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보위라는 매혹적인 창조물을 눈 밝은 영화인들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외계인, 뱀파이어, 고블린, 과학자…. 40여년 동안 멈추지 않고 스크린 속에 자신의 개성 넘치는 페르소나를 아로새긴, ‘배우’ 데이비드 보위의 출연작 중 기억해야 할 여섯편을 모아 소개한다.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1976) The Man Who Fell to Earth
조너선 글레이저의 <언더 더 스킨>(2013)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 영화를 두고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여성 버전이라고들 했다. 가뭄에 시달리는 고향 행성에 물을 조달하기 위해 지구에 온 외계인의 일상과 혼란을 조명했던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는 데이비드 보위의 몽환적이고 이질적인 모습에 크게 빚지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높은 언덕에서 비틀비틀 걸어내려오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가눠야 할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남자, 지구명 ‘토마스 제롬 뉴튼’(데이비드 보위)은 지구의 수자원을 얻어 자신의 행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외계인이다. 토마스는 이계의 최첨단 기술을 이용해 금세 돈방석에 앉지만 TV와 술, 섹스 등 중독성 강한 지구적 요소에 탐닉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혼란에 빠진다. 데이비드 보위는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를 촬영하던 당시 심각한 코카인 중독에 빠졌으며, 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밝혔다. 그러니 열두대의 TV를 동시에 보며 “내 마음속에서 모두 꺼져! 날 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라고 외치던 외계인 토마스의 모습에 인생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던 록스타의 초상이 겹쳐 보이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 영화를 위해 보위가 작업했던 곡들은(최종적으로 영화에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의 걸작 음반으로 손꼽히는 《Low》에 수록되었으며, 보위는 토마스 캐릭터로부터 지기 스타더스트에 이은 그의 또 다른 페르소나, ‘신 화이트 듀크’를 창조해냈다. 《Low》와 보위의 또 다른 명반 《Station to Station》의 앨범 커버는 모두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스틸컷을 차용한 것이다.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1983) 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0년대는 ‘배우’ 데이비드 보위의 모습을 스크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뒤이어 소개할 토니 스콧의 장편 데뷔작 <악마의 키스>(1983)의 뱀파이어, 고블린 왕으로 잊지 못할 코스튬을 선보인 <라비린스>(1986) 이외에도 보위는 <철부지들의 꿈>(1986)의 광고회사 중역, 마틴 스코시즈의 논쟁적인 작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의 빌라도를 연기하며 배우로서의 다양한 가능성을 펼쳐 보였다. 그중에서도 오시마 나기사가 연출한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는 보위의 출연작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오시마 나기사는 데이비드 보위가 출연한 브로드웨이 연극 <엘리펀트 맨>을 본 뒤 그를 캐스팅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관리하던 연합군 포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보위는 뉴질랜드 출신의 연합군 소령 셀리어스를 연기한다.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살벌한 수용소에서 그는 두려워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유일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그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일본군 장교 요노이(일본 뮤지션 사카모토 류이치가 연기한다)와의 미묘한 관계는 이 영화를 본 관객의 다양한 해석을 낳기도 했다. 숙소를 검열하던 일본군 앞에서 꽃을 질겅질겅 씹어먹거나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고백하는 등 보위의 명연기를 볼 수 있는 수많은 장면이 있지만 압권은 따로 있다. 동료를 죽이려는 요노이에게 다가가 모든 포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볼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다. 짧지만 어떤 영화의 클라이맥스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 장면에 배우 데이비드 보위의 정수가 있다.
<악마의 키스>(1983) The Hunger
데이비드 보위가 1980년대에야 비로소 뱀파이어영화에 출연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남다르게 가늘고 긴 그의 육신과 핏기 없는 얼굴, 우아한 제스처는 뱀파이어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가 갖춰야 할 가장 필수적인 자질이다. 물이 부족한 행성 출신인 탓에 지구의 강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어느 장면만 하더라도 흰 목덜미 사이로 핏물이 떨어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으니까. 토니 스콧의 장편영화 데뷔작이기도 한 이 영화에서 데이비드 보위는 불멸의 뱀파이어 연인, 미리암(카트린 드뇌브)을 두고 빠르게 나이들어가는 뱀파이어 존 블레이록을 연기한다. 노년이 된 존의 목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보위는 매일 밤 조지 워싱턴 다리에 서서 그가 아는 모든 펑크록 노래를 소리질러 불렀다고 한다. 비록 <악마의 키스>에서 화제가 된 건 수잔 서랜던과 카트린 드뇌브의 정사 신이었지만, 미리 암에게 “당신은 영원할 거라고 내게 말했어.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고. 기억나?”라고 존이 외치는 장면은 보위를 떠나보낸 지금 더욱 서글프게 다가온다.
<라비린스>(1986) Labyrinth
<라비린스>의 고블린 왕, 자레스는 데이비드 보위의 페르소나 ‘지기 스타더스트’만큼이나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외모의 소유자다.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소녀의 외침에 응답해 나타난 자레스는 그녀의 동생을 자신의 성으로 데려가며 “13시간 안에 미로를 벗어나지 못하면, 네 동생을 영원히 고블린으로 만들어버리겠다”고 선언한다. 자레스 역에 스타 뮤지션을 캐스팅함으로써 영화에 뮤지컬리티까지 더하길 바랐던 짐 헨슨 감독은 스팅, 프린스, 믹 재거, 마이클 잭슨 등을 고려했고 최종적으로 낙점된 건 데이비드 보위였다. <라비린스>의 컨셉 디자이너 브라이언 프라우드는 자레스가 히스클리프(<폭풍의 언덕>)의 로맨틱함과 로체스터(<제인 에어>)의 음울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캐릭터이길 바랐다고 한다. 데이비드 보위 버전의 자레스는 프라우드의 바람에서 더 나아가 음험하고 섹시한 기운까지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캐릭터다. <라비린스>에서는 고블린들 사이를 휘청휘청 걸어다니며 <매직 댄스>를 부르거나 당대의 미소녀, 제니퍼 코넬리가 연기하는 새라의 환상 속에서 우아하게 춤을 추는 보위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언젠가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보위는 <매직 댄스>를 비롯해 이 영화를 위해 다섯곡을 작곡했다. 가족 관객을 겨냥한 판타지 어드벤처 영화임에도 열여섯 소녀에게 “거창한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단지 널 지배하게 해줘”라고 속삭이는 ‘마왕’ 보위의 모습은 지나치게 섹시하다.
<바스키아>(1996) Basquiat
배우로서의 데이비드 보위는 대개 자신의 실존하는 이미지를 영화 속 캐릭터에 영리하게 접목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바스키아>는 보위가 실존했던 다른 예술가를 성공적으로 구현해내는 데에도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작품이다. 미국 아티스트 장 미셸 바스키아의 삶을 조명하는 이 영화에서,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미국 아티스트의 실제 가발을 뒤집어쓰고 연기한다.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이 그다. 다짜고짜 10달러에 팔겠다며 자신의 그림을 들이미는 바스키아에게, 보위의 워홀은 예의 바르게, 하지만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5달러로 하죠. 별로 공들인 작품도 아닌 것 같은데.” 데이비드 보위라는 자아가 캐릭터를 비집고 나와 표출되는 순간이 존재하던 대개의 출연작들과 달리, <바스키아>는 보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는 보기 드문 영화다. 그건 동료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 대한 경외의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데이비드 보위는 70년대 미국을 유랑하며 앤디 워홀, 루 리드, 이기 팝 등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1971년 발표한 《Hunky Dory》 앨범에 <Andy Warhol)>이라는 곡을 수록하기도 했다. 보위는 늘 팝 아티스트로서 워홀이 이룬 거대한 성취의 비결을 알고 싶어 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뉴욕에서 처음 만났고, 그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는데 앤디 워홀이 데이비드 보위의 신발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며 두 사람의 친분도 시작되었다고.
<프레스티지>(2006) The Prestige
2000년대, 예순에 가까운 나이에도 데이비드 보위는 여전히 많은 감독들이 원하는 남자였다. <쥬랜더>(2001)에서 벤 스틸러와 오언 윌슨이 벌이는 ‘워킹’ 대결의 심판으로 나서 벤 스틸러의 바짓가랑이 사이에서 ‘불합격!’을 외치는 모습부터 애니메이션 <스폰지밥 네모바지>(2007)의 목소리 연기까지, 그는 장르와 캐릭터를 불문하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크리스토퍼 놀란의 <프레스티지>는 보위의 연륜과 선구자적 기질이 훌륭한 시너지 효과를 낸 작품이라 할 만하다.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을 계기로 서로 다른 길을 가게된 두 마술사의 경쟁을 조명한 이 영화에서, 보위는 기상천외한 마술의 핵심을 쥐고 있는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를 연기한다. 작은 역할이지만 이야기 전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 캐릭터에 보위 이외의 다른 대안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미 한번 배역을 거절한 보위를 설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보든(크리스천 베일)을 이기기 위해 누구도 보지 못한 마술을 구현하려 혈안이 된 엔지(휴 잭맨)와 니콜라 테슬라가 나누는 대화 장면만 보아도 왜 그토록 놀란이 보위를 원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세상에 불가능한 건 없소. 그 값을 치를 뿐이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 한 시대를 열어젖힌 이의 애환을, 데이비드 보위만큼이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