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보위가 세상을 떠났다. 화성인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가, 번개 얼굴을 한 알라딘 세인(Aladdin Sane)이, 삐쩍 마른 백인 공작(Thin White Duke)이 그와 함께 사라졌다. 대신 그는 우리에게 최후의 유작 《Blackstar》 를 남겼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별을 노래하던 사람이 별을 하나 남기고 별이 된 것”이다.
이 음반을 작업할 당시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음에 틀림없다. 《Blackstar》는 그래서 ‘죽음의 레코드’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그 기조가 어둡다. 마치 스펙트럼을 통과하는 빛들이 제각각의 길을 찾아나가듯 재즈, 아방가르드 팝, 록, 일렉트로니카 등의 장르가 혼재하며 분광을 거듭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생산적인 혼돈으로 충만한 카오스의 세계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도리어 유한한 생의 마지막을 자축하는, 그리하여 다음 생을 몽상하고 도모하는 ‘카오스모스’적인 레코드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곡을 포함해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지난 1월8일 자신의 69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발표한 《Blackstar》를 꼼꼼하게 다시 들어봤다. 이건 정말이지 불가해한 앨범이다. 수많은 음악들이 이월상품처럼 전시되는 납작한 규격화의 현실 속에서 거의 70이 다 된 ‘노인’이 이렇듯 실험적인 음악을 하다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는 후배들이 시도하는 새로운 음악에 언제나 활짝 열려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라디오헤드를 존경한다는 언급이나, 아케이드 파이어의 데뷔작을 직접 사서 주변에 나눠주고, 이후 그들의 곡 <Reflektor>에 백 보컬로 참여한 일화가 이를 증명한다.
타이틀곡 <Blackstar>가 대표적이다. 10분에 달하는 이 걸작을 위해 그는, 마치 라디오헤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전자음악, 재즈, 록, 프로그레시브 등의 온갖 장르를 갈퀴로 다 끌어모았다. 69살의 노인이 말이다. 더군다나 이 음악에는 인위적으로 기운 자국이라고는 없다. 테크닉에 결코 함몰되지 않고, 가외적인 요소라고는 없이, 무위의 기교로 소리를 자연스럽게 길어올린다. 요컨대, 언제나 그래왔듯, 수많은 장르를 껴안으면서도 저 스스로가 당당한 진경을 펼쳐내고 있는 음악이다.
모드와 로커를 아우르다
그 위대한 시작은 당연히도 1972년의 명반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였다. 기실 데이비드 보위는 이 음반 이전에 <Space Oddity> <Life on Mars> 등의 명곡들을 내놓아 주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은 대중의 인기를 획득하는 것 이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메이저 톰(Major Tom) 이상의, 대중을 단번에 매혹시킬 강렬한 캐릭터가 필요했다. 그는 뮤지션이자 예언자인 ‘지기 스타더스트’를 창조하고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여기에 더해 빨갛게 염색한 머리, 짙은 화장, 관능을 과장한 옷차림으로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다. “로큰롤의 유명세를 포장하는 방식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평론가 짐 밀러가 지적한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이걸 가리켜 ‘글램 록’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기 스타더스트를 주인공으로 삼은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의 음악은 특별할 게 없었다. 데이비드 보위하면 떠오르는 ‘혁신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도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연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데이비드 보위는 어떻게 슈퍼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드’와 ‘로커’가 양분하고 있던, 1960년대 영국 청년 하위문화의 지형도를 꺼내올 필요가 있다. 모더니스트의 약자인 ‘모드’와 로큰롤을 숭앙하는 ‘로커’는 1960년대 영국 청년 문화의 양대 등뼈였다. 전자의 깔끔한 이미지와 후자의 거친 남성본색은 양극단을 내달렸고, 당대의 영국 젊은이들이라면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당신은 모드입니까, 로커입니까?” 비틀스의 다큐멘터리영화 <하드 데이스 나이트>(1964)에서 등장하는 질문처럼 말이다.
1970년대가 되자 데이비드 보위는 바로 그 틈새를 노렸다. 아니, 둘 모두를 아우르려 했다고 평하는 게 더 적확할 것이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은 로커에 가까웠던 반면 그의 패션은 모드를 지향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필요했다. 전형적이면서도 빼어난 구성과 선율을 지닌 음악을 창조하는 와중에 적어도 패션에 있어서만큼은 ‘극단’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기성의 방식을 극단화함으로써 기성을 희롱하는 방식을 획득한 셈이었다. “이데올로기를 상품화했던 60년대의 가식과 허구를 찢어발겼다”고 대중음악 연구자 사이먼 프리스가 평한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음악적으로는 친숙하면서도 기이한 존재감을 내뿜는 지기 스타더스트를 향해 열광을 보내기 시작했다. “훌륭하지만 어쨌든 (립스틱을 좀 칠한) 로큰롤 앨범”이라는, 존 레넌의 부기가 이를 압축해서 설명해준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드와 로커’에 대한 질문이 영화 <벨벳 골드마인>(1998)에도 똑같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단 대답은 각기 다르다. 비틀스의 링고 스타가 “나는 모커(비웃는 사람)입니다”라며 재치 있게 자신들의 특별함을 강조한 반면, <벨벳 골드마인>에서는 청춘남녀의 대화 속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위치시킨다. “난 그 밖의 다른 여섯 가지를 한몸에 가지고 있어.” 여담이지만, 배우이자 래퍼인 린 마누엘 미란다가 그를 향한 추모의 글에 “다른 6명의 영웅이 세상을 떠난 것 같다”라고 쓴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그랬다. 1970년에 이미 세상을 팔아버린 이 남자 메이저 톰은 지기 스타더스트를 거쳐서도 알라딘 세인, 신 화이트 듀크, 고블린의 왕으로 분장하면서 끊임없이 변태를 시도했다. 이게 바로 데이비드 보위와 당대 글램 록 신을 양분한 티렉스의 리더 마크 볼란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평론가 밥 스탠리에 따르면, 마크 볼란은 스타답지 않게 매우 친절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아티스트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신비감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데이비드 보위는 달랐다. 그를 향한 헌사나 마찬가지인 <벨벳 골드마인>을 탐탁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언제나 거리두기를 원했다. 각각의 캐릭터는 이를테면 거리두기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그는 과거 <NME>와의 인터뷰에서 “지기 스타더스트의 전설로 영화를 만드는 게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영화를 망치고 싶지 않다”라는 대답을 남겼던 바 있다. 자신감 부족이 아닌 과한 해석과 노출을 경계하고 싶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가 대영제국 훈장을 끝내 거부하고 런던올림픽 축하공연 출연을 고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치밀하면서도 위대한 설계자
정점은 속칭 베를린 3부작이라고 불리는, 《Low》(1977), 《Heroes》(1977), 그리고 《Lodger》(1979)였다. 이때부터 데이비드 보위는 과거의 로큰롤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당대의 최신이라 할 전자음악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는 아예 영국을 벗어나 육지의 섬이라 불렸던 서베를린으로 거처마저 옮겨버렸다. 그러나 베를린 3부작의 전자음악적 실험은 이미 1975년의 <Young Americans>와 1976년의 <Station to Station>을 통해 이미 준비를 끝마쳤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필라델피아 솔로부터 영감을 수혈해 플라스틱 솔을 들려준 전자와 여기에 더해 독일에서 탄생한 전자음악 기반의 크라우트 록을 합친 후자는 베를린 3부작을 위한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가히 데이비드 보위 세계의 집대성이라 불러도 무방할 베를린 3부작은 데이비드 보위가 로큰롤이라는 과거의 족쇄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혁신을 거듭할 것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좌표였다. 그는 패션과 이미지뿐만이 아닌 음악에 있어서도 극단과 새로움을 추구했고, 자연스레 <Ziggy Stardust> 시절과 비교해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열광적인 팬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도리어 더 큰 환호와 비평적 찬사가 뒤를 따랐다.
나는 이게 철저히 그의 사운드적인 전략과 이미지적인 비전을 통해 일궈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Sound and Vision’이라는 그의 곡 제목처럼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데이비드 보위를 대중음악사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을까 확신하는 쪽에 가깝다. 그러니까, 그는 치밀하면서도 위대한 설계자였다. 지기 스타더스트와 익숙한 로큰롤 문법을 통해 자신을 추종하는 수많은 팬들을 양산한 그는 이후 이 팬층을 바탕으로 실험적인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대중적인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인터뷰에서도 직접 밝혔듯이 그것이 낯선 음악일지라도 대중이 반응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속된 용어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했으면서도 대중에게 갈채를 획득한 아티스트가 되었다”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Earthling》(1997)에서 당대의 트렌드인 드럼 앤드 베이스와 인더스트리얼을 소환하더니,《‘Hours…’》(1999)에서는 과거로 회귀해 “나이 먹은 사람의 젊은 시절”을 심플한 언어와 선율로 노래했다. 심지어 그는 아트 록적이었던 《The Next Day》(2013)를 통해 빌보드에서는 2위, 영국에서는 1위에 오르며 전성기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0년 끝물에 <NME>가 뮤지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현재의 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티스트로 데이비드 보위를 손꼽은 이유가 괜한 게 아닌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어디로 갈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루하진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I don’t know where I’m going from here, but I promise it won’t be boring.) 그가 공언한 그대로였다.
역사상 가장 빛나는 별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어. 단 하루만이라도.”(We can be Heroes, just for one day.) 데이비드 보위가 《Heroes》에서 노래한 위의 문장은 그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지루한 일상을 반복할 뿐인 대중을 향한 그의 격려인 동시에 자신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원불멸한 혁신이란 없음을. 도착하는 동시에 떠나야 하는 게 ‘팝’ 스타인 자신의 부박한 운명이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동시대적’으로 체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팝’이라는 단어가 지닌 부박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끊임없이 다른 영토를 찾아 헤맸던 이 자세야말로 그를 역사상 가장 빛나는 별로 이끈 힘이었던 것이다. 관습을 거스를 줄 아는 대담함을 바탕으로 하여 부박함을 근사함으로 전환했던 순간마다 그는 팝의 영웅이 될 수 있었고, 그 누구보다 멋진 음악들을 남긴 뒤에 이 세상과의 안녕을 고했다.
심지어 그는 최후의 그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Blackstar》의 마지막 곡인 <I Can’t Give Everything Away>에서 그는 “내가 모든 걸 다 줄 수는 없어”라고 노래하면서도 여기에 《Low》의 수록곡 <A New Career in a New Town>의 하모니카 연주를 집어넣었다. 자신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젊은 시절 <Space Oddity>에서 “지구는 푸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Planet Earth is blue and there’s nothing I can do)라며 슬퍼했던 그에게 시간이 선물해준 지혜의 옷이다.
부디 귀환하지 못한 메이저 톰에게 위로가 있기를. 정신분열로 괴로워하던 알라딘 세인에게 평화가 찾아오기를. 마약에 찌들어 있던 신(thin) 화이트 듀크에게 안식이 함께하기를. 이 모두였으며 동시에 모두가 아니었던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David Robert Jones)에게 평온이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