못한 지점으로 향하며 기대를 뛰어넘어왔다.

<헝거게임>은 흥미진진하다. 한치 앞을 알 수 없어 관객을 흥분시킨다는 점에서 영화 자체가 ‘헝거게임’을 닮았다. 영화는 원작의 핵심 정서인 삼각관계와 로맨스를 덜어내고 대신 소녀의 시점에서 바라본 시스템의 부조리와 혁명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리얼리티 쇼가 자아내는 끔찍한 현실 사이의 괴리감 등에 주목했다. 덕분에 “책과 영화는 각각 독립적인 작품이며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완성했다”는 원작자 수잔 콜린스의 말처럼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예측하지 못할 스토리”로 세계를 확장해나갔다. 재창조라 불러도 좋을 이러한 각색의 중심에는 혁명의 아이콘, 불타는 소녀, 모킹제이 캣니스 에버딘, 그러니까 제니퍼 로렌스가 서 있다.

원작을 뛰어넘은 시리즈물 서바이벌의 승리자

<헝거게임: 더 파이널>(이하 <더 파이널>)은 13구역의 혁명군이 판엠으로 공격해 들어가면서 출발한다. 전작에서 스노우(도널드 서덜런드)에게 세뇌당해 망가진 피타(조시 허처슨)를 보며 캣니스는 스노우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불태운다. 혁명군은 캐피톨로 진군해 들어가고 캣니스는 게일(리암 헴스워스), 피닉(샘 클라플린) 등과 함께 스타부대로 투입된다. 하지만 캣니스의 진짜 목적은 스노우을 직접 암살하는 일이다. 캐피톨에는 혁명군의 진입을 막는 각종 살인함정들이 도사리고 있고 캣니스 일행은 최후의 헝거게임을 하듯 함정을 돌파해 대통령궁으로 향한다.

사실 ‘헝거게임’은 예전에 이미 끝났다. 전 시리즈에 걸쳐 온전한 헝거게임이 등장한 것은 게리 로스 감독의 1편이 유일하다. 2편에서는 우승자들을 대상으로 한 스페셜 게임이 열렸고 결국엔 헝거게임 자체가 무너졌다. 3편에서는 당연히 헝거게임 자체가 이뤄질 수 없고 영화는 이를 수도 캐피톨의 수비를 뚫고 들어가는 저항군을 통해 우회해서 표현했다. <헝거게임> 시리즈는 게리 로스 감독의 1편과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의 2, 3, 4편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1편은 단독으로 완결된 서사다. 할 수만 있었으면 ‘헝거게임’이란 구조 안에서 매년 반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해리 포터>처럼 말이다. 게리 로스 감독은 이를 위한 기반을 제법 잘 닦아놓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 이야기가 3부작 소설로 끝난 이야기임을 알고 있다. 2009년 라이언스 게이트가 애초에 4부작으로 시리즈를 구성한 것은 이러한 다른 색깔을 위한 복안으로 보인다. 1편이 ‘헝거게임’이라는 기발한 소재와 세계관이 주체가 된 완결형 서사였다면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의 <헝거게임> 2, 3, 4편은 <반지의 제왕>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된 서사다.

판엠의 혁명서사와 소녀의 투쟁을 절묘하게 결합한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의 <헝거게임>은 훨씬 어둡고 무겁고 진지하다. 애초에 <헝거게임>은 이질적인 것들을 뒤섞으며 오는 쾌감을 적극 활용하는 영화다. 빈부로 나뉜 각 계층의 공간 묘사나 기이한 패션이 대표적인 경우다. 고대로마 검투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리얼리티 전쟁쇼 안에서 벌어지는 첨단과 원시의 충돌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의 뒤섞임은 시리즈 후반으로 갈수록 혁명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분명한 하나의 서사로 귀결된다. 시리즈 후반부의 무게감은 리얼리티 쇼가 독재와 혁명의 대결구도라는 현실로 넘어오는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이러한 선택은 “개성 넘치는 이야기가 평범한 혁명담으로 전락했다”, “지나치게 진지하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더 파이널>까지 여정을 마친 지금에 와서 다시 보건대 <헝거게임>의 깊이는 앞으로 다른 영어덜트 소설 원작이 시도하기 힘든 지점까지 도달했다. “진짜 적이 누구인가”, “목적을 위해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등 철학적 명제를 던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헝거게임>이 남긴 질문은 어디까지나 프랜차이즈의 균형과 통제하에 있다. 그보다는 모두가 매혹된 혁명의 상징, 캣니스(라고 쓰고 제니퍼 로렌스라고 읽는)의 존재가 이 시리즈를 유일하게 만든다.

영원한 모킹제이를 위하여

원작 소설은 캣니스 에버딘의 일인칭으로 진행된다. 그녀가 보고 듣고 겪는 것 이외의 사건에 대해 독자는 알 길이 없다. 영화 <헝거게임>은 이 지점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했다. 세계와 소녀의 반응에서 확장하여 잔혹한 리얼리티 쇼의 제작 이면까지 ‘보여’준다.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소년소녀들을 스크린 저편에서 통제하는 미디어의 이중성, 이제는 전설로 기억될 게임마스터 플루타르크(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비범한 계획들, 대중과 미디어의 정치적 관계, 나아가 혁명의 그림자와 어두운 면까지, 짐짓 거대한 서사 속으로 관객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어림짐작으로 상상해야 했던 세계를 직접적인 이미지로 보여줬을 때의 충격, 헝거게임을 관람하는 판엠의 대중이 느낄 쾌감을 관객 역시 함께 느낀다. 혁명과 미디어라는 거대 서사와 캣니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가 따로 또 같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순간,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행위임을 목격한다.

재미있는 건 로맨스 기반의 소설에서 출발해 예상보다 훨씬 심도 있는 지점까지 이야기를 파내려간 영화가 최종적으로 도달한 곳이 다시 캣니스라는 소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리얼리티 쇼가 전하는 공포와 무감각도, 미디어 전쟁의 양상도, 혁명조차도 최종장에 이르면 결국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헝거게임>은 세계와 내가 관계 맺는 방식을 이미지로 보여줬고, 개인의 힘이 세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증명한 이후, 다시금 그것이 얼마나 개인적인 문제인지를 환기시킨다. 극단적으로 말해 <헝거게임>의 장대한 이야기의 동력은 캣니스라는 소녀의 일차원적인 반응의 결과물이다. 동생을 대신해 게임에 참가하고, 호감을 느낀 (정확히 민폐 여주인공의 위치에 있는) 소년 피타를 보호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 밟으면 꿈틀하고,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며, 때론 공포에 복종하지만 소중한 것을 위협당하면 저항한다. 대의나 변명에 얽매이지 않는 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을 자유의지라 불러도 좋겠다. 그렇게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가 그녀를 모킹제이로 만들었고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

거대한 흐름의 선봉에 선 순간에도 캣니스는 게임의 룰에 휩쓸리는 일 없이 여전히 단독자로 서 있다. <더 파이널>에 이르면 그녀의 활약과 관계없이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캣니스가 스노우를 죽이려는 것은 어쩌면 사적 복수에 가깝다. 그리고, 이 사적 복수는 앞서 여러 번 그러했듯 끝내 놀라운 형태로 완성된다. 한바탕 꿈같은 게임이 끝나고 캣니스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긴 여정 끝에 소중한 것을 잃었고, 또 다른 소중한 것을 얻었다. 어쩌면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1편에서 악몽에 시달리던 동생 프림에게 해줄 말은 생겼을 것이다. 좋은 기억을 지켜내며 나쁜 기억을 극복하는 캣니스의 모습에서 여전사를 넘어선 인간의 얼굴을 본다. 해피 <헝거게임>! 이 정도로 영리한 시리즈를 다시 만날, 확률의 신이 우리 편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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