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욕망-사랑-불안으로 세운 고딕 로맨스의 미학
2015-12-16
글 : 송경원
놓치기에는 아쉬운 기예르모 델 토로의 <크림슨 피크>

빈말로도 좋은 결과라 하긴 어렵다. 5500만달러의 예산이 들어간 <크림슨 피크>는 11월29일까지 전세계 박스오피스 7500만달러 남짓한 수익을 기록했다. 평단의 반응도 대체로 미지근한데 스토리에 대해선 결말이 일찍부터 예상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등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나마 칭찬이 이어지는 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미술적인 성취에 관한 것들이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늘 지적받던 한계, 이를테면 비주얼에 경도되어 내러티브를 등한시한다는 푸념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이 영화 앞에 쉽사리 실패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일 수는 없다. 날카롭게 삐져나온 송곳처럼 델 토로는 항상 익숙함과 식상함을 비틀어 새로운 시점을 제공한다. 조금 늦게 도착했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과 두 배우의 긴 인터뷰를 계기 삼아 델 토로가 꿈꿨던 지점에 대해 다시 돌아보려 한다. <크림슨 피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 이 매혹적인 고딕 로맨스가 남기는 것들은 무엇일까.

고딕 로맨스는 19세기 신비주의에 대한 낭만이 싹트면서 피어난 장르다. 당시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동경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로맨스 소설과 결합하며 초현실적인 사건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 유행한 것이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고딕 로맨스는 오늘날 공포, 엽기, 괴기소설의 전신이라 부를 만하다. 이제는 개별 장르로 분화된 특성들이 고딕 로맨스라는 고색창연한 용광로 안에 원초적인 형태로 녹아 있다. <크림슨 피크>는 바로 이러한 고딕 로맨스의 복원을 꿈꾸는 영화다. 영화에서 고딕 로맨스가 성행한 건 60년대경인데, “진정으로 훌륭한 고딕 로맨스가 나온 지 50년쯤 됐을 것”이라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지적처럼 그의 관심은 대개 장르를 가로질러 과거에 맺혀 있다. 다만 그는 과거를 재현한 박물관을 지으려는 건 아니다. 델 토로의 방식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가져와 자신의 세계 안에서 비틀어 내는 재단장에 가깝다. 말하자면 <크림슨 피크>는 이제껏 델 토로의 영화가 그러했듯 익숙한 것을 낯설게 포장하는 영화다.

<크림슨 피크>는 호러가 아닌 로맨스의 기둥 아래 세워진 성이다. 그로테스크한 디자인과 약간의 호러장치는 이 영화의 기둥이 아니라 기둥에 새겨진 정교한 장식이다. 이디스 쿠싱(미아 바시코프스카)의 말처럼 “이건 유령 이야기가 아니라 유령이 나오는 이야기”인 셈이다. 문제는 유령이 나오는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 일견 식상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크림슨 피크>에 대한 관객의 미지근한 반응은 대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준남작 토마스(톰 히들스턴)와 그의 누이 루실(제시카 채스테인)의 관계는 영화 중반이면 이미 짐작 가능하고, 크림슨 피크 저택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라고 해봐야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호러적인 요소는 흥미를 돋우는 양념일 뿐 주목해야 할 건 세 남녀의 놀랍도록 끈적거리고 맹목적이며 질척이는 감정이다. <크림슨 피크>는 지독한 집착에 관한 이야기다. 욕망, 사랑, 불안 무엇으로 불리건 영화는 집착이 형태로 남아 붙들고 있는 것들을 형성화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때론 유령이 깃든 저택으로, 때로는 캐릭터의 광기로 나타난다. 하지만 델 토로 역시 이제는 자극적이지도 않을 닳고 닳은 내러티브를 통해 이를 복원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자신이 가장 잘하고 자신 있어 하는 분야, 바로 살아 있는 건물(장르)의 복원이다.

<크림슨 피크>의 주인공은 인물들이 아니라 고딕 로맨스라는 장르 그 자체, 혹은 무너져가는 대저택이다. 이야기를 둘러싼 공기, 빅토리아 시대의 클래식한 정서는 고색창연한 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미 완성된다. 사방이 뚫려 있는 건물처럼 이 영화는 사건과 사연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다. 중반 이후부턴 완전히 드러내놓고 있지만 열린 공간 안에서 이디스는, 그리고 우리는 그저 압도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흔한 호러의 쇼크 대신 건물(정서)의 심연 속에 인물을 진득하게 가라앉혀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저택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과 같아 그 안에 삼켜진 이디스(와 관객)는 숨죽인 채 주변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건물 밖 채굴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는 건물의 심장 소리마냥 공간 전체를 울려 우리의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한다. 루실이 독을 먹일 때 잔을 스푼으로 긁는 소리 역시 흥분과 악의를 물리적으로 형상화한 진동과 다름없다.

크림슨 피크의 오래된 저택 안에서 우리가 알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감정과 사건들은 마치 눈앞에 보이는 유령처럼 실체를 띤다. 영화는 그렇게 말하고 설명하는 대신 집착이라는 정서를 절절히 느끼도록 유도한다.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가, 사건이, 반전이 굳이 자극적일 필요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크림슨 피크> 속 숱한 장르 클리셰가 클리셰에 갇히지 않고 비틀린 즐거움을 선사하는 비결이다. 혹시 주변의 미지근한 관객의 반응 탓에 <크림슨 피크>에서 선보인 델 토로의 야심찬 시도가 절반의 성공처럼 보인다면 이 영화를 찬찬히 다시 보길 권한다. 걸작이라 상찬하려는 게 아니다. 현대적인 감각으로 관객과 소통하기엔 한끗이 모자랐을 수도 있다. 다만 그저 건물에, 장르에, 정서에 생명을 부여하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마법을 한번쯤 편견 없이 감상해봤으면 한다. 다행히 기예르모 델 토로의 손끝은 아직 미지에 대한 경외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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