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고전적인 유령 이야기를 사랑한다. 자신이 “멕시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자주하는 델 토로 감독은 가족과 친구, 이웃들의 ‘유령 목격담’을 듣고 자랐다고 밝혔다. 할리우드 고전 장르영화들을 답습하며 성장한 그는 이제 새로운 세대의 영화팬들에게 ‘델 토로의 프리즘’으로 재조명한 ‘잊혀진 장르영화’를 소개한다. 근래 할리우드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고딕 로맨스’라는 장르에 대한 매력과 이를 스크린에 담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을 쓴 부분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크림슨 피크>를 고딕 로맨스 장르라고 불렀는데, 오랫동안 생각해온 작품인지.
=고딕 로맨스 장르라 하면 대부분 여자주인공이 약하고 순수하게 표현된다. 나는 정반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섹스도 즐길 줄 알면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그런 여자주인공 말이다. “스포일러 경고”를 포함시켜야 하겠지만, 대부분의 고딕 로맨스의 결말을 정반대로 표현하는 게 목적이었다. 여주인공은 아름다운 동시에 강해야 했다. 고딕 로맨스 요소의 일부를 비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루실(제시카 채스테인)의 대사 중 “너는 작은 나비와도 같아. 나는 나방이고”라는 말은 ‘나는 아름답지는 않지만 강해서 너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영화니까 그 작은 나비가 끝에는 나방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거다. (웃음) 스타일 있게.
-친숙한 장르가 아닌데 흥행 여부에 대해 우려하는 이들이 없었나.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나 <악마의 등뼈> <퍼시픽 림>처럼 자주 다뤄지지 않는 장르에 관심이 많은데, 고딕 로맨스 역시 30~40년가량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은 장르다. 아마 진정으로 훌륭한 고딕 로맨스가 나온 지는 50년쯤 됐을 거다. 한정된 요소가 많은 장르다. 호러팬들에게는 폭력적인 성향이 부족하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나 <유브 갓 메일>을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는 너무 어두울 테니까. 사랑과 죽음의 믹스. 고딕 로맨스의 에센스는 사랑이 고통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이 얼마나 괴물처럼 잔인할 수 있냐는 거다.
-일부 장면이나 대사는 고전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물론이다. <제인 에어>의 대사를 한 장면에서 사용했고, <샤이닝>과 <체인질링> 등 많은 영화와 소설, 그림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딕 로맨스 작품을 쓴 소설가 중에는 헨리 제임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랑의 어두운 면에 매료된 것처럼 보인다.
=<헬보이>를 만들든 <크림슨 피크>를 만들든 간에 나의 생각은 한결같다. 진정한 사랑이란, 나의 가장 괴물적인 근성을 보여준 후에도 받아들여질 때다. 일부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저지른 범인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괴물이라고 단정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괴물도 이틀 전에는 슈퍼마켓에서 빵과 우유를 샀을 거다. 나는 그 ‘괴물’들의 많은 것들을 알고 싶다.
-극중 저택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개인적으로 저택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나.
=모든 것들? (웃음) 진짜로 그 저택에서 살고 싶어졌다. (웃음) 구매할 수 있다면 정말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 저택이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한때 부유했던 사람들의 오만함이다. 디자인할 때 지붕까지의 높이를 4층 정도로 일부러 높게 했다. 그래야 지붕이 훼손됐어도 아주 부유한 집안이 아니라면 수선을 할 수 없으니까. 저택의 입구를 보면 부유함을 과시하는 듯한 필요 이상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하지만 들어가보면 그 실체를 알게 되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에 대한 나의 응답이라고나 할까. (폭소)
-이번 작품에서도 유령이 등장한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나.
=첫 장면은 어머니에 관련한 실화다. 어머니가 어릴 적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잠을 자다가 외할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고, 자주 사용하던 향수 냄새를 맡았다고 하셨다. 침대 끝에 앉은 것처럼 스프링 소리가 났고, 등쪽으로 외할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들려준 그 이야기가 계속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른 유령 이야기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쁜 어머니 유령을 자주 그리게 된다. 멕시코 사람이라 그런가? (웃음) 멕시코 사람에게 어머니란 잊을 수 없는 존재이니까. 토마스(톰 히들스턴)와 루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도 중요했다. 그래서 유령이 등장할 때 색깔 별로 유령의 존재를 표시했다.
-당신의 유령은 무언가 다르다.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릴 적 겪었던 일 때문에 무섭거나 슬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10살이 될 때까지 ‘무너지고’, 남은 생 동안 다시 무너진 것을 추스르며 산다고 생각한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도 그래서다. <퍼시픽 림> 같은 영화를 만들 때에도 그 작품의 근원은 빨간 구두를 들고 도쿄 거리를 헤매는 소녀였다. 자아는 10살이면 전부 형성된다고 본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독을 넘겨주고, 그 자식이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면 비극이 시작된다. 우리 모두가 1세대 동안만이라도 좋은 부모가 된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크림슨 피크>도 결국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일부 로맨스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결혼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결혼은 시작에 불과하다. (웃음) 그 후에 서로에 대해 좋지 않은 점들을 발견하게 되니까. 진정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할 때다.
-혹시 초저예산 호러영화를 연출할 생각이 있는지.
=얼마나 저예산인지가 관건이다. 나에 대한 어떤 것도 ‘작은 것’은 없으니까. (웃음) 내 바지 사이즈만 해도 말이다. (웃음) 늘 영화를 만들 때 최대한 적은 예산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나의 꿈은 <크림슨 피크>와 같이 옛 할리우드의 웅장함과 고풍스러움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총 22편의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하지만 내가 연출한 영화는 9편이다. 다른 말로 하면 13편을 아직 스크린에 올리지 못한 거다. 초창기부터 특수분장과 시나리오 작업에 중점을 두고 작업해왔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업의 50%는 연출을 하면서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촬영이나 세트 디자인, 특수효과,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다.
-<퍼시픽 림> 2편을 아직도 준비 중인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시나리오와 총예산안을 제출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다. 차기 연출작은 아니다. 차기작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매번 미리 공개할 때마다 잘못되더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