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양성평등과 다양성, 스웨덴영화에선 기본이지!
2016-03-02
글·사진 : 이화정
이화정 기자의 제39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 참관기… 스웨덴 영화산업의 현주소를 마주하다

“Foggy, Windy, Rainny, but you must pretend it’ s luxurious natural mist.” (안개 끼고, 바람 불고, 비가 와도 그냥 고급 천연 미스트라고 생각하자고!) 연일 찌푸린 겨울, 예테보리의 궂은 날씨를 잠재울 운율 맞춘 진행자의 발언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래, 이렇게 웃으며 이들 모두 스웨덴에서 가장 암울하다는 겨울의 끝, 2월을 보내고 있구나 싶었다. 스톡홀름에 이은 스웨덴 제2의 도시로 알려진 항구도시 예테보리에 도착하던 날, 공항에 픽업 나온 영화제 관계자는 “불과 얼마 전에 내린 20cm의 폭설에 비하면 다행”이라며 이곳의 짓궂은 날씨를 경고했다. 눈 대신 연일 비가 오는 날씨 덕분에 ‘천연 미스트’를 온몸에 맞은 초대 손님들이 2월6일 저녁 드래곤 어워드 시상식이 열린 스토아 극장에 모였다. 올해로 제39회째를 맞은 예테보리국제영화제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아우르는 최대의 영화제로 전세계 영화를 이곳에 불러오고, 노르딕(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영화를 전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목표로 시작되었다. 올해는 84개국에서 온 장•단편 포함해 450편의 작품이 상영되었으며, 영화제 기간 동안 노르딕 필름마켓도 함께 열렸다. 드래곤 어워드는 그중 노르딕영화만을 대상으로 한 시상식인데, 다큐멘터리, 장•단편, 데뷔작 분야뿐만 아니라 스벤 닉비스트상, 볼보상(예테보리에 본사를 둔 볼보는 영화제 후원사다) 등이 수여되는 행사이기도 하다.

Violetta Kovacka

마침 시상식은 1월29일 개막 이후 11일간 열린 영화제의 종반을 알리는 자리라 영화제의 전체 분위기를 단박에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드랙퀸 분장의 진행자가 연신 하이톤을 내지르는 가운데, 내겐 감독, 프로듀서 등 무대에 오른 수상자들 대부분이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리거나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렛미인>(2008)의 흡혈귀 소녀 엘리에게서 보았던 스산함 같은 걸 떠올렸다가 아차 싶었다. “아카데미 시상식보다 더 감격적이네요”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아스타가 “스웨덴 사람들이 겉으로 차가워 보일 뿐 실은 감정이 풍부하다”고 말한다. 덧붙여 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밤이 되면 맥주 판매가 금지인데, 이게 부작용이 뭔지 아나?”라며 묻는다. 못 사게 하니 더 많이 사서 쟁여놓게 되고 그러다보니 더 많이 마시게 되고, 그래서 스웨덴의 기나긴 겨울밤에 결과적으로 알딸딸한 알코올 기운이 함께하게 된단다. 막으려다 역효과만 냈다는 의미로 보였다. 어쨌거나 ‘스웨덴영화계가 산업적으로 다소 미비하고 성과가 많지 않다’는 일반론과 별개로 영화 한편 한편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던 시상식장 분위기는 내게 그 어느 곳보다 지금 이곳의 영화계가, 영화인들이 뜨겁다는 걸 알려주는 지표였다.

젊은 영화인들의 스웨덴을 만나다

예테보리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동안에 기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대부분 스웨덴 영화산업의 현주소를 탐색하는 데 할애되었다. 아직 스웨덴 영화산업이 유럽 바깥 지역으로 활발하게 소개되지 않았지만, 잉마르 베리만, 얀 트로엘, 보 비더버그 같은 거장 감독들로 수식되던 스웨덴영화계에 새로운 수식어를 부여하고자 하는 젊은 영화인들의 파동은 생각보다 컸다. 예테보리 도심에서 70km, 버스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트롤헤탄에 위치한 대규모 스튜디오 ‘필름 바스트’(Film va‥st)를 찾은 것도 그 변화를 체감하기 위한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오전 8시부터 독일,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미국 등 전세계에서 날아온 기자들을 깨워 출발한 버스. 스웨덴관광청에서 나온 담당자가 “겨울에 해가 하루 4시간밖에 안 보이는데, 여름이면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다”며 이곳 날씨를 알려주는 사이, 창밖으로는 이케아의 본고장답게 눈 쌓인 자작나무 숲 사이로 이케아 건물이 휙 스치고 지나간다. 필름 바스트는 한참을 더 달려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한해 30~40편의 장•단편 극영화 작업을 비롯해 다큐멘터리, TV드라마 작업이 이루어지는 스웨덴 상업영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허브로, 스웨덴영화협회(Swedish Film Institute, 이하 SFI)에 이은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그리하여 ‘트롤리우드’(Trollywood)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필름 펀드나 국제적인 공동제작이 이곳을 통해 이루어지며, VFX, 조명, 사운드, 편집, 장비 렌털 등 영화 업체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영화의 제작과 후반작업을 이곳에서 모두 수행할 수 있다. “<도그빌>(2003) 때는 니콜 키드먼이 여길 걸어다녔다고! (웃음) 내 옆을. <멜랑콜리아>(2011)의 포스터 컷에 나온 커스틴 던스트가 드레스에 하얀 부케를 들고 있는 장면 기억하나? 그것도 여기서 찍었다.” 필름 바스트의 담당자 구스 카게의 설명에 기자들 모두, 아! 하고 짧은 탄성을 터트렸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도그빌>과 <멜랑콜리아>뿐만 아니라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어둠 속의 댄서>(2000)와 <안티크라이스트>(2009) 등이 이곳에서 탄생했으며, 수잔 비에르의 <인어 베러 월드>(2010),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온리 갓 포기브스>(2013), 닐스 아르덴 오플레브(1부)와 다니엘 오프레드손(2, 3부)의 <밀레니엄> 시리즈,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더 헌트>(2012), 루벤 외스트룬드의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 등 우리가 기억하는 이른바 ‘북유럽’ 영화들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또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수정곰상을 수상한 스웨덴영화, 산나 렌켄의 <마이 스키니 시스터>도 이곳에서 작업했다.

구스 카게는 이곳이 “지역 경제에 있어서도 그 중요도가 크다”고 말한다. “발생한 수익은 지역 경제에 다시 재투자된다. 또 현지인들이 투자와 프로덕션 분야에서 스탭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한다. 세트를 둘러보고 난 뒤에는 CGI 작업실과 프로덕션 사무실, 메이크업 룸 등을 둘러보았다. 창밖으로 올 때 보았던 하얀 자작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조용하지만 실은 가장 북적이는 곳. 현재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영화 프로덕션의 방문이었다.

양성평등에 입각한 영화 만들기

자국 영화산업의 육성과 함께 스웨덴영화계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양성평등에 입각한 영화 만들기를 정책적으로 구현한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이 똑같은 기회와 권리를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스웨덴이 전 분야에 걸쳐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예테보리에서 만나는 영화인들 모두 이 양성평등에 대해서 주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양성평등에 대해서는 들었지?”라고 재차 확인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지겹도록 들었을 테니, 새삼 다시 거론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거라는 바탕 아래 다음 이야기를 전개해나갔다. 이 공공연한 ‘원칙’을 책임지고 주관하고 있는 곳이 바로 SFI다. SFI는 1963년 문을 열었고, 영화학교, 시네마테크, 필름커미션을 설립해온 국가기관이다. 시나리오 기획 개발부터 기금 마련, 배급과 해외 수출입, 해외 합작까지 도맡아 진행하며, 이제 스웨덴 영화인에게는 없어서 안 될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스웨덴영화의 유산을 보존하고, 전국 영화관을 디지털화(현재 거의 100%에 가깝게 디지털화되어 있다)하고, 스웨덴영화의 해외 수출을 증대시키는 일,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영화의 비중을 늘리는 일과 함께 SFI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양성평등과 다양성을 염두에 둔 영화 만들기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총대를 멨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 이가 바로 SFI의 CEO 안나 세르네르다. 그녀가 양성평등 문제를 본격적으로 구체화한 건 2013년부터다. 하도 이 분야에 매진했더니 사람들로부터 “이제 양성평등 이야기는 그만하고 영화 이야기나 하자”는 말을 들었다는 그녀는 “영화산업에서 양성평등은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스토리와 캐릭터가 있는 영화는 사람들에게 그만큼 크게 영향을 미친다. 남성들의 이야기만 하게 되면 그만큼 여성의 기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영화가 말하지 못했던, 다양성의 부족함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녀가 이 부분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오케스트라에서 단원을 뽑을 때 대부분 남성 단원을 선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남자가 더 많은 뮤직 DNA를 가지고 있어서? 아니면 여자보다 손가락이 길어서? 여자들은 아이를 돌봐야 하니 연주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이유가 아니라 단순히 남성을 우선시한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남녀 성별을 가리고 실력으로만 단원을 선택하고 그들이 카펫으로 들어오는데, 여성, 남성의 비율이 50 대 50이었다는 재밌는 결과가 있었다. “실력이 아닌 성별이 좌우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안나 세르네르는 영화계도 오케스트라의 예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SFI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할 목표는 바로 50 대 50이다. 어떤 해에는 여성이 100%를 받고, 그다음해에는 0%가 되는 게 아니라, 꾸준히 남성과 여성이 똑같은 기회를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의 정착이다. “여성 영화인들은 첫 작품을 만들고 나서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으로 이어나가는 게 어렵다. SFI는 펀딩에 있어서 엄격한 기준으로 여성 영화인들이 투자를 받고 배급할 수 있는 멘토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 영화인들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2005년 19%에 불과했던 여성감독은 2015년 기준 44%로 증가했으며, 해마다 칸, 베를린, 토론토 등의 영화제에 여성감독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출품하고 있다.

양적 팽창만큼이나 중요한 평등의 가치

2015년 기준, 총인구가 1천만명이 채 되지 않는 스웨덴의 극장 관객수는 1700만명을 넘어섰다. 전년도 1630만명에 비해 증가 추세다. 그리고 한해 동안 50여편의 장편영화가 생산되고 있다. 루벤 외스트룬드(<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를 비롯해 리사 랑세트(<퓨어>(2010), <호텔>(2013)), 루카스 무디손(<천상의 릴리아>(2002), <위 아 더 베스트!>(2013)), 가브리엘라 피츨러(<먹다 자다 죽다>(2012)), 토마스 알프레드손(<렛미인>(2008),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같은 스웨덴영화계의 뉴웨이브라 불릴 감독들이 스웨덴 상업영화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예테보리국제영화제 직후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열리는데, 스웨덴영화가 9편이나 진출하기도 했다. 취재를 하는 동안 스웨덴의 한 영화인은 스웨덴 영화 스튜디오를 방문한 나에게 “한국에는 이런 스튜디오 시스템이 훨씬 더 잘 갖추어 있지 않나?”라고 물었다. 물론 규모 면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건 아직 작아 보였다. 하지만 양적 팽창에 앞서 그 안에서 끊임없이 양성평등과 다양성의 문제를 고민하는 지점은 스웨덴영화계를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계가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길 위로 전차가 지나가는 풍경이 감성을 자극하는 고풍스런 도시 예테보리를 방문한 것은 스웨덴영화계의 활발한 움직임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였다.

스웨덴 필름 커미션의 잉르드 루데포르스(오른쪽).

영화인들이여, 스웨덴으로 오세요

스웨덴 필름 커미션의 잉르드 루데포르스

“내게 전화해. (웃음)” 어떻게 하면 스웨덴 필름 커미션과 협력하여 스웨덴 지역에서 촬영할 수 있냐는 말에 이 단체의 담당자인 잉르드 루데포르스(Ingrd Rudefors)의 대답이다. 스웨덴 필름 커미션은 로케이션 헌팅, 허가 등을 관리하고 영화인과 연계해주는 기관이다. 그녀는 자신을 스웨덴과 다른 국가의 영화인들이 함께 콜라보레이션하고 코 프로듀싱할 수 있도록 하는 ‘매치메이커’라고 소개한다. 할리우드 영화사와의 협력관계도 이곳을 통해 이루어진다.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의 경우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스웨덴 촬영을 원했고, 성사가 된 경우다. “촬영으로 대니얼 크레이크가 스웨덴에 왔을 때 공항에서 VIP 신청을 하지 않았고, 그냥 짐가방을 기다리고 있었다더라. 스웨덴 사람들은 그냥 ‘대니얼 크레이그가 있네’ 정도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파파라치도 없다. 여기가 스웨덴이다. 스웨덴의 분위기다.” 필름펀드와 공적자금, 그리고 개인이 투자한 자금까지 여러 경로에서 유입된 혼합자금이 영화의 지원금으로 책정된다. 최근 스티그 비요크만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2015)에 이어 2018년 칸국제영화제 진출을 목표로 하는 다큐멘터리 <잉마르 베리만> 역시 스웨덴 필름 커미션의 협력으로 제작 중이다. 최근 ‘노르딕 범죄물’이 증가하고 있으니 스웨덴이 마치 끔직한 도시처럼 비칠 우려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런 지점은 오히려 “부정적이지 않다”는 대답을 내놨다. 실제로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덕분에 전세계 관광객이 ‘밀레니엄 투어’를 신청해서 촬영지를 방문한다고 하니 이미지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

스톡홀름에서 비행기로 25분 남짓 날아서 스웨덴 동쪽 발트해에 자리한 고틀란드 섬도 작지만 중요한 촬영지 중 하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촬영 중 죽음의 선고를 받은 곳이자 <희생>(1986)의 촬영지, 1980년대 국내 방송된 스웨덴 TV드라마 <말괄량이 삐삐>의 노란 집이 있는 곳,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마녀 배달부 키키>(1989)를 찍을 때 배경으로 촬영해 간 곳도 고틀란드의 올드타운이었다. 이 밖에도 스웨덴의 여러 부속 섬들이 전세계 영화인들을 위해 촬영지로 개방되어 있다.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 Stina Go‥rtz.

이미지를 제대로 소비하도록 도와야 한다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

<포스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 이하 <포스마쥬어>)을 연출한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은 예테보리 대학의 교육기관 중 하나로 영화, 사진, 파인아트 분야를 교육하는 발란드 아카데미(Valand Academy)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매해 50여명의 학생이 발란드 필름 프로그램을 수학하며, 그중 감독으로 6명씩 배출되고 있다.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은 영상 분석을 통해 비주얼 언어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영상의 재생산(Reproduce)이다. 발란드 아카데미에서 루벤 외스트룬드 감독을 만났다.

-이미지 재생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는지 상상조차 못할 것이다. 이미지에 대해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스웨덴 타블로이드지의 범죄 사진 이미지를 보면 <스카페이스>(1983)에서 총을 든 토니(알 파치노)의 모습과 흡사하다. 미디어가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그걸 널리 퍼뜨리는 거다. 이미지는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제 기간 동안 이와 관련한 <Work(s) In Progress전>이 열리니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이미지 재생산이 끼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가.

=재밌는 건 대부분의 관념이 학습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를 많이 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이혼율이 높다고 한다. 그들은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레퍼런스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영화에서 마피아는 단골 소재다. 우리가 왜 그런 이미지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지 생각해봐라. ‘남자는 히어로’라는 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재생산된 이미지다. 반대로 여자는 항상 섹스 심벌로 대변된다. 스테레오 타입과 기대치가 정해져 있어서다. 나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기대되는 역할들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포스마쥬어>의 눈사태 장면과 마지막 장면(호텔에서 나온 사람들이 급커브이자 낭떠러지에 있는 버스에서 탈출해 나온다)이 유튜브 영상에서부터 왔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이미지 재생산의 개념에서 설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유튜브에서 본 게 “Worst Man Cry”였다. 버스 장면은 그중 “Idiot Spanish busdriver almost kills students” 부분에서 참고했다. 절벽 위 커브길에서 운전을 못하는 운전사 때문에 학생들이 내리는 내용이었다. 눈사태 장면도 어떤 다른 영화에서 본 게 아니라 유튜브에서 참고한 이미지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정말 많은 편견과 기대에 따라 움직인다. <포스마쥬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보호하지 않은 남편을 그린 건, ‘남자는 항상 여자와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편견을 비꼰 것이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을 때 여자와 아이들이 가장 많이 희생됐고,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건 남자였다. 재앙이 닥쳤을 때 통계적으로 남자들이 더 많이 살아남으며, 그건 남자들이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지의 중요성이 점점 가중되고 있다. 이런 영상문화가 다음 세대에는 어떤 영향으로 다가올까.

=지금 어린 세대들은 유튜브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를 창조한다. 그들로부터 광고나 영상을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이상 컨트롤할 수 없는 단계가 돼버렸다. 이미지가 그만큼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 세대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영화의 이미지를 제대로 소비해야 한다는 건 그래서 그만큼 더 중요하다.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을 말해달라.

=<더 스퀘어>(The Square)란 작품을 작업 중이다. 사회, 공공영역에서 우리의 태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관해 다룬다. 내 아버지가 6살 때만 해도 어른들은 주소가 적힌 네임택을 목에 걸어 아이를 놀이터에 내보냈다. 그땐 다른 어른들이 아이들을 돕는 존재였다. 지금의 어른들은 우리의 아이들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고 그 지점을 다루려고 한다.

비오 리오 극장의 엘렌 테이에.

전세계에 벡델 테스트를!

비오 리오 극장의 엘렌 테이에

스웨덴에서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체인 비오 리오 극장(스톡홀름, 말뫼, 헬싱보리, 예테보리에 있다)에서 일하는 엘렌 테이에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관점과 여성의 스토리가 부족한 스크린에서 여성들이 목소리를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녀는 “스웨덴은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가장 상징적인 국가”라고 말한다. 그녀는 스웨덴영화계가 양성평등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벡델 테스트(Bechdel Test)를 전개하고 있다.

-양성평등에 대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스웨덴에서 여성의 권리, 곧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생각하며 자랐다. 똑같은 텍스트가 있어도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표현된다. 문제가 있었다. 여성이라는 걸 떠나 이건 사람을 다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영화로 돌아가보자. 나는 영화계에서 8년 동안 일했다. 그런데 2013년 당시, 숫자를 세보니 스웨덴영화에서 ‘말을 하는’ 여자는 30%밖에 안 되더라.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이 자랄 때는 남녀를 상관하지 않고 같은 꿈을 꾼다. 그러다 5살이 되면 달라진다. 남자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나 TV를 보면서 타입화되어가는 거다. 제대로 된 개념을 알려줄 롤모델을 가지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극장에 양성평등을 인증하는 벡델 테스트를 도입했는데, 그 개념을 설명해달라.

=벡델 테스트는 1985년 미국 코믹 스트립인 엘리슨 벡델의 만화 <다익스 투 워치 아웃 포>(Dykes to Watch Out for)에 등장했다.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려면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이 세 가지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스웨덴은 2012년 이후 벡델 테스트를 영화산업에 도입(세계 최초)해 모든 영화에 이 기준을 적용시키고 있다.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에는 영화 상영 직전 인증마크 ‘A’가 부여된다. 기준이 너무 단순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중요한 건 이를 통해 평등에 대해 사람들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거다.

-벡델 테스트를 도입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2012년에 벡델 테스트를 도입한 이후 3년이 지났다. 스웨덴에서는 시나리오 작가, 감독, 영화평론가 등이 그들이 일할 때 벡델 테스트를 사용한다. 4명이 대화하는 시나리오를 쓸 때 으레 사람들은 남자 역할을 만든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그럴 때 이 역할을 여성으로 바꿔봐라, 여성 역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도록 환기를 하는 거다. 이런 게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영화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일도 아니다. 처음에 생소해했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3년 사이 눈에 확 띄는 결과가 나타났다. 처음 벡델 테스트에 통과된 영화가 30%였다면, 2015년에는 80%에 달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해하기 쉽고 재밌기까지 하다. 영화제나 여성의 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매일 이 개념을 생각한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적용한다면 분명 관객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린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저 스웨덴 사람일 뿐이다.

※ 예테보리국제영화제 취재는 주한 스웨덴대사관과 스웨덴대외홍보처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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